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 깼다.
선풍기를 켜고 창문을 열으니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서 좀 살 것 같은데, 다시 잠은 안 온다.
1시간 여를 뒤척이다 결국은 일어나 앉았다. 아우.

꽤 오랜만에 외근을 나갔다.
오후 네시 쯤의 지하철.
존 버거의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를 열심히 보고 있는데,
옆 자리가 비자 저쪽에서 대여섯살 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와서 앉더니 나를 보고는 "언니, 안녕?" 한다.
"응, 안녕? 혼자야? 누구랑 같이 탔어?"
"엄마랑."

꼬마의 옆자리도 비었다.
엄마라기보다는 할머니에 가까운 듯한 아주머니 한 분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 자리에 앉았다.
퉁퉁한 몸집에 붉어진 살, 흰 머리, 남루한 옷차림, 지친 표정.
아이가 계속 엄마를 부르고 뭔가 얘기하는데 상당히 귀찮아 보인다.

그런데 이 아이는 어쩐지 이상하다.
엄마와 내게 번갈아 말을 붙이는데,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을 말이 더 많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의 그림을 들여다보며 "이 사람 누구야?" "이건 뭐야?" 하길래,
"피카소야. 화가. 그림 그리는 사람" "이건 피카소가 그린 그림" 이라고 대답해 주었는데,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역마다 "여기는 어디야?"하고 묻는다.
모든 역의 이름을 다 말해줬다. ㅠ.ㅜ
그러더니 스스럼없이 내 팔에 매달려서 "언니는 어디가?" 이런다.
곧 내 우산을 들고 어깨와 뺨에 낀 채 뭔가 자랑스러운 행동을 보여주듯 나를 보며 웃는다.
"나 이거 가질래."
"그건 언니 우산인데?"
"응"

아이랑 그렇게 노느라(?) 책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 녀석은 내게 만족하지 못했는지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도 "안녕?"한다.
아우, 그 사람은 내가 데리고 탄 아이인줄 알았나, 나랑 아이를 흘낏하더니 들은 척도 안 한다.
인사 좀 받아주면 어디 덧나냐.

내릴 역이 되었다.
엄마랑 아이가 하는 말을 들으면 그쪽은 한참을 더 가야하나보다.
"언니는 여기서 내려. 잘가. 안녕."
"응, 안녕"

문 앞에 서서 아이 쪽을 바라보니 내게 손을 흔들며 웃고 있다.
나도 손을 흔들어준다.
그제서야 아이 엄마가 나를 본다.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아이랑은 잘 놀았는데, 아주머니의 말에 당황해서 대답도 못하고 그냥 어색만 미소만 지은채 내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또래 아이들과 비교해서 어딘가 이상한 듯한 아이.
아이의 얼굴과 그 엄마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내가 내린 후 그 자리에 앉은 다른 사람이 잘 놀아줬으면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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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inara 2006-07-15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아이..괜히 눈물이 날것 같아요.

paviana 2006-07-15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가방에 사탕 몇개씩 넣어다녀요.
정말 예쁜 아이(책보는 아이)나 정말 미운 아이(울고 떼쓰는 아이)를 보면 한개씩 준답니다.
그아이 담에 제가 만나면 사탕주고 싶네요.예쁜 아이일거같아요.^^

달콤한책 2006-07-15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찮다고 할 수도 있는데 아이와 잘 놀아준 님의 마음이 참 예쁘네요...그래서 아이 엄마가 고맙습니다 했을거에요....처음이네요, 안녕하세요^^

로드무비 2006-07-15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른 사람 눈에는 저 아이의 늙은 엄마처럼 보이지 않을지.
문득 그런 생각이.=3=3=3
(뭔지 여운이 남는 글이어유.^^)

sudan 2006-07-15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장도 안되는 그림책을 읽어줬더니 기절할 듯이(정말로) 좋아하던 여자아이가 생각나요. 몇 년전 봉사활동에서 만난 아인데 누가 책 읽어주는 건 생전처음이었나보더라구요. 그 곳을 떠나오면서 내내 그 아이가 마음에 걸렸는데 시간 지나 한참 잊고 있다가 이 글 읽으면서 다시 생각났어요. 아이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지만서도 그래도, 모든 아이들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마태우스 2006-07-16 0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콤한책님의 말씀에 동감! 오랜만에 뵈네요 블루님

nada 2006-07-16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다고, 좋은 하루 보내시라고, 인사할 줄 아시는 아주머닌데.. 너무 고단하셨던 걸까요? 저도 어릴 땐 주체 못할 호기심 때문에 엄마를 들들 볶곤 했다죠. 블루님, 참 어여쁘시네요.

urblue 2006-07-18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우님, 저런. 뭐 별 사람들 다 있긴 하지요. 며칠 전인가 버스에서 조그만 애가 샌들 밖에 안 신은 제 맨발을 마구 밟았는데 그 엄마 완전 모른 척 하던걸요.

꽃양배추님, 땀을 얼마나 많이 흘리시던지 옆에서 보기 좀 민망할 정도였어요. 많이 지쳐보이기도 했구요. 그래도 아이는 수건으로 엄마 땀도 닦아주고, 엄마 엄마 재잘거리고, 좋아보였습니다. ^^

마태우스님, 네, 오랜만이군요. 잘 지내시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

수단님, 음, 그런 것도 하셨군요. 훌륭하세요. 저도 아이들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모든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에는 절대 동감입니다.

urblue 2006-07-18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에이~ 무슨 말씀을. 님은 씩씩(?)해 보이실 것 같은데요. ^^;

달콤한책님, 반갑습니다. 실은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편이라 조카들과도 사이가 안 좋은데, 그 아이가 워낙 붙임성이 좋아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

파비님, 와~ 그거 좋은데요. 그치만 전 사탕을 가지고 다녀도 미운 아이는 안 줄래요. ㅎㅎ

수니나라님, 아니에요, 보시면, 아마 활발해서 귀엽다고 하실 거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