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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여행의이유 #김영하


어쩌다보니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과 함께 읽고 있다. 아니, 어쩌면 <방랑자들>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의 이유>가 더 눈에 들어왔던걸까. <방랑자들>은 떠나오거나 떠도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당연하게도 여행은 단골소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그 여행보다는 어디론가 ‘떠난다’는 의미에 더 집중되어 있다. 내가 아는 여행. 그것은 그저 나를 자극하는 그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 그곳에 가는 것이라 생각했지 이곳을 떠난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둔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여행’이라는 단어 옆에 ‘떠난다’라는 동사를 그렇게 붙여서 썼으면서도 그랬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여행’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고민하게 됐던 것 같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엔가 서점에서 스쳐지나가며 봤던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가 불현듯 생각났다. 작가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들에 대해 적었겠구나, 하며 지나쳤던 그 책. 다시 생각났던 이유는 김영하 작가라면 사람이 여행을 ‘떠나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파고들지 않았을까, 라는 믿음과 그 ‘떠남’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 길로 동네 책방에서 구입하여 읽기 시작했다.


책을 구입한 날, 책방에서 절반이상을 읽었다. 책 제목처럼 지나간 여행을 떠올리며 당시 여행을 하게 됐던 이유들과 여행지에서 일어난 상황들을 서술하는데 종국에는 떠나온 자, 즉 여행자가 여행을 떠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다가가고 있다. 왜 떠나는가. ‘떠남’을 통해 얻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책을 읽고 있자니, 남들 못지 않게 여행을 좋아하고 자주 떠난다고 생각했던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왜 떠났는가’. ‘난 왜 떠나려 하는가’. 그런 질문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때마다 ‘고대 건축물을 보려고’, ‘휴양하려고’, ‘그 나라에 가보고 싶어서’ 이런 대답들을 했었다. 이런 대답들이 잘못됐다는건 아니다. 다만 이곳을 떠나는 이유보다는 그곳에 가는 이유에 더 가까웠다. 그때는 이 차이조차 알지 못했지만.


<여행의 이유>를 읽고 나니 ‘나는 왜 떠났는가’ 그리고 ‘나는 왜 떠나려 하는가’라는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해야하는지 알 것 같다. 여행의 이유. 그것은 떠나는 사람의 이유. 내 여행의 이유를 찾게 만들어준 책이다.


책 내용은 그리 무겁지 않다. 여행담과 역사에서 내오는 재미난 이야기들이 잘 엮여있다. 그러면서도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밑줄긋고 싶은 문장들이 가득하다. 여행자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공감대들이 잘 녹아있다. 작가가 집필 당시 경험했던 여행담들도 적혀있어서 종종 작가의 작품 이야기도 언급된다. 작가의 여행 에세이 신작이 나올줄도 모르고 샀던 책인데 신작 설명을 보니 다른 의미에서 여행을 다룬 것 같아 두 권 다 챙겨 읽으면 좋을 것 같다.

현대 영어에서는 아직도 ‘travail’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고생, 고역 등이며 ‘in travail’이라고 하면 ‘산고로 몸 부림치다’ 같은 의미가 된다. 자기가 태어난 곳에 머물지 못하고 타향을 헤매는 것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행한 운명으로 여겼다. - P27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편안한 믿음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 이상, 여행자는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가게 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정신이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의 믿음에 집착한다면 여행은 재난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 P35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현재 안에 머물게 된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지난밤에 하지 말았어야 할 말부터 떠오르고, 밤이 되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뒤척이게 된다.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아야하고, 불안한 미래는 피하는 게 상책이니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미적거리게 된다.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는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놓는다. - P81

이 이야기는 그러므로 이렇게 읽을 수 있다. 만약 사회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것, 즉, 그림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조차 신경쓰지 않는 것들, 그러나 잃고 나면 매우 고통스러워지는 것들. 그 그림자를 소중히 여겨라. 하지만 만약 그것을 잃었다면, 그리고 회복하기 위해 영혼까지 팔아야 한다면, 남은 운명은 방랑자가 되는 것뿐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가 되면 굳이 그림자가 없어도 된다는 것이다. - P129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며, 그러므로 더 자주, 명백하게 분류되고 기호화된다. 국적, 성별, 피부색, 나이에 따른 스테레오타입이 정체성을 대체한다. 즉, 특별한 존재(somebody)가 되는 게 아니라 그저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여행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nobody)일 뿐이다. - P155

실뱅 테송의 말처럼 여행이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하러 그 먼길을 떠나겠는가.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 P179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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