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틀랜드 -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뼈 빠지게 일하고 쫄딱 망하는 삶에 관하여
세라 스마시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골에서 태어난 가난한 여성의 서사를 대상화 하거나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하지 않고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줄 수 있는 글이 얼마나 될까. <하틀랜드>는 미시적 접근을 통해 직시한 현상을 거시적 관점을 통해 구조적 문제로 설명해 내는데, 개인의 경험을 보여주어 주체성을 찾고 동시대의 사회구조를 들여다 봄으로서 사회의 책임을 읽어냈다. <하틀랜드>가 이러한 강점을 지닐 수 있었던 건, 이 책의 저자 세라 스마시 본인이 ‘시골에서 태어난 가난한 여성’ 서사의 주인공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라 스마시는 안정적인 교수라는 직업을 가졌고 겉보기에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집에 살고 있는 ‘성공한’ 여성이다. 물론 그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골 출신의 가난한 여성. 그는 자신에게 붙은 텍을 떼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틀랜드>는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자신의 성공담을 늘어 놓은 책은 아니다. 이 책은 세라 스마시가 자신의 가족 연대기를 통해 미국 농촌 사회의 빈곤과 차별을 짚어 낸 자전적인 글이다. 그는 10대 때 자신을 낳았던 엄마와 그 엄마를 10대 때 낳았던 엄마의 엄마의 삶, 더 깊게는 아이를 책임지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지만 빈곤을 벗어날 수 없었던 그녀들의 삶을 ‘나’의 시선과 구조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거시적 시선을 오가며 자신이 이 자리에 존재하기까지의 궤적을 추적한다.


 <하틀랜드>가 지닌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이 책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니 태어날 수 없는 ‘가난한’ 세라 스마시에게서 태어났을 수 있었던 아이, 오거스트에게 쓰는 글이라는 점이다. 세라 스마시 주변의 많은 여성들은 10대 때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책임지기 위해 폭력적인 남편을 견뎌내거나 빈곤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그런 상황들을 보고 자란 세라 스마시는 스스로를 돌보기 위해 자신의 영혼 속에서 ‘태어날 수도 있었던 아이’ 오거스트를 탄생시킨다. 되물림 되어 내려오는 가난의 사슬을 끊어 내기 위해 오거스트는 절대 태어나서는 안되는 아이었다. 세라 스마시는 오거스트에게 왜 태어나면 안되는지, 이 사회가 시골 출신의 가난한 여성에게 얼마나 가혹한지, 이런 상황에서 태어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야기 한다. 마치 최후의 아이를 지켜내겠다는 마음으로 전쟁에 뛰어든 전사 같다. 누군들 전사가 되고 싶었겠으며, 사랑하는 아이를 만나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토록 태어나지 않길 바라던, 사랑하는 자신의 아이에게 글을 쓴 세라 스마시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가진 것 없는 시골 출신 여성이 견뎌야할 무게가 나에게도 무겁게 내려 앉는다.


 나 또한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우리 집안 어느 여성들보다 높은 학력을 가졌다(물론 높은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는 아직 갖지 못했지만). 하지만 나는 안다. 나의 엄마가 나보다 더 똑똑하다는 것을. 나는 운이 좋았다. 엄마에게서 똑똑한 머리를 물려 받았고 그가 부단히 자신을 몰아붙여 일을 해 나를 먹여 살렸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엄마는 책도 많이 읽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흠이라면 시골에 태어나 자랐으며... 가난했다. 그 흠이 너무 컸다. 그렇게 똑똑했던 엄마는 대학은 커녕 여상(여자상업고)도 장학금을 받아 간신히 입학해야 했다. 입학해서도 교복 값이 없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던, 일을 하지만 벌이가 그리 좋지 못했던 큰 오빠(나에게는 외삼촌)에게 딱 1학기만 다니고 그만둘테니 교복 한 번만 맞춰달라고 애원해 겨우 교복을 얻었다. 말 그대로 꾸역꾸역 결국 졸업장까지 받았다. 그럼 뭐하나. 엄마는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지만 돈 버는 일들을 해야 했다. 그러다 스물 네살 나이에 남자를 잘못 만나 나를 낳았고 그 남자를 떠나기 전까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세라 스마시의 엄마, 지니의 인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엄마는 나 안 사랑해.” 나이 서른이 넘은 다 큰 딸이 맥락 없이 툭 던진 말에 엄마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엄마가 너를 왜 안 사랑해”라며 반발하는 듯한 대답을 했지만, 그게 다였다.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세라 스마시와 그의 엄마 지니의 관계처럼 우리도 그리 살갑지 않았다. 깊은 골이 생길만큼의 갈등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태초부터 살갑지 않았다고 느껴진다. 나는 그 점에 대해 나도 모르는 깊은 결핍을 갖고 있었다. 언제인지 모를 때 맡았던 엄마의 손 냄새를 기억하고 어렸을 적 나를 데리고 길을 건너기 위해 내 손을 잡았던 그 온기를 기억한다. 기억하고, 그리워 하지만 손을 잡는 일은 우리 사이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엄마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버거움이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엄마에게 더 다가갈수도, 사랑을 요구할 수도 없었다. 지금은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고, 그 시절의 엄마는 너무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자신조차 돌볼 힘이 없었다고. 엄마는 똑똑했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으며 능력도 충분했다. 하지만 시골 출신의 가난한 여성, 그것도 아이가 있는 여성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엄마의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얼마 있지도 않은 엄마의 기회를 빼앗고 태어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결핍과는 별개로 엄마에게 구조적으로 가해지는 불평등을 선명하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고 이해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시골 출신의 가난한 여성’이라는 꼬리표는 엄마와 나 사이에 잔혹한 간극을 남겼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우리의 잘못이 아님을 안다.


 가난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은 여성들의 삶을 때로는 슬프고 안타깝게, 때로는 웃음이 빵 터지도록 재미나게 읽게된다. 그렇게 한 가족의 연대기를 함께 살면서 가난한 삶이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선명하게 새긴다. 시골에서 태어난 가난한 여성들의 삶을 이토록 면밀하고 탁월하게 드러내는 글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것도 가난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개인의 서사들을 촘촘하게 엮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구조의 산물을 드러낸 세라 스마시의 묵직한 한 방에 세상이 아주 조금은 반응해주길 바라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