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무얼 부르지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4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파란색 얼음 같은 표지. 책을 읽기도 전에 서늘할 것만 같았는데, 그 느낌이 맞았다. 서늘하다. 스릴러의 서늘함과는 다른 서늘함. 혼자 남겨진 자의 서늘함이었다. 


 책은 총 7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독특하게도 연작처럼 느껴지는 단편이 각각 두 편씩 총 네 편이고 새로운 이야기가 세  편이다. 일곱 편 모두 독창적인 매력이 가득해 마치 각기 다른 작가가 쓴 글처럼 느껴진다. 형식도 그렇다. 작가마다 고유의 문체가 있지만 그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그러나 박솔뫼 작가의 문체는 때론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야기를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있어서 문체가 하나의 장치화 되기 때문이다. 독특한 경험이다. 독자가 느끼는 낯설음 마저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장치다.


 책을 펴면 바로 만날 수 있는 첫 번째 단편 ‘차가운 혀’는 마치 공중파에서 쉽게 보기 힘든 단막극 같다. 보는 이로 하여금 편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공중파 드라마들 사이에서 단막극은 친절하지 않은 상황과 독특한 인물들이 등장해 낯설게 느껴지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묵직하게 감정을 건드는 점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화자는 술집 주방에서 일하는 남성이다. 그에게 행위는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듯하다. 그는 우울하며 우울은 염세주의가 되어 그를 감싼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는 사람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설명해야한다면 ‘차가운 혀’와 같을까.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는 사람도 결국엔 사람임을.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은 이미 무엇을 느끼고 있다는 반증임을 말이다. 종국에 가서 그는 그저 인정받고 싶었고 사랑받고 싶었던 인간이었음을 느낀다. 그때부터 연민이 시작된다.


 다른 단편들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대부분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 놓인 불안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다. 아니, 불안하고 외롭기 때문에 스스로를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 놓이도록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가둔 사람들. 어쩌면 당신의 인생에서 모르고 지나쳐도 상관 없을 사람들. 박솔뫼 작가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는다. 마치 자신이 그 사람인 것처럼. 그래서 책을 읽고 있자면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박솔뫼 작가의 글을 빌어 내 앞에 드러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나는 그 글을 읽으며 그 사람이 된다. 그 경험은 작가는 그 사람들과 나를 이어주는 무당 혹은 메신져 같다고 생각되어질정도로 생생하다. 역지사지. 아무리 이상한 사람이라도, 나와는 상관 없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이해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나의 연민은 그곳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있던 연민은 불안하고 외로운 나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지면서 나의 깊숙한 감정을 건드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피투성이 연인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0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피투성이연인 #정미경

문예창작과를 다녀본 건 아니지만 무언가를 묘사할 때 독창적인 문장으로 써야 한다고 수업에서 가르치는 게 아닐까 싶은 문장을 읽을 때가 있다. 전문가들은 그런 문장들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는지 모르겠지만 독자 입장에선 오글거릴 때가 있다. 묘사하기 위해 가져온 은유들이 오히려 삶에서 멀리 떨어진 것들일 땐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묘사의 아름다움, 묘사의 힘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게 아닌가 싶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읽는 초반부만 해도 그랬다. 오글거리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낯선 표현들로 묘사된 문장들을 종종 만났다. 이런 문장들은 최근 출판된 젊은 작가들의 소설, 간결하고 단호한 문장들을 주로 읽는 나에게 익숙하진 않았다. 그런데도 인상 깊은 문장에 붙이는 플래그는 매 편 여러 개가 붙었다. 낯선 묘사들은 오래도록 문장에 머물게 만들었고 결국에는 마음으로까지 전이 된 것 같았다.

문득 소설이란 건 이런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이 무엇이다 정의 할 수 있을만큼 이력도 내공도 없지만 적어도 소설은 허구적인 세계를 구축한 산문 형태의 글이라는 건 알고 있다. 허구적인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 그리고 직접 체험 하지도 느끼지도 못한 세계에 타인을 초대한다는 것. 그것이 소설의 기본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나의 피투성이 연인>에 수록된 6편의 단편 모두 소설의 기본을 너무나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그의 문장에서 대리석 아케이드를 걷는 구두 소리가 들렸고 곰팡이가 축축하게 내려 앉은 퀴퀴함을 느꼈으며 마당 흙바닥에 튀긴 비 냄새를 맡았다. 묘사의 힘을 느꼈다. 툭툭 짧게 내뱉고 내면 묘사에 중점을 둔 요즘 소설을 읽는 매력과 또 다른 매력이었다. 작가가 희곡으로 등단 했던데, 소설 속 배경과 인물이 눈 앞에 펼쳐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것 역시 묘사의 힘이었을까.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소설 속 인물들이 자꾸 생각난다. 다정했던 죽은 남편에게 숨겨진 비밀을 알게된 사람,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자신을 망치는 사람, 행복할 수 없었던 그래서 비소로 사람들을 서서히 죽이는 사람,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었던 일과 할 수 있는 일들 사이에서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사람, 과거가 붙잡고 끝내 놓질 않았던 사람 그리고 서로의 삶에 젖어들었던 시간들을 가슴 깊게 남긴 사람까지. 타인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 사랑하게 된다던데. 그들을 사랑하게 됐다. 이런 경험이 실로 오랜만이다. 아무래도 정미경 작가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 온몸을 내딛게 된 것 같다.

인물과 상황 그리고 그것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오감으로 느끼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구축된 세계와 인물에는 비범한 매력이 있다. 작가의 새로운 작품을 더 볼 수 없어서 너무 안타깝다. 남겨 놓은 문장들을 마음 깊이 느끼는 것으로 애도 하려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틀랜드 -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뼈 빠지게 일하고 쫄딱 망하는 삶에 관하여
세라 스마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골에서 태어난 가난한 여성의 서사를 대상화 하거나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하지 않고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줄 수 있는 글이 얼마나 될까. <하틀랜드>는 미시적 접근을 통해 직시한 현상을 거시적 관점을 통해 구조적 문제로 설명해 내는데, 개인의 경험을 보여주어 주체성을 찾고 동시대의 사회구조를 들여다 봄으로서 사회의 책임을 읽어냈다. <하틀랜드>가 이러한 강점을 지닐 수 있었던 건, 이 책의 저자 세라 스마시 본인이 ‘시골에서 태어난 가난한 여성’ 서사의 주인공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라 스마시는 안정적인 교수라는 직업을 가졌고 겉보기에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집에 살고 있는 ‘성공한’ 여성이다. 물론 그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골 출신의 가난한 여성. 그는 자신에게 붙은 텍을 떼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틀랜드>는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자신의 성공담을 늘어 놓은 책은 아니다. 이 책은 세라 스마시가 자신의 가족 연대기를 통해 미국 농촌 사회의 빈곤과 차별을 짚어 낸 자전적인 글이다. 그는 10대 때 자신을 낳았던 엄마와 그 엄마를 10대 때 낳았던 엄마의 엄마의 삶, 더 깊게는 아이를 책임지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지만 빈곤을 벗어날 수 없었던 그녀들의 삶을 ‘나’의 시선과 구조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거시적 시선을 오가며 자신이 이 자리에 존재하기까지의 궤적을 추적한다.


 <하틀랜드>가 지닌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이 책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니 태어날 수 없는 ‘가난한’ 세라 스마시에게서 태어났을 수 있었던 아이, 오거스트에게 쓰는 글이라는 점이다. 세라 스마시 주변의 많은 여성들은 10대 때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책임지기 위해 폭력적인 남편을 견뎌내거나 빈곤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그런 상황들을 보고 자란 세라 스마시는 스스로를 돌보기 위해 자신의 영혼 속에서 ‘태어날 수도 있었던 아이’ 오거스트를 탄생시킨다. 되물림 되어 내려오는 가난의 사슬을 끊어 내기 위해 오거스트는 절대 태어나서는 안되는 아이었다. 세라 스마시는 오거스트에게 왜 태어나면 안되는지, 이 사회가 시골 출신의 가난한 여성에게 얼마나 가혹한지, 이런 상황에서 태어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야기 한다. 마치 최후의 아이를 지켜내겠다는 마음으로 전쟁에 뛰어든 전사 같다. 누군들 전사가 되고 싶었겠으며, 사랑하는 아이를 만나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토록 태어나지 않길 바라던, 사랑하는 자신의 아이에게 글을 쓴 세라 스마시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가진 것 없는 시골 출신 여성이 견뎌야할 무게가 나에게도 무겁게 내려 앉는다.


 나 또한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우리 집안 어느 여성들보다 높은 학력을 가졌다(물론 높은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는 아직 갖지 못했지만). 하지만 나는 안다. 나의 엄마가 나보다 더 똑똑하다는 것을. 나는 운이 좋았다. 엄마에게서 똑똑한 머리를 물려 받았고 그가 부단히 자신을 몰아붙여 일을 해 나를 먹여 살렸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엄마는 책도 많이 읽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흠이라면 시골에 태어나 자랐으며... 가난했다. 그 흠이 너무 컸다. 그렇게 똑똑했던 엄마는 대학은 커녕 여상(여자상업고)도 장학금을 받아 간신히 입학해야 했다. 입학해서도 교복 값이 없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던, 일을 하지만 벌이가 그리 좋지 못했던 큰 오빠(나에게는 외삼촌)에게 딱 1학기만 다니고 그만둘테니 교복 한 번만 맞춰달라고 애원해 겨우 교복을 얻었다. 말 그대로 꾸역꾸역 결국 졸업장까지 받았다. 그럼 뭐하나. 엄마는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지만 돈 버는 일들을 해야 했다. 그러다 스물 네살 나이에 남자를 잘못 만나 나를 낳았고 그 남자를 떠나기 전까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세라 스마시의 엄마, 지니의 인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엄마는 나 안 사랑해.” 나이 서른이 넘은 다 큰 딸이 맥락 없이 툭 던진 말에 엄마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엄마가 너를 왜 안 사랑해”라며 반발하는 듯한 대답을 했지만, 그게 다였다.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세라 스마시와 그의 엄마 지니의 관계처럼 우리도 그리 살갑지 않았다. 깊은 골이 생길만큼의 갈등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태초부터 살갑지 않았다고 느껴진다. 나는 그 점에 대해 나도 모르는 깊은 결핍을 갖고 있었다. 언제인지 모를 때 맡았던 엄마의 손 냄새를 기억하고 어렸을 적 나를 데리고 길을 건너기 위해 내 손을 잡았던 그 온기를 기억한다. 기억하고, 그리워 하지만 손을 잡는 일은 우리 사이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엄마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버거움이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엄마에게 더 다가갈수도, 사랑을 요구할 수도 없었다. 지금은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고, 그 시절의 엄마는 너무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자신조차 돌볼 힘이 없었다고. 엄마는 똑똑했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으며 능력도 충분했다. 하지만 시골 출신의 가난한 여성, 그것도 아이가 있는 여성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엄마의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얼마 있지도 않은 엄마의 기회를 빼앗고 태어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결핍과는 별개로 엄마에게 구조적으로 가해지는 불평등을 선명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고 이해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시골 출신의 가난한 여성’이라는 꼬리표는 엄마와 나 사이에 잔혹한 간극을 남겼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우리의 잘못이 아님을 안다.


 가난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은 여성들의 삶을 때로는 슬프고 안타깝게, 때로는 웃음이 빵 터지도록 재미나게 읽게된다. 그렇게 한 가족의 연대기를 함께 살면서 가난한 삶이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선명하게 새긴다. 시골에서 태어난 가난한 여성들의 삶을 이토록 면밀하고 탁월하게 드러내는 글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것도 가난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개인의 서사들을 촘촘하게 엮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구조의 산물을 드러낸 세라 스마시의 묵직한 한 방에 세상이 아주 조금은 반응해주길 바라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이팅 클럽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2
강영숙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은 뭘까. 글쓰기는 뭘까. 뭔데 그것 좀 한다 싶으면 콧대가 그렇게 높아지는 걸까.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대단한 일이 된 것일까. 학창 시절 책 좀 읽고 노트에 글 좀 적어본 사람, 여기에 글 잘 쓴다고 선생님께 칭찬까지 받아봤다면 알만한 낯부끄러운 자만심. <라이팅 클럽> 첫 페이지를 열면 만날 수 있는 열일곱 소녀 영인이 그렇다. 독서, 글쓰기 모두를 좋아하고 즐겨야하는 영인. 웬만한 이들은 나를 이해할 수 없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자기만의 세계를 견고히 쌓은 자신을 멋있다고 생각한다. 남들은 한 줄도 쓰기 어렵다는 글을, 영인은 매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담은 편지를 써 바쳤다. 남들 눈에 어떻게 비춰질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영인을 보고 있자면 어이 없는 웃음이 픽- 하고 나온다. 때로는 그의 행동에 내가 다 민망하다. 세상 혼자 사는 것 같다. 그렇지만 싫어할 수가 없다. 나는 영인이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으니까. 영인은 인정 받고 싶었고 사랑 받고 싶었을 거다. 그런데 너무 두려워서 책이라는 세계로 도망쳤을 거다. 너무 외로워서 글을 썼을 거다. 내가 그랬으니까. 자만심은 내가 세운 성의 성벽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나는 아직도 그 마음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싶은 적이 있었다. 언제적이었더라. 직업에 대한 개념이 없을 때였던 것 같으니 그리 거창한 건 아니었다. 그냥...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마음 정도가 아니었을까. 좀 더 들여다 보자면, 그냥 글쓰는 게 제일 좋았던 것 같다. 외로움을 달래주기도 했지만 상상했던 걸 마음대로 적을 수 있었던 것도 좋았고 적기 위해 무언가를 상상해야했던 시간도 좋았다. 쓴 글로 인정 받을 땐 기분이 좋았지만 반응이 좋지 않아도 쓰는 건 포기하지 않았다. 못쓴 글은.. 그냥 안보여주면 되니까. 보여주지 않아도 글은 쓸 수 있으니까. 생각과 감정들은 문장으로 떠올랐다. 나에게 글쓰기는 그 문장들을 옮겨적는 일이었다. 그만큼 글쓰기는 나에게 거창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보니 그렇다고 믿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라이팅 클럽>을 읽으면서 작가가 될만큼 잘쓰진 못하면서도 계속 쓰는 영인을 보며 안타까웠고 작가라 불리지만 주류로 인정 받지 못하는 영인의 엄마인 김작가를 보면서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이건 무슨 감정이었을까. 돌아보니 그건 성공한 주류만 인정하는 우스운 자만심 그리고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열등감과 두려움이었다. 거창한 게 아니라고, 그냥 쓰는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자만심은 여전히 단단한 성벽으로 나를 감싸고 있었던 거다. 영인에게서 나를 봤다. 그래서 영인이 안타깝다 느껴지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비참해지는 기분이 들었던 거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영인은 나와 달랐다. 영인은 어느 순간부터 어떤 상황이 닥쳐도 글쓰기를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자만과 열등감 그리고 두려움을 내려 놓고 쓰기 시작했다. 그만큼 ‘쓴다는 것’에 집중했다. 그런 영인의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생각했다. 나에게 글쓰기란 무엇일까. 나도 영인이 처럼 단단한 성벽을 나와 진짜 나를 위한 글쓰기를 하고 싶어졌다. 다짐하듯 마음을 고쳐 먹어 본다. 꼭 인정 받아야만 글을 쓸 수 있나.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해도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부르면 된다. 나에게 글쓰기는 그런 것이다! 라고.


 <라이팅 클럽>이라는 책 한 권은 영인의 글쓰기 인생이다. 그의 인생을 읽으며 글쓰기란 무엇인지, 쓰는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때로는 나의 지적 허영을 채워주기도, 때로는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말을 들어주기도 하는 글쓰기. 쓰기 위해 사는 삶도 있겠지만, 살기 위해 쓰는 삶도 있다. <라이팅 클럽>은 그런 삶들을 보여주며 글쓰기가 가진 의미는 사는 삶마다 다를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만의 글쓰기 의미를 갖는 사람들, 그런 이들이 여기 라이팅 클럽에 모여있다. 나를 포함하여 이 책을 읽은 독자 대부분이 라이팅 클럽에 가입하고 싶다고 감상을 남기는데, 결국 이 책을 통해 자신만의 글쓰기 의미를 찾은 게 아닐까. 내게 비참한 기분을 안겨주었던 <라이팅 클럽>, 그 기분의 이유를 찬찬히 들여다 볼수 있도록 기다려준 <라이팅 클럽>, 그 기분에서 빠져 나오니 내 어깨를 감싸 안아주며 괜찮다고 토닥여준다. 내가 아무리 자만심이 가득해도 이길 재간이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쓰나 보다. 이러다 또 자만심이 가득해져 절망에 빠지게 될 때마다, 글쓰기의 의미를 잊을 때마다 꺼내 읽어야겠다. 그런 의미로 <라이팅 클럽>에 평생 회원으로 가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 SNS부터 에세이까지 재미있고 공감 가는 글쓰기
이다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부터잘쓰는사람은없습니다 #이다혜

-

이 책은 ‘조식: 아침을 먹다가 생각한 것들’과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등의 책을 쓴 이다혜 작가(이자 기자)의 2018년 책으로 작가의 글쓰기가 담겨져 있다.  나를 포함 많은 사람들은 작가의 글쓰기론이라던지 글쓰기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라 생각할 것이다. 책 프롤로그에도 이 책은 '이십여 년간 경험한 글쓰기 시행착오의 기록이자 어렵게 발견한 방법론'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나는 작가의 에세이에 가깝다고 느꼈다. 작가의 인생책들을 알 수 있는 독서 에세이정도?


중후반부까지도 그렇다. 글의 호흡도 짧다. 주제가 나눠져 있는데 주제와 본문 내용이 연상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주제에 대한 얘기는 아직 시작도 안한 것 같은데 글이 끝나있기도 하다. 혹시 이 글도 마감에 쫒겨 급히 마무리한 글들인가 싶다가도 요즘 에세이식 글쓰기 스타일을 내가 몰라서 그런건가 싶기도 했다. 아님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라는 책 제목처럼 글을 쓰고 싶지만 용기가 없거나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게끔 만드는게 목표인 책이었던걸까. 개인적으론 재밌는 글은 맞으나 글쓰기론이나 방법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다만, 후반부에 가면 오랜시간 편집 기자로 일해온 내공이 발휘된다. 독자와 편집자에게 이 글이 어떻게 읽히는지 다양한 예시를 통해 지적해준다. 읽히고 싶은 글을 쓰고 싶다면 유익한 내용이다. 무튼 글쓰기 부분이 담긴 내용은 이정도이지만 재밌어보이는 책들을 가득 소개받아 일정정도의 수확이 있었다. 독서가 글쓰기 능력으로 이어진다고 확답 할 순 없지만, 역시 글쓰는 사람들은 책을 가까이 하는 듯 하다.


사실 위 내용들보단 요즘 시대 글쓰기, 특히 SNS를 통한 글쓰기와 출판에 대한 분석이 매우 흥미롭다. 작가는 '모든 사람이 작가인 시대'라며 '작가가 책을 쓰는 게 아니라 책을 써서 작가라고 불린다'고 말한다. 나도 매우 공감하는 대목이었는데 실제로 북스타그램을 처음 시작했을 때 스스로를 '작가'라 소개하는 계정이 꽤 됐던 점, 시라고 하기엔 문학성이 떨어지고 사적 에세이라고 하기엔 글자수와 내용이 매우 적은 책들도 쉽게 출판되고 많이 읽히고 있다는 점에 충격적이었다. 독서를 너무 오래 쉬다가 돌아와서 그런건지, 인터넷 시대가 만들어낸 새로운 문화인건지. 사실 아직도 받아들이긴 쉽지 않다. 책뿐만이겠는가. 인터넷 때문에 쉽지 않으면 그 어느 것도 팔리지 않는 시대이긴 하다. 개인적인 바람으론 이런 단상을 좀 더 면밀히 적어주었으면.... 하지만 아마 책이 덜 팔렸겠지. 흑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