불면증이 아니라 무면증이 아닐까 싶은 만큼 뜬 눈으로 밤을 지세워 온 나는 베개로 불면증을 치료했다는 말에 중고 거래로 그 베개를 산다.그날 밤, 나는 의사의 권고대로 빛 한 점, 소음 하나 들지 않게 꽁꽁 싸맨 방에 누워 머리로 그 베개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p8)왕방울이 죽었으면 좋겠어.베개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중고거래를 했던 여자의 목소리라는 사실에 놀라 그녀에게 연락하게 되고 그들 공통의 빌런 왕방울에 대해 이야기하다 무자비한 복수를 계획한다자영업자라면 한 번쯤 경험하게 되는 블랙컨슈머인 왕방울은 한 번의 진상짓으로 끝나지 않는다.젊은 여자 혼자서 운영하는 일인 사업장을 상대로 온갖 진상을 떨며 돈을 요구하고 그 요구가 받아 들여지는 순간 정기적으로 수금을 하러 온다.만약 내가 왕방울의 진상짓의 먹이감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법에 의지할까 생각하다 동네 장사인데 일이 너무 커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조사를 받고 나온 뒤 더 크게 소란을 피우지 않을까 걱정하다 잠 못 이룰 듯하다.그녀들의 복수는 성공한 듯하지만 그 뒷맛이 영 개운하지가 않다.복수 뒤 편안한 잠을 잘 것 같던 그녀들의 불안은 말끔히 가시지 않은 체 밤을 지샌다.복수를 성공해도 생각만큼 즐겁거나 행복하지 않은 그녀들을 보면서도 차마 누군가를 미워하지말고 복수를 계획하지 말라고 말할 수 없다.부디 왕방울씨가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다시는 진상 짓을 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모든 것이 낯설기만한 새학년 새학기의 새로운 교실에서는 새로운 친구를 탐색하기 바쁩니다.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곁눈질로 살핍니다.낯 익은 친구와 반가운 인사를 하고 난 후 교실을 둘러보는 예지에게 옆자리 선민이가 말합니다.“너 문병욱 바보인 거 알아?”“말도 잘 안 하고 날마다 주머니에 손 넣고 다녀.”예지는 속으로 생각합니다.‘그렇다고 바보인 건 아닌데.’아이나 어른이나 처음 가는 장소에서 스스럼없이 행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저 역시 학창 시절 누군가 말을 걸어주기전에 먼저 나서서 말을 걸었던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우연한 계기로 말을 트고 단짝이 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아요.새로운 2학년 예지네 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친구들과 조금 다르다고 무시 당하는 친구에게 자꾸만 눈길이 갑니다.바로 문병욱이 그렇게 예지의 눈길을 머물게 합니다.수 많은 어린이책을 쓰신 이상교 작가님의 간결한 글과 한연진작가님의 순수한 그림이 어울린 그림책은 나와 조금 다른 친구를 인정하고 친구가 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문병욱 할머니를 만난 일을 기억해 낸 예지는 용기를 내봅니다.친구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는 순간 가까이 다가갈 용기가 생깁니다.그 용기는 벽을 깨고 지금까지의 서먹함은 봄눈 녹듯 사라지게도 합니다.누군가 용기를 내 말 걸어준다면 어떤 아이의 학창 시절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될 수도 있습니다.왕따니 학교 폭력이니 속 시끄러운 뉴스가 가득한 세상에 햇살 같은 해답을 던져 주는 그림책입니다.<문학동네에서 제공 받은 도서입니다>
가끔 시집을 구입하지만 끝까지 읽은 시집은 몇 안 된다.특히나 요즘 출간되는 현대시의 난해함은 여러 번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워 몇 편 읽고 그만 두는 게 다반사다.그러니 한국 시 번역가를 인터뷰한 산문집이라는 설명을 읽고 한참을 망설여 고른 책이다.인터뷰어인 “은유”작가도 초면이고 우리 시를 각국의 언어로 번역한 번역가들도 낯선 이름들이다.우리 말로 번역된 외국시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나라 언어로 된 시를 읽어낼만한 능력이 없는 탓에 우리나라 시를 번역한 시를 읽은 일도 없다. 그러다보니 인터뷰에 응한 번역가들 중 ‘저주토끼’를 번역한 ‘안톤 허’를 제외하고는 모두 처음 알게 된 번역가들이다.한영 번역가 호영, 안톤 허, 소제, 알차나, 새벽, 한일 번역가인 승미, 한독 번역가인 박술을 르포 작가인 은유가 한 달에 한 번 서울 동네 책방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한 기록이다.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단순한 묻고 답하기가 아니라 번역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느낀 은유 작가의 소회를 적고 있다.7인의 한국 시 번역가는 다른 계기로 시를 번역하는 길로 들어섰고 번역하는 과정은 각자에게 맞게 특화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시인의 시를 제대로 번역하기위해 지단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언어 체계가 전혀 다른 언어를 번역한다는 일은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휠씬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시 읽기에 어려움을 겪는 나에게 호영 번역가가 정답에 가까운 이야기를 해 준다."시는 이해에서 자유로워서 좋은 장르 같아요. 다 이해 못 해도 나중에 또 와서 읽으면 뭐가 보이겠지. 약간 이런 식으로 넘어가는 편이에요. 그냥 어떤 느낌을 가져가면 되는 것 같아요."(p36)낯선 분야인 번역가, 그것도 우리 시를 번역하는 번역가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소개된 시 몇 편을 찾아 읽었다.단순한 문장이 아닌 여러가지 의미를 함축한 단어들을 보며 그들이 어떻게 번역했을까 궁금해진다.끝내 읽지못할 그들의 번역된 시이지만 수고에 박수를 보낸다.<읻다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한 번이라도 이용약관을 꼼꼼히 본 적이 있나 생각해 본다.의도적인지 맨눈으로 보기 어려운 크기의 글자와 난해하고 복잡한 문장으로 쓰인 이용약관은 계약과 함께 따라 오는 문서이지만 자세히 본 적은 없다.무려 <내 마음 이용약관>이라는 제목의 작은 에세이집을 꼼꼼히 읽어본다.불공정한 지난 약관을 파기하고 새로운 이용약관을 만들어야 했다. 그동안 작은 글씨의 약관을 읽지도 않고 동의했다. 사용 설명서를 꼼꼼히 읽지도 않았다.나를 알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나와의 접촉면을 늘리기. 즉, 내 시간을 늘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나를 안다는 착각에서 빠져나와 “너 한테 그런 면도 있었어?"의 그 면을 찾아야 했다.(p12)누구나 알고 있지만 정리해서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내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요약해 준다.느긋함과 더불어 이 정도 사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주고 나의 불안이 특별하지 않다고 말해 준다.그리고 작게 지금의 나에게 ”괜찮허용“이라는 말을 던져 준다.소설에서는 매운 맛으로 독자를 놀라게 하는 작가지만 에세이만큼은 오바하지않아 여러 번 읽을 수 있는 글들로 가득하다.손에 쏙 들어오는 판형의 책이라 곁에 두고 마음이 어지러울때 읽기에도 딱이다.<케이시 작가님이 보내주신 도서입니다>
인공지능, Al가 소재인 6편의 단편이 실린 단편집이다.소설은 AI가 실용화 되고도 여전히 사람의 손이 필요한 시대를 그리고 있거나 과거에 존재했던 인공지능 로봇이 등장한다.한국전쟁 휴전 후 고전적인 방법으로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는 로봇과 그 기술을 계량화하려는 로봇이 등장하는 #보편적인내엉덩이 속 AI는 인간과 공존하는 삶을 산다.살아 생전 채팅 GPT의 프롬프트 엔지니어로 일하다 49일 연속 야근 중, 서른여덟 시간 무수면 갱신 중 사망한 ‘아샤누’는 채팅GPT 속으로 가게 되고 서버 안에서 인간의 질문에 답을 하는 존재가 신들이라는 설정의 이야기 #채팅GPT의신들 에 등장하는 신들이 펼치는 티키타카가 흥미롭다.존엄사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룬 이야기는 환자가 의식이 없자 존엄사가 시행되어야 할 순간에 입회 확인란에 AI 간병 로봇 구공일이 사인을 할 수 있는 지와 그 사인이 유효한 지의 논쟁으로 시작된다.단순한 인공지능의 한계뿐 아니라 보호자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고령층의 어려움을 생각하게 하는#비트겐슈타인의이름으로 는 여러 생각거리를 던져준다.간병 로봇 구공일이 카페 바리스타로 전직하여 30년을 일한 카페에 매화만신을 대신해 굿을 하러 온 로봇 구금산이 등장하는 #만물에앎에는참으로끝이없다 는 여전히 따듯한 마음을 갖고 있는 구공일이 반갑다.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표제작과 문윤성SF문학상을 수상한 작품들이다.아이를 키운 엄마나 지금 키우고 있는 엄마라면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두 이야기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를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끼게 한다.#한밤중거실한복판에알렉산더스카스가드가나타난건에대하여 라는 긴 제목의 소설은 육아 중 엄마가 겪는 고립과 말이 통하는 누군가와의 대화가 얼마나 크기 숨통을 트이게 하는지 증명해 준다.표제작인 #오늘밤황새가당신을찾아갑니다 는 남편의 부재와 전담 육아를 해야하는 주인공의 고담함이 고스란히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엄마 작가의 이야기는 아이에 양육에 특화된 이야기를 재미나게 썼다.나는 이미 지나온 길이지만 육아의 길이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지 알기에 한밤중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나는 걸 반기고 황생영아송영 서비스는 물론 펭귄 서비스를 기대하는엄마의 마음이 이해된다.한편으로 아무리 AI가 발달해 아이를 돌 볼 수 있어도 엄마라는 존재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결론에 그냥 마음이 따듯해져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덮는다.<도서는 래빗홀 출판사에서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