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글쓰기 - 당신의 노동을 쓰는 나의 노동에 관하여
희정 지음 / 오월의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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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노동을 기록하는 글쓰기 <두 번째 글쓰기>


<두 번째 글쓰기>의 저자 희정님은 기록노동자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기록이라면 거시적인 역사, 박물관 이런 것들만 떠올리는 수준이어서 기록노동자를 문자 그대로 기록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해왔다. 좀 더 생각했더라면 사회과학방법론에서 쓰이는 구술생애사나 면접조사와 같은 형태정도로 이해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만큼 무지했다. 그나마 기록의 중요성은 공감하고 있었다. 기록을 통해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 사건과 사건,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고 그 연결을 통해 이해의 가능성이 생겨난다고 여겼다. 기록의 의의. 딱 그정도만 생각했던 것 같다. 하나의 현장 그리고 그곳에 함께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 읽는 이를 위한 텍스트 구조로 재구성하고 다듬는 것이 기록이었음을, 덧붙여 읽는 이가 미처 다다르지 못할까 우려되어 함께 생각해봐야할 지점도 꼼꼼히 챙기는 것이 기록노동자가 하는 일이었음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이 책은 다양한 현장의 이야기들을 기록하는 작업을 해오면서 생겨난 이야기 조각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어떤 조각은 출간된 책에 미처 다 담지 못한 내용이 담겨 있고 어떤 조각은 기록을 대하는 희정님의 규범(?) 또는 다짐(?)과 같은 마음이, 어떤 조각은 기록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에피소드와 그에 대한 고민 지점이 담겨있다. 그렇다고해서 단순히 비하인드와 같은 책은 아니다. 내 멋대로 이해해보자면 이 글은 기록노동자의 노동을 담은, 기록에 대한 기록이 아닐까 생각한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오늘 내가 먹은 밥 한끼에 담긴 노동을 깨닫기 어렵다. 기록노동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당신의 노동을 쓰는 나의 노동에 관하여’라는 부제처럼 수많은 현장 기록에 담겨 있던, 알지 못했던 기록노동을 기록한 이야기이다. 그동안 희정님이 써오신 다른 기록과 차이가 있다면, 기록되는 사람과 기록하는 사람이 동일하다보니 기록되는 사람의 생각과 경험을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본다.


덕분에 기록되는 사람에게는 조금 가혹할 수 있지만 기록하는 과정의 괴로움이나 ‘망친 인터뷰’와 같은 내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데, 그 괴로움과 망침 속에서 생겨난 깨달음이 참 값지다. 예를 들자면 한국으로 이주한 이주민과의 ‘망친 인터뷰’를 끝낸 후 희정님은 ‘‘지금 이 상태로’ 그와 나는 우리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꼭 우리가 되어야 하는지를 묻고, 그가 원하는 것이 정말 우리인지를 묻고, 그리고 우리가 우리일 수 없는(사람이 사람일 수 없는, 삶이 삶일 수 없는)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64p)’것이 필요했음을 깨닫는데, 이러한 깨달음은 ‘타인을 ‘대상화하지 말자’라는 말은 너무도 옳은 나머지 쉽게 입에서 나오곤 했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몰랐(61p)’고, ‘내가 모르는 저들을 ‘어떤 이들’이라고 규정하고 싶었던 나의 욕망을 본 것이다(63p)’라는 성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희정님의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드는 생각이지만 희정님의 아픈 성찰과 통찰력 깊은 깨달음을 이렇게 편히 앉아 얻어가도 되나 싶다. 물론 내 것으로 온전히 소화해야 얻는 것이고 그럴 수 있을지는 미정이지만. 무튼 이러한 값진 깨달음은 기록되는 사람의 용기와 기록하는 사람의 능력 덕분이라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을 해낸 희정님께 경의를 표한다.


기록노동을 가까이 들여다보니 쉽지 않은 과정이다. 기록하는 이는 ‘만나는 이’가 되어야 하고 ‘듣는 이’가 되어야 하며, 마지막에는 ‘쓰는 이’까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매력이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그와 나눈 이야기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어떤 사건을 중심으로 들여다보기도 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들여다보기도 한다. 때로는 기록하는 ‘나’까지 소환하여 그를 본다. 어떻게 애정이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설령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더라도 버리지 못할 마음이다. <두 번째 글쓰기>를 통해 만난 기록노동은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줄 여유조차 없는 바쁜 삶 속에서 누군가를 존재 그 자체로 온전히 바라보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마음을 내어주는 일이었다. 그만큼 쉽지 않은 과정이겠지만, 또 그 만큼 나의 세계가 넓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서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 같다. 얼마나 매력이 있게 다가왔는지, 글쓰는 일을 좋아하지 않음에도 누군가를 기록하는 일은 한 번 해보고 싶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가 된다면 <두 번째 글쓰기>를 교재삼아 작업해보리라. 그리고 나서 나의 ‘두 번째 글쓰기’도 해보리라. 문제는…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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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 이주여성의 귀환 이후, 한국 사회가 답하지 못한 것들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48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엮음 / 오월의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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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한국에서 이주여성으로 살다가 본국으로 귀환한 여성들의 이야기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이주여성에 대한 각종 차별과 권리 침해만으로도 충분히 아득한 문제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들이 귀환 이후 겪는 어려움에 대해선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동안 이주여성 문제를 남들 만큼만, 보여주는 만큼만 관심가져왔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런 나에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이주여성의 삶의 단면이 아닌 삶 자체를 들여다보게 하는 책이었다. 덕분에 ‘이주’의 문제를, ‘여성’의 문제를 좀 더 넓은 관점에서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조사팀이 필리핀, 몽골, 태국 현지에서 귀환여성들을 만나 이주 이전의 삶과 한국에서의 이주생활, 귀환 이후의 삶을 듣고 기록한 책이다. 각기 다른 조건에서 한국으로 이주했던 여성들은 만연한 이주민에 대한 차별과 가부장적이고도 성차별적인 문화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 어려움은 귀환 이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 어려움을 예상하지 못했다기보단, 귀환 이후의 삶을 알지 못했다는 말이 더 맞겠다. 조사팀의 노고 덕분에 가려져 있던 목소리를 만날 수 있었다.


이주 이전과 이주, 귀환 이후 삶 전체를 이어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주민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이주여성’이라는 특정한 범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주여성은 한국으로 이주한 여성이면서도 여성으로서 한국으로 이주한 이주민이다. 그들이 겪는 문제는 단순히 ‘이주여성’이라서 그들만 겪는 문제가 아니라 이주한 이주민으로 겪는 문제와 여성으로서 겪는 문제가 중첩되어 나타난다. 복합적인 정체성과 그로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이해하지 않고 이주여성 문제를 들여다본다면, 그들의 문제는 특정되고 대상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귀환한 여성들은 한국 국적의 남편의 동의를 얻지 못해 이혼하지 못한 상태로 살아가야 했다. 한국이주여성인권단체에서 지원하고 있으나 공식적인 지원절차가 있다기보단 단체 활동가의 역량으로 해결되고 있었다. 아이를 출산한 경우 양육비를 요구하기까지 복잡한 절차와 비용이 들었다. 설령 그 과정을 모두 통과했더라도 남성이 모른 채 하면 그만이었다. 인터뷰를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그들이 처해있는 문제에 대해 정부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조금만 귀를 기울이기만 했어도 여성들이 귀환이후에 제도적인 어려움에 처하진 않았을 것이란 점이다. 그들은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처해있는 어려움에 대해선 모른 채 했기 때문에 정부가 조금만 들여다보기만해도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임에도 온전히 개인이 책임지며 살아가야 했다.


여전히 귀환이주여성들은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단순히 시혜적인 입장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말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되었던 이주민이자 여성인 이들의 목소리와 그들이 처해 있는 문제를 드러내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사자의 목소리를 담은 책들을 읽을 때마다, 그들을 통해 나의 세계가 넓어짐을 느낀다. 나 혼자서는 만날수 없었던 그와 나를 이어준 저자이자 인터뷰어가 참 고맙다. 이번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그 힘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나 또한 그 힘의 영향력을 전하고 싶단 마음이 들었다. 간단해보이지만, 섬세하고 엄청난 에너지를 요하는 작업인 인터뷰. 언젠간 그 작업을 해보고 싶다. 단면으로만 남아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길고 깊게 이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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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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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최은영 작가님의 신작. 디데이 걸어놓고 기다리는 게 너무 힘들 것 같아서 티저북을 먼저 받아 읽어보았다. 오랜만이라 낯설다가도 이내 잔잔하고도 깊은 울림에 빠져들었다.

 

희령이라는 작은 도시에 새로 터전을 잡은 지연. 그곳에서 어렸을 적 이후로 만난 적이 없었던 할머니를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데, 그와 일방적인 혈연으로 엮인 사이가 아닌 서서히 다가가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의 삶을 알아가고 이해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특히 할머니의 어머니인 증조모와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국의 이주 역사와 함께하고 있어서 실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느껴져 슬픔이 오래 남았다.

 

그렇게 티저북은 오래 남은 슬픔으로 끝났다. 다행히 티저북을 다 읽을 때쯤 정식 출간 도서가 도착했다. 최은영 작가님은 분명 작가님만의 방식으로 반성과 위로, 후회와 희망을 그리시겠지. 오래 남은 슬픔의 다음을 얼른 읽어 보고 싶다.

 

힘든 시간을 잘 견뎌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 덕분에 저 또한 힘든 시간을 잘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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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사라졌다 - 폐업·해고에 맞선 여성노동
싸우는여자들기록팀 또록 지음 / 파시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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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가 사라졌다> 책을 받았다. 폐업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어느 새 예쁜 표지를 달고 세상에 나왔다. 폐업이라니. 석사학위 논문을 쓰던 때가 생각났다. 소규모 사업장에서의 노조 경험을 연구했는데, 노동자들이 아무리 단합하고 잘 싸워도 사업주가 회사 문을 닫아버리면 답이 없었다. 물론 몇몇 노동자들은 계속 싸웠지만 회사로 돌아가지 못했다. 돌아갈 회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답이 없는 건 논문을 쓰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업장 폐업 사례를 연구의 한계로 남겨두고 논문을 끝낸 게 아직도 마음에 숙제처럼 남아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나 조차 사업장 폐업은 노동자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라 생각했던 것이다. 정부의 제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마저도 사업주가 피해버리면 그만이지 않나, 하는 패배주의적인 마음도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받아 들었을 때 용기 없던 지난 날의 나를 떠올리며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회사가 사라졌다>는 길이 없다고 멈춰선 내 앞에 나타난, 없는 길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싸우는 여자들’의 이야기라 느껴졌기 때문이다.


 <회사가 사라졌다>는 림보, 시야, 하은, 희정으로 이루어진 ‘싸우는여자들기록팀 또록’에서 사라진 회사를 상대로 싸웠던 성진씨에스(자동차 시트 제조), 신영프레시젼(핸드폰 부품 조립), 레이테크코리아(문구용 스티커 제조) 노동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노동자들에게 폐업이 어떤 의미인지,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여성 노동은 어떤 대우를 받아왔는지, 폐업은 어떻게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짚어낸다. 폐업. 보통은 경영상의 이유로 회사가 문을 닫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회사의 입장에서 안타까운 마음을 느끼게 된다. 뉴스에서도 드라마에서도 회사가 폐업해 어려워진 노동자의 삶을 비추기 보다는 회사를 폐업할 수밖에 없는 사업주의 안타까운 사연을 보여준다. 사업주에 대한 동정을 불러일으키다보니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위로가 전부다. 그래서 또록은 묻는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폐업을 사업자 개인의 흥망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말한다. 그 회사는 사장 혼자 키운 것이 아니라고. 우리 회사였다고. 가진 것이라고는 성실한 몸뚱이밖에 없는 사람들의 억지가 아니다. 사장 홀로 키운 회사가 아니라는 것은 진실이다. 정부의 각종 지원금과 대출 없이 유지되는 기업은 거의 없다.(5p)”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면 회사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고용이라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며 정부와 지자체가 다양한 혜택을 주지 않았더라면 회사가 어려운 시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회사를 사업주 마음대로 운영할 수 있는 개인의 사유재산으로만 볼 수 있을까. 또록은 노동자들을 만나며 ‘어쩔 수 없다’는 말로 감추려했던 진실을 들여다본다. 당신들 노동은 천원짜리(110p)라고 폄하했던 회사는 정규직을 계약직으로 전환하려는데 노동자들이 동의하지 않자 서울에 있던 공장을 안성으로 이전시키는 방식으로 인원을 감축하는 것도 모자라 포장부를 외주화하여 없애고 포장부 노동자들을 전원 해고 했다. 그렇게 일자리를 없앴다. 10년 넘게 일한 여성 정직원이 남성 노동자들과의 임금차별을 문제제기하자 당신들은 그런 걸 요구할 수 없다는(118p)는 회사는 경영상의 이유로 명예퇴직을 시행하자 노동조합이 결성되니 하락한 매출액과 가족들로 이루어진 이사회가 진행한 청산 동의 절차를 증거로 폐업해버렸다. 그 뒤 노동자들이 농성을 풀자 3개월만에 청산 절차를 철회했다. 당신들 돈 벌어 주려고 회사를 운영하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133p)고 호통을 치던 회사는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자 물량이 없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회사를 폐업했다. 20년간 단 한 차례도 원청에서 주문이 끊긴 적이 없었던 물량이었다. 책을 읽을수록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누구를 위한 말이었는지 선명해진다.


 ‘어쩔 수 없다’는 말에는 여성 노동을 존중하지 않고 부차적인 활동으로 여기는 우리 사회의 편견도 담겨져 있었다. 해고당했다는 말에 봉사활동이나 하면서 쉬라고(125p) 말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폐업으로 해고를 당한 남성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여성 노동자, 특히 중년 여성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무게는 너무도 ‘당연하게’ 다르다. 그 무게가 비단 폐업에서만 드러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을 시켜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라는 태도는 군소리 없이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견디라고, 그러다가 회사가 어려우면 가장 먼저 내보내도 그런 줄 알라는 말과 다름 없었다. 여성의 노동뿐이겠는가. 청(소)년 노동도 마찬가지다. 용돈벌이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것만으로 감사히 여기라는 태도로 반말을 하고 최저임금도 주지 않고 언제든지 자를 수 있다는 행태도 마찬가지다. 사업주의 이런 태도를 책에서는 노동시장 가족주의라 지적한다. 가부장적인 가장이 가족 구성원 위에 군림하며 자신의 뜻대로 희생을 요구하면서도 가장이기 때문에 모든 이익을 취하는 방식이 꼭 같기 때문이다. 여러 번 강조하지만 사업장의 성장은 사업주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거나 막대한 돈을 투자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럴 수 있다면 사업주는 왜 혼자서 이윤을 독차지 하지 않고 노동자들을 고용할까. 어느 하나 사회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도 회사의 안위를 걱정하고 성장만 우선시 했던 사회에 오랜시간 살았던 탓일까, 그동안 여성의 노동을, 청(소)년의 노동을 착취하고 쉽게 버리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는 사업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왔던 게 현실이었음을 다시금 되돌아본다.


 책을 덮고나니 돌파구를 찾은 것처럼 한구석에 있던 패배주의적인 마음이 흩어졌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말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체념해왔던 것인지, 온몸으로 맞서 싸운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깨닫는다. 그러면서도 이런 나의 깨달음은 싸우는 여자들의 ‘행보와 생각을 좇았던’ 또록의 활동이 없었다면 꽤 오랜시간동안 마주하지 못했을 것임을 알기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래서 ‘이 책은 자신의 인생에 들어온 폐업이라는 사건에 온몸으로 맞선 여자들의 싸움을 응원하며, 이들이 사회에 던지는 물음을 보다 선명히 드러내기 위해 쓰였다(8p)’는 문장을 다시 한 번 소리내어 읽으며 나의 삶과 나의 활동도 그러하기를 바라본다. 이제 나도 그 길을 좇아보려한다.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아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싸우는 여자들과 또록의 빛나는 발걸음을 떠올리며 ‘어쩔 수 없는 것’을 넘어서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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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발걸음 - 풍경, 정체성, 기억 사이를 흐르는 아일랜드 여행
리베카 솔닛 지음, 김정아 옮김 / 반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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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솔닛북클럽


 이 책은 리베카 솔닛의 아일랜드 여행기로 알려져 있다. 표지에도 하늘색 바탕에 하얀 길 위로 ‘풍경, 정체성, 기억 사이를 흐르는 아일랜드 여행’이 적혀 있다. 그러나 리베카 솔닛에게 아일랜드는 단순한 여행지라기보단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일랜드계 미국인 3세대쯤 되는 이에게 어느 날 던져진 국적, ‘내가 잘 모르는 내 나라’다. 내가 잘 모르는 내 나라. 익숙했다면 모든 것이 당연했을 장소, 낯설었다면 모든 것이 이벤트였을 장소. 그러나 ‘내가 잘 모르는 내 나라’는 live와 tour 그 사이의 어딘가에 놓인 ‘공간’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하며 책장을 펼쳤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풍경은 찰나의 순간이다. 아름답기로 유명하다는 정보만으로 만나 그날의 그순간을 눈에 담고 끝이난다. 반면 <마음의 발걸음> 아일랜드의 풍경의 찰나만을 묘사하지 않는다. 리베카 솔닛은 자신의 기원을 찾듯이 자신 앞에 놓여진 풍경의 기원을 찾아 찾아 그 이면에 오래도록 깊숙이 담겨 있었던 이야기를 꺼낸다. 그곳을 딛고 살았던 이들의 겹겹이 쌓인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을 따라 걷다보면 아일랜드는 찰나 풍경에서 과거와 미래가 이어진 연속적인 공간이 된다. 그제서야 깨닫는다. 그동안 무수한 여행을 다니며 마주쳤던 장소들에 매몰된 사람의 이야기들을. 솔닛은 사람이 살았던, 살아가고 있는 그리고 살아갈 공간임을사람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의 이야기는 역사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는 여정이 분명 쉽지는 않다. 매 편마다 잘 알지 못하는 아일랜드의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등장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솔닛과 함께 걷던 길이 어느 새 1900년대의 길이 될 때도 있었다. 역사를 오가는 쉽지 않은 여정이기 때문에 표면적인 풍경만 눈으로 담는쉬운교감과는 차원이 다르게 느겨졌다. 아니, 정말 (역사적)차원이 다른 걸지도! 아일랜드 역사와 대화하며 걷는, 흔하지 않는 발걸음이 참 묘했다.


 그 중에서도 자연사박물관에서 ‘로저 케이스먼트 경이 자연사박물관을 위해 수집한 남아메리카 나비’를 보며 케이스먼트의 삶을 떠올렸던 ‘나비 수집가’장이 기억에 남는다. 노예를 끔찍하게 고문하던 실상을 기록으로 남겨 세상에 알렸지만, 동성과의 성애를 자세히 묘사한 일기로 매장당했던 케이스먼트. 그의 이야기를 통해 솔닛은 ‘남성성은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인종이나 제국이라는 요소보다 훨씬 중요했다는 것, 남성성 개념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재정의가 가능하리라는 것(117p)’을 읽어낸다. 지금과 얼마나 달라져있는지, 가늠할 수 있을 만큼의 차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더 아일랜드 나비 수집가의 비극이 마음에 남는지도 모르겠다.


 리베카 솔닛의 책에서 그랬듯 차원이 다른 여정 곳곳에는 잠언과 같은 삶의 지혜도 담겨 있다. 주옥같은 문장들이 많아 필사하는데 즐거웠다. 솔닛의 통찰력, 묘사와 은유는 놀랍다. ‘이야기 중에는 여행 이야기가 많고, 삶은 여행이 비로소 이야기가 된다. 여행은 우리에게 그토록 깊은 충족감을 주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우리가 삶을 여행에 비유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딘가로 가고 있을 때는 시간이 버려진다는 느낌보다는 시간이 채워진다는 느낌, 시간의 흐름이 공간의 리듬을 타고 있단느 느낌이 든다. 만약에 우리가 삶을 여행에 비유하지 않았다면, 예컨대 나무가 자라는 과정에 비유했다면, 길에서 운명을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157p)’ 삶을 여행이라 비유하지만 그런 비유를 했을까 생각하지 않았던 나의 짧은 사고에 솔닛은 통찰력을 더하여 폭을 넓혀주었다. 리베카 솔닛과의 두 번째 만남. 그가 하는 이야기가 조금은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것은 사유의 폭이 그만큼 겹겹이 쌓여있어 읽어내야할 부분이 두껍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평평한 아일랜드 땅에서 솔닛은 마치 마법사처럼 사람들의 이야기를 끌어 올린다. <마음의 발걸음>은 어쩌면 그 사람들의 마음으로 걷는 발걸음이 아닐까. 비록 코로나19로 인해 발이 묶였지만, 언젠가 아일랜드를 걷게 되는 날, 그 마음의 발걸음으로 내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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