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환상문학전집 14
오스카 와일드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불로불사에 대한 욕망의 근간은 두려움이다. 필멸(必滅)의 존재인 인간으로서, 빛나는 청춘의 건강한 육체가 생기를 잃고 시들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고통,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혹은 아무것도 없을지 전연 알 수 없는 죽음 이후에 대한 공포. 하기에 불로불사에 대한 욕망은 선병질이든 감수성이든 자극에 예민한 사람들에게 더 크지 않을까 싶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젊음을 간직할 수 있기를, 더 오래 살기를 바라겠지만 그것이 반드시 불로불사인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월에 따라 육체가 변하는 것을 인정하고 언젠가는 죽을 운명임을 이해한다. 그러나 때로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현실에 존재하기 않기에 예술로서 의의가 있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어쩌면 그것은 예술 작품 안에서만 가능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외모와 순수한 영혼을 가진, 20대의 문턱에서 싱그러운 향기와 매력을 발산하는 도리언 그레이. 그는 아직 순수한 시선으로 세상을 공평하게 바라본다. 그에게 불행은 바질 핼워드와 헨리 워튼을 만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까. 화가 바질은 도리언의 아름다움을 열광적으로 숭배하면서 그로부터 예술적 영감을 얻어 걸작이라고 할 만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그려내고, 탐미적 한량인 헨리는 도리언의 외모를 칭송하며 아름다움만이 유일한 가치라고 속삭인다. 맑은 영혼과 예민한 감수성을 가졌기에 오히려 바질의 열정과 헨리의 도발에 쉽게 물든 도리언은 초상화를 보는 순간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각하고, 청춘을 상실해야 하는 고통과 두려움을 인식한다. 도리언은 초상화를 바라보며 자기 대신 초상화가 늙어가기를, 그리하여 자신은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초상화 속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난 걸 알아챈 날 도리언은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졌음을 깨닫는다. 이제 아름다운 외모는 도리언 그레이의 본질이다. 그러나 한 인간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변하는 것이 어디 외모 뿐이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청춘의 싱싱함과 아름다움을 잃는 대신 내면을 가꿀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정신의 평화와 여유로움을 찾고 내면의 미를 지니게 되면 그러한 궤적은 자연스럽게 사람의 얼굴에 드러나 외모를 바꾸기도 한다. 젊음의 찬란한 빛 대신 내면의 은은한 빛이 얼굴에 드리워진다. 그러므로 40대 이후의 얼굴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도리언은 변하지 않는 육체를 자신의 본질로 택함으로써, 정신과의 연결을 초상화에 내줌으로써 아름답게 늙어갈 기회를 상실한다. 늙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난 순간부터 온전한 감정과 건전한 판단은 더 이상 그의 몫이 아니다. 도덕적 악과 외모의 추를 동급으로 여기는 극단적인 심미론에 빠진 채 자신의 악행으로 점점 추악하게 일그러지는 초상화를 보면서 가벼운 죄책감과 뜨거운 희열을 동시에 느끼는 불완전하고 불운한 사람일 뿐이다. 그의 미래에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지 않음은 자명하다.

 

오스카 와일드에게 도덕적 교훈을 주려는 목적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고 한다. 실상 아름다움과 쾌락에 관한 헨리의 억설조차 상당히 그럴 듯하게 들린다. 작가 자신이 절대 가치로서의 아름다움과 쾌락의 효용을 그대로 믿고 있는 듯하다. 그가 주장하는 예술 작품의 무용한 미(美)를 작품 전체로 옹호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자체로 하나의 역설이다. 그토록 아름다움을 찬양하면서 결국은 그것만으로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지독히 매혹적인 작품이다. 언젠가 다시 읽어야 할 텐데, 절판이라고 한다. 그때도 도서관에서 너덜너덜 다 떨어진 책을 빌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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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8-28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놓기만 하고 차마(?) 읽지 못하고 있는 소설인데 블루님 리뷰를 보니 시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그 아주 예민한 사람중의 하나인데요(심지어 병적이까지 하죠..^^;;)
어쨌든 나이가 든다는 것은 결코 내면을 가꿀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체념하게 되는게 아닐까, 혹은 끊임없이 자신과 싸워나가는 건 그런 힘든 과정이 아닐까 뭐 그런 생각도요.
그리고 늙는 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더 강할 듯 하구요
오늘 마침 필립로스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그도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대충이긴 하나,) 어쩌면 인간에겐 어떤 생리적 작용같은 게 있어 어느 나이까진 그런 생각이나 의미를 모르고 사는 거 같다고, 그러나 어느 순간이 되면 그게 적나라하게 다가온다는 뭐 그런 이야기요. 물론 내세를 믿는 사람들은 다르지만 자긴 그런 걸 믿는 사람들도 신기하단..
쿨해 보이던 많은 늙은 이(말그대로)들이 생각외로 쿨한게 아니라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도 그렇구나 하는 동병상련의 위로가 되는 게 아니라 역시 인간은, 삶이란 그렇구나 하는 쓸쓸함만을 더 확인하게 된다는 것, 그래서 사는게 더 자신이 없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게 나이들어가고 살아가는 과정이 아닐까하는 뼈아픈 자각을 자주하게 되네요..^^;;

물만두 2006-08-28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야지 하면서도 아직도 완독을 못한 책입니다. 잘 손이 안가네요 ㅡ.ㅡ

urblue 2006-08-28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초반만 넘어가시면 술술 읽힐거라 생각합니다. ^^

사야님, 님 댓글을 읽다가 '아, 그렇구나' 했습니다. 저는 내면과 외모의 연결과 상호작용같은 것만 생각했어요. 그리고 별 고민없이(회사에서 짬짬이 눈치보며 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적하신 그 부분을 썼네요. 그저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지요. 체념 혹은 자신과 싸워나가는 힘든 과정이라는 말씀을 듣고 보니, 그쪽이 더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도 그렇구요. 이렇게 얘기하니까 필립로스의 이야기에도 자연 공감하게 되는군요. 전 아직 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깨달을 만한 나이에 이르지 못한 것 같다는 것 말이죠. 절 아는 누군가의 말대로 트라우마 같은 것과 절대 친하지 않은 강철 신경 덕분인지도 모르겠구요. ^^;
사야님은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무척 궁금합니다. 그치만 차마 읽지 못하고 계신다면 재촉은 하지 않으렵니다.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저는, 좀 더 나이가 들어서 다시 읽어볼게요. 그땐 뭔가 다른 걸 잡을 수 있게 될지 조금 기대도 되는군요. 고맙습니다. ^^

urblue 2006-08-29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죠? ^^

urblue 2006-08-29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에... 제가 한 달에 리뷰 두 개나 올리면 정말 열심히 쓰고 있는 거라구욧!
근데 그 다음 말은, 음... 이해가 잘... -_-;;

sudan 2006-08-29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뭘 혼자 화내고 당황하고 그러시는 거에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누군가가 페이퍼 카테고리 이름으로 쓰는 걸 봤어요. 소설인 줄은 알았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몰랐는데, 얼블루님 리뷰 읽고 나니 이제야 무슨 의미인지 알겠네요.(후후훗. 귀여운 스노드랍..)

sudan 2006-08-29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요즘은 비공개 댓글이 카운트에 나타나지 않나보네요! 하하하.
오랫만의 리뷰 잘 읽었어요. ^^

urblue 2006-08-29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저도 거기서 처음 봤답니다. 궁금해서 읽어볼랬더니 황금가지에서 절판이라지 뭡니까. 마포도서관에 (애인이) 가입한 기념으로 너덜너덜 다 떨어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빌려 봤어요. (귀여운 스노드랍..동감.. ㅎㅎ)
비공개 댓글이 카운트에 안 나타나는 건, 글쎄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어요. 이렇게 혼자 노는 것처럼 보이다니.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