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마치를 기억한다.
"연인"으로 알려졌지만 강렬히 각인된 건 "컬러오브나이트" 였다.
두 영화가 개봉 되었을 당시엔 내가 어려서, 후에 붉은색 띠가 둘러진 영화를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땐 관심에서 벗어나 있어서, 웬만한 야시시에도 흔들리지 않는 내공이 쌓인 지금은 글을 쓰기 전까지 기억도 나지 않아서, 그래서 지금까지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영화를 싫어하진 않지만 딱히 좋아하지도 않았기에 관심있는 장르 아니면 좀체로 찾아보지 않는 까닭도 있다) 그 시절, 그러니까 나는 어려서 절대 볼 수 없었던 그 시절 "컬러오브나이트"에 등장하는 파격적인 제인 마치는 나이 많은 오빠와 언니들이 있어 영화를 접했던 친구들의 생생한 설명을 통해 알고는 있었다. 에이프런을 두른 그 제인 마치가 얼마나 충격적인지를! 그 때문에 내 기억의 제인마치는 주말이 되면 방송 했던 영화 프로그램과 영화 잡지에서 접한 "연인"의 가녀린 그녀가 아니라 "컬러오브나이트"의 반라의 제인마치였다.
모든게 제인 마치 때문이야. 아니 모든 이유는 아니겠지만 나에게 "연인"이란 책을 "롤리타"와 같은 선입견을 안겨준 것에 대해 제인 마치가 상당 부분 차지한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선입견. 그 선입견 말이다.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어떤 내용인지 알고는 있고, 사회적으로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며 온전히 문학으로 읽히기도 하겠지만 소재의 파격성이 이해되지 못한 사람들에겐 예술로 꽁꽁 싸매진 붉은 책.
난 "롤리타"를 비교적 최근에 읽었는데 읽고난 뒤엔 가지고 있던 선입견에 대해 부끄럽고, 짜증나고, 화가나고....
아 뭐야. 재밌잖아. 왜 다들 책에 대해 롤리타컴플렉스니 따위의 화제성만 이야기만 해주고 재미있다는 이야기는 안 해준거야? 이 사람들 책을 제대로 읽기나 한건가? 나보코프 졸라 쏘리!
"롤리타"를 읽고 난 뒤에 선입견 따위 때문에 어지럽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부랴부랴 "연인"까지 찾아 읽었을.... 따위가 없잖아. 내가!
나의 삶은 아주 일찍부터 너무 늦어 버렸다. 열여덟 살에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어 버렸다. 열여덟 살과 스물다섯 살 사이에 내 얼굴은 전혀 예기치 않는 방향으로 변해갔다. 열여덟 살에 나는 늙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지 어떤지는 알지 못하고, 결코 물어본적도 없다. 다만 가장 싱그러운 젊은 날을, 생애에서 가장 축복 받은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이따금 충격적인 시간들이 후려치곤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나에게 얘기해 주었던 것처럼 여겨질 뿐이다. 늙어 간다는 것은 가혹했다. 나는 늙음이 내 얼굴에 찾아와 내 모습을 하나씩 하나씩 변화시키는 것을 목격했다. -10P-
어디선가 읽었다. 어딘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왜 읽게 되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생각나는 건 열여덟 살에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어버렸다는 문장에 어서 빨리 이 책을 읽어야겠다라는 생각으로 꽉 차서 지금 나가서 서점에 가는게 나은가, 결제한 후 내일 받는게 더 나은 건가 고민을 했다는 거다. 결국엔 귀차니즘이 이겨서 온라인 구매를 했지만 먼저 장바구니에 담겨 있던 7권의 책을 모른체 할 수 가 없어서 출혈이 컸던 것은 실패.
책은 딱 생각만큼 재미있었다. 간결한 문장이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었다. 다른 책을 더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아직 들기도 했는데 책장을 보니 내가 책을 가지고 있더라고. 그녀의 "모데라토칸타빌레" 를.... 뭐지 이게?
그러나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하고 싶은 얘기는, 내 나이가 열다섯 살 반이었을 때의 얘기다. 메콩 강을 나룻배로 건넜다. 그 영상은 강을 건너는 동안 줄곧 이어졌다. 내 나이 열다섯 살 반이었고, 그 나라에는 계절이 없었다. 우리는 오직 한철뿐인, 무덥고 단조로운 계절에 묻혀 있었다. 봄도 없고, 봄소식도 없는 지구의 긴 열사 지대에 살고 있었다.-11P-
영화 스틸컷의 제인 마치를 기억하는 나는 뒤라스가 그려내는 주인공이 장차 연인이 되는 남자를 만나는 장면에서 놀래고 말았다. 어찌나 세세한 묘사를 해 놓았는지, 어찌나 제인 마치와 매치가 되는지.
나는 생사로 만든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 옷은 낡았고, 속이 훤히 내비치다시피 했다. ....그날 나는 아마도 오빠들의 허리띠 중 하나였을 가죽 벨트로 허리를 졸라매고 있었다 ....그날은 굽에 금박을 입힌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날 소녀는 남성용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장미빛이 도는 펠트 모자로 커다란 검은 리본까지 달려있었다. ....머리를 두갈래로 땋았지만 평소처럼 틀어올리지 않았다. ....나는 두 뺨의 윗부분, 눈 밑에 있는 적갈색 점들을 감추기 위해 토칼론 크림을 발랐다. 그런 다음 그 위에 우비강 제품인 피부 빛깔의 분을 발라주었다. ...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고 다른 것, 그렇다. 다른 어떤 것, 이를테면 기질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나타내고 싶은대로 나를 나타 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내가 아름답기를 원하면 아름다워질 수 있었다. 모든면에서 매력적인 소녀가 될 수 있었다
굉장하다. 사람들이 원하면 아름다워 질 수 있다니. 아름아름 열매를 먹는 건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원할때 아름다워 질 수 있다는건지. 게다가 모든면에서 매력적인 소녀가 될 수 있단다. 슬펐다. 난 사람들이 원하고 나 또한 원해도 그렇게 아름다워 질 수 있을지 의문인데 거기에 엄청난 노력을 통해서 모든면에 매력적이 될 순 있다치더라도 더 이상 소녀는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주인공이면서 뒤라스인 그녀는 나룻배에서 그를 만난다. 그가 차에서 내려 자신에게 다가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권하고, 그녀의 남성용 모자를 칭찬하며 그녀가 써서 아주 예쁘다고 말해준다. 기숙사로 데려다 주겠다는 그의 말에 승낙을 하고, 그의 차에 올라탄 그녀는 이제 더이상 버스를 이용하여 여행을 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는 그녀의 연인이 될것이었다. 그는 쾌락을 원했고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는 돈을 원했다.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더 좋겠어요. 날 사랑한다 해도, 습관적으로 다른 여자들에게 하는 것 처럼 해주세요"
그는 운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사랑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더 사랑했다. 그녀가 사랑하지 않은 것만큼 사랑했지만 그 사랑도 아버지 앞에선 지키지 못하고 무너진다. 아버지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던 남자.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길 바랬던 남자. 엄청난 부를 지녔음에도 여자의 식구들에게 나서기가 당당하지 못했던 남자. 백인이 아닌 중국인이었던 남자.
소녀의 집은 가난했다. 그래서 소녀도 가난했다. 집은 가난하지만 사랑은 넘치는 그런 가정도 아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혼자서 집안을 책임지는 어머니는 인도차이나에서 현지인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데 근무지가 바뀔때마다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며 아이들을 키운다. 어깨를 누르는 책임감에 억압된 생활을 하는 그녀는 정숙함으로 포장된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 큰 오빠는 술과 도박 그리고 폭력까지 삼박자를 갖추었다. 집안을 흔들고 있는 장본인임에도 어머니는 그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다. 아마도 그건 온전치 못한 자신의 정신 상태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자신이 낳은 아들이 그런 사람이란걸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 같다. 어머니는 그녀가 죽을때까지 그 믿음을 놓치 않는다. 작은오빠는 유약한 사람이었지만 소녀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니 소녀는 식구들 모두를 사랑했다.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큰오빠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도 난 모두 사랑하고 있었다. 단지 그걸 모를 뿐이었다. 가지고 있는 절망과 슬픔이 너무 커서 그걸 찾아내지 못했다. 사랑을 말이다.
가족은 망가져갔다. 그리고 조금의 회복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가난과 광기어린 식구들의 압박이 클수록 소녀는 연인에게 집중을 한다. 연인은 그 남자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가진 슬픔 이기도 했다. 소녀에겐 슬픔과 남자가 연인으로 묶어져 있었다. 소녀의 식구들은 돈 때문에 남자를 만나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걸 이용한다.
소녀가 연인때문에 기숙사 생활에 충실하지 못할때 어머니는 남자와의 만남을 방조한다. 또 추문이 돌때 소녀의 어머니가 말한다. 그녀는 자유롭게 풀어달라고, 그녀가 공부는 꽤 잘하지 않으냐고, 그녀는 자랑이라고, 그녀에게 헐렁한 그 원피스와 굽있는 신발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매춘을 한다는 소문에 어머니는 웃어넘기지만 소녀의 손가락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본다.
"나는 너 같지는 않았어. 나는 너보다는 열심히 공부했어. 나는 아주 진지한 아이였지. 너무 오랫동안. 너무 나이 들도록 그렇게 살다 보니 즐거움을 느끼는 법을 잊고 말았지만"
어머니는 소녀를 바라보며 미소짓는다. 조롱이 담긴 미소였다. 소녀에게 너는 더이상 여기서 결혼하지 못할거라 말한다. 그렇지 않을거라는 소녀에게 여기선 다 알려지고 말거라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해주지 않을거라고도 한다. 소녀가 말한다 "그럼요. 여하튼 그들은 나를 좋아해요." 그러자 어머니가 대답한다.
"네가 그런 아이이기 때문에 너를 좋아하는 거겠지"
충격이었다. 어머니인데. 당신이 사랑하는 딸이잖아. 네가 가진 젊음과 육체는 소중히 다루라고, 그렇게 말을 해줘야 하는거잖아. 잘못하고 있는 부분에 화를 내고, 야단을 쳐야지. 아 그러고 보니 앞쪽에서 그랬던 것 같아. 남성용 모자를 쓰고, 헐렁한 원피스에, 금박의 힐을 신은 야릇한 모습을 묵인한건 자신의 수도사같은 자신의 옷차림에 대한 반감과 욕망때문이었나? 글쓰기를 원하는 딸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건 자신과는 다른게 본인의 욕구를 드러내는 딸에 대한 질투였던거다. 자신은 지금까지 억누르며 살았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진데 딸은 그렇지 않을것이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 자신의 광기, 기둥이 되어야할 아들의 망나니짓, 위로가 되지 않는 둘째아들. 소녀의 어머니는 소녀를 사랑하면서 질투를 했다. 즐기는 법을 모르고 진지하게만 살았던 자신에 대한 분노가 표출된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처음부터 위태했던 그들의 관계는 결국 끝이난다. 애초부터 이루어질리 없는 관계없다. 남자의 아버지가 반대했고, 여자의 식구는 그를 무시했고, 소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고, 남자는 소녀를 사랑했지만 그 사실을 알았으니까. 연인이었던 그는 백인 소녀와 헤어지고 집안에서 정해준 여자와 결혼을 한다. 중국인이고 소녀와 동갑이었다. 소녀는 미련없이 떠나면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에게 아직 우위에 있음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자신이 떠난 후 남자는 쉽게 자신을 잊지 못할거라 생각하고 그의 새로운 여자는 지워지지 않은 자신의 그림자에 슬퍼할거라고도 생각한다.
소녀는 베트남을 떠나게 되고, 그녀를 미치도록 사랑하지만 그녀와의 미래를 위해선 아무런 시도를 하지 않는 무능한 남자는 베트남에 남았다. 그리고 난 의문이 남았다. 소녀는 정말 남자를 사랑하지 않은 것일까? 단순히 돈을 위해서, 육제적인 쾌락을 위해서만 그를 만났을까? 비정상적인 가족에게의 도피처였을 뿐일까? 망가진 소녀에게 연인이었던 그남자는 아무런 의미도 아니었던 걸까?
뒤라스는 말한다.
나는 글을 쓴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도 글을 쓰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믿으면서도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닫힌 문 앞에서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35P-
소녀는 사랑받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족이 그녀에게 그런 생각을 가지게 했다. 소녀는 연인에게 사랑이 아니더라고 특별한 감정을 가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걸 그에게 주지는 않는다. 주는 법을 몰랐을 것이다. 그냥 그의 사랑을 온 몸으로 받을 뿐이었다. 그는 가족 대신이었다. 가족에게 받을 사랑을 그에게서 받고 있었다. 베트남을 떠나기 전 남자와의 추문에 돈 때문에 만난다는 소녀의 말을 어머니는 믿지 않았다. 소녀도 몰랐던 사실을 어머니가 아는것이다. 즐길 줄을 몰라 즐기지 않았던 어머니는 즐기긴 했지만 즐겁지가 않았던 소녀를 질투하면서도 한편으론 안도 하지 않았을까? 나와는 다르지만 같은 소녀를 보고. 너무나 사랑하면서도 증오하는 어머니는 한편으로 소녀를 제일 잘아는 사람이었으니.
전쟁이 끝나고 몇 해가 흘렀다. 몇번의 결혼과 몇번의 이혼에서 아이들을 낳고 몇 권의 책을 펴냈을 즈음이었다. 그가 부인과 함께 파리에 왔다.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요. 그녀는 목소리에 이미 그인 줄 알았다. 그는 말했다. "그냥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었소." 그녀가 말했다. "나예요. 안녕하세요." 그는 겁을 먹고 있었다. 예전 처럼 두려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떨리는 음성 속에서, 갑자기, 그녀는 잊고 있던 중국 억양을 기억해 냈다. 그는 그녀가 책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이공에서 다시 만난 어머니를 통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오빠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생각하며 슬퍼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했다. 그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 -136p~137p-
아마도 남자는 살아가는 모든 시간 동안 소녀를 생각하지는 않을것이다. 자신의 옆에는 아내가 있고, 자식도 있을테니. 일이 바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이 없을 것이고, 잠깐의 시간에는 지인들을 만나기도 하고, 자식과 놀아주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낼것이다. 그러다가 집에서 직장까지 이동하는 차안에서, 식사를 끝내고 담배를 태우는 시간, 잠자리에 누워 잠들기전 잠깐의 시간, 언뜻 언뜻 그녀가 생각날 것이다. 방심한 그를 괴롭힐 것이다. 길을 지나다가 마추치는 열다섯살 반 정도의 가녀리고, 창백한 소녀를 보면 정말 말문이 막힐지도 모르겠다. 그가 기억하는 그녀는 딱 그 나이의 소녀일테니까. 죽어가는 그의 머릿속에서도 그가 사랑했다는 그녀는 열다섯살 반 소녀일것이다. 일생동안 사랑했던 그녀는 말이다. 그러니까 뒤라스는 말이다.
덧붙임.
뒤라스의 글은 참 잘 읽힌다. 문장이 간결해서 담백하다. 바로 전에 읽기 시작해 아직 진도가 안나가는 마의 산에 비하면.... 마의산은 머릿말부터 나를 힘들게 한다. 난 아무래도 병이 있나봐. 한번 읽어서는 페이지가 안 넘어가서 몇번을 읽는데. 그럼에도 이해가 안간다. 한숨만 나와..
뒤라스는 마지막 순간에 40년 연하의 애인 품에서 눈을 감았다고 한다. 몇번의 결혼과 몇번의 이혼을 거쳤고, 자신을 평생 사랑하는 남자도 있고, 마지막엔 무려 40년 연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