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자본주의 - 자본은 감정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에바 일루즈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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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은 '부제'를 읽으면 명확해진다. '자본은 감정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자본주의가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 이용(?)해 왔으며 (현재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렵다. 첫번째는 번역자의 놀랍도록 어색한 번역이다. 영어의 경우, 이젠 자연스럽게 번역을 하는 사람들이 꽤 늘었다. 불행히도 이 책은 자연스러운 번역과는 거리가 멀다. 번역자의 국어 실력 덕분에 독자가 이 책을 더 어렵게 느끼게 되었다.

 

다른 이유는, 저자가 (사회학, 철학, 정신분석학 등의) 이론에 대한 자세한 설명 없이 '이 정도의 이론은 모두 알지?'라는 전제 하에 쓰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이해해야 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한국의 상황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교양서보다는 학술서에 가깝다.

 

하지만 저자는 꽤 명확한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논증하기 때문에 첫 장만 견디면 뒤는 더 이해하기가 쉽다. 물론 내용이 뒤로 갈수록 쉬워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은 총 3장의 챕터로 되어 있다.

 

저자는 '감정'을 "지극히 주관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고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행동의 한 측면, 곧 "에너지가 실린 측면"으로 정의"한다. "극도로 압축되어 있는 문화 의미들과 사회관계들"이며 "심리단위"이기도 하지만 "문화 단위이자 사회 단위"라고 이야기한다. "감정을 통해서 인간됨의 문화 규정들을 구현하게 되기" 때문에 감정을 사회학으로 끌어들여 논의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첫 장 "호모 센티멘탈리스의 탄생"에서는 미국의 심리학자들이 감정을 경제활동의 영역과 결합하여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증대시킬 수 있었던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엘튼 마요'의 실험은 '치료면담'과 거의 흡사한 '면담법'이 실제로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증대시켰음을 증명했다. 이 과정을 통해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노동자 자신의 삶과 관련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노동자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 그들의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방식임을 깨달았고 그로 인해 생산성을 증대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심리학의 치료 내러티브는 자연스럽게 기업에 수용되었다. 기업은 '소통'을 통한 리더십을 강조하게 되었고 그 안에는 '인정 내러티브'가 작동한다. 이러한 방식은 단지 기업에서 그치지 않고 "노동관계와 결혼관계에 널리 퍼지게 되는데"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인정해야 한다는 새로운 필요를 포함하고 수용하고 있다".

 

노동자의 삶은 노동현장에서만 이루어지지 않고 실제로는 가정생활에서 시작된다. 일상적인 결혼이나 가족관계가 노동자가 노동현장에서 일을 할 때 영향을 미침을 알고 치료언어를 통해 노동자를 기업에 적합하도록 치료(?)한다. 그리고 그러한 치료가 가정 내에도 영향을 미치다는 의미이다. 노동자가 스트레스 받지 않는 환경, 긍정적 감정을 형성하기 위해 소통하고 인정받아야 하며 하기 때문에 '감정'은 더 이상 '노동자 자신의 감정'이 아니며 기업의 성과를 좌지우지하는 '감정'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 '감정'이 중요해졌다.

 

두 번째 장 "고통, 감정, 장, 감정자본"에서는 1960년대 이후부터 심리학이 대중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아란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존재로 바라보았던 심리학자들을 통해 나아가 자아실현과 건강이 같은 것이라고 바라보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를 실현하지 못한 사람은 보살핌과 치료학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치료 내러티브는 자기계발 내러티브와 만나며 결국 고통 내러티브와도 만나게 된다. 자아실현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를 더욱 계발하는 사람은 결국은 끊임없는 노력의 반복을 통해 고통과도 만날 수밖에 없기 떄문이다.

 

그래서 "19세기 자서전의 유형이 "가난뱅이가 부자가 되었다"라는 즐거리였다면 오늘날의 자서전은 부와 명예를 누리는 중에도 닥쳐올 수 있는 정신적 번민을 다룬다." '오프라 윈프리의 자서전'이 대표적인데 아무리 유명하게 살아도 자신 안의 번민은 있으며 그 안의 번민들과 끊임없이 싸울 수 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결국은 "미완의 자아가 등장하는 전기, 고통이 정체성의 구성요소가 되는 전기"가 등장한다.

 

이런 치료 담론은 페미니즘과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재향군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는 미국의 제약회사와 DSM(아마도 정신질환진단)가 정신적인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주체로 등장하게 한다. 폭넓은 정신질환진단을 통해 정신과용 의약품을 처방받게 하여 경제적인 이득을 얻게 되었다.

 

정상(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존재)과 비정상(자아실현을 추구하지 못하는 존재)로 나눔으로써 비정상은 정상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런 노력이 자기계발로 이어지게 된다. 노력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면 치료를 받고 처방약을 먹어서라도 정상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 장 "로맨틱한 웹"에서는 온라인 데이팅이 왜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한다. 온라인 데이팅을 하기 위해 온라인 상에 올리는 정보는 사람을 하나하나의 설명되는 언어로 분절시킨다. 온라인 데이팅에서 우리는 한 명의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에 올려진 정보(언어)로 만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쓰는 사람은 '부풀리고 최상을 적게 된다.'

 

반대로 읽는 사람은 부풀려진 정보를 통해 더 나은 상대를 기대하고 되고 오프라인에서 상대를 만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온라인 데이팅이 오프라인에서 실현될 때 잘 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리고 너무나도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온라인'에 올려지기 때문에 이 또한 일종의 '시장'을 형성하게 되기 때문에 데이트를 할 때조차 더 나은 상품을 구매해야 할 것 같은 심정이 생기게 되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더 나은 사람을 만나야 할 것 같기 때문에 더 나은 상대를 원하게 되고 쉽게 만족할 수가 없어진다.

 

하지만 정말 인간은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만나야 하며 단지 언어로 표현되는 상대보다는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상대에 사랑을 빠질 수도 있다. 그러니까 "얼굴 대 얼굴의 만남은 속성들 일체로 환원될 수 없는 "전인적" 만남이다. 이런 만남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낱낱의 속성이 아니라 속성들 사이의 상호관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맨틱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인지"가 아닌 "감지"를 통해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감정' 또한 '자본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예전처럼 자본주의 체체를 벗어나 비판할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 내부에서 비판하는 일을 멈출 수는 없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이데올로기란 우리로 하여금 모순들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게 해 주는 어떤 것인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듯하기" 때문에 바로 그 지점에서 (비판을 혹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연구를) 시작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

 

책을 읽으며 감탄을 하게 만드는 사유였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개인적인 감정'마저도 활용하고 있구나 깨달으며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 자본주의에서만 살아본 나는 자본주의의 대안을 구체적으로 그릴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하고 그 모순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삶을 포기할 수 없을 뿐이다. 저자의 말처럼 이데올로기가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될 때 그 틈 사이에서 또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아직은 그 구체적인 모델을 밝힐 수는 없더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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