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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자자한 명성 때문에 구입했다. 본래 책에 있어서 만큼은 귀가 얇은 편이 아니라 그런 명성 따위 들은 척도 하지 않지만, 분홍 야광 반바지에 털이 삐죽한, 제멋대로 그려진 달리는 다리가 ‘안 쫓아올래?’라고 묻는 듯 하여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첫 단편 [달려라, 아비]를 읽으면서 처음 눈에 띈 건 문장이다. 이 친구는 재미있는 표현과 비유를 쓰는구나. 독특하고 신선한 문장도, 아직은 어설퍼보이는 비유도 보인다. 대체로 나쁘지는 않다. 책 소개에서 보았던 대로, 화자는 태어나기도 전에 집을 나가버린 아비에 대해 원망을 쏟아내지도, 아비 없이 자란 자신을 연민하지도 않는다. 이런 점은 확실히 기존의 여성 작가들과 구별될만하다. ‘나, 사는 게 힘들어’라고 징징거리거나,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라고, 자신이 캔디라도 되는 양 두 주먹 불끈 쥔 채 파르르 떠는 모습을 보면, 공감하기보다 ‘또냐? 지겹지도 않냐?’는 짜증 섞인 한숨이 나올 뿐이다. 확실히 이 작가는 젊긴 한가 보다.
처음 한두 작품은 신선하고 경쾌하다([달려라, 아비]와 [스카이 콩콩]이 괜찮다). 그러나 다음으로 넘어갈수록 석연하지 않은 허전함이 쌓여간다. 뭐지? 반복되는, 신선함보다 허술함과 어색함이 더 많이 보이는 표현 때문인가? 역시 반복되는, 1인칭 시점 때문인가?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허전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나쁜 건 아니지만 딱히 좋다고도 할 수 없는 아리송한 느낌만 남았다. 리뷰 쓸 생각도 안 들어서 바로 다음 책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 책을 읽으면서야 비로소 <달려라, 아비>의 허전함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소설을 쓰려거든 이렇게 써야지, 하는 생각이 들게 한 그 책은 야마모토 후미오의 <플라나리아>다.
[달려라, 아비]의 아비는 화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화자와 어미를 버리고 사라졌다. 다른 단편들에서도 부모는 부재하거나([사랑의 인사]), 있다 해도 안식처나 버팀목 같은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스카이 콩콩],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혹은 인물들이 극단적인 소통 단절 상태에 놓여 있다([나는 편의점에 간다], [종이 물고기], [노크하지 않는 집]). 김애란의 인물들은 그런 상황에 좌절하지도, 극복해보겠다고 이를 악물지도 않는다. 그저 바라보고 인정한다. <플라나리아>의 인물들도 이와 유사하다. 주어진 상황에 절망하기보다 그 안에서 오히려 자유롭게 부유하는 인물들은 독자에게도 편히 숨쉴 여유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달려라, 아비>와 <플라나리아>의 차이는 무엇일까.
<플라나리아>의 인물들은 자신만의 세계에서 부유하는 듯 보여도 현실에 닿아 있다. 그들은 살아 있다, 살아간다. 그러나 <달려라, 아비>의 인물들에게는 현실을 산다는 느낌이 없다. 온전히 작가의 머리 속에 들어 앉아 있을 따름이다. 김애란의 소설들은 트렌디 드라마를 닮아 있다. 밝고, 새롭고, 경쾌하지만, 현실성이 없다. 울고 짜고 배신과 복수가 판을 치는 멜로 드라마에 식상한 사람에게 트렌디 드라마는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두어 편 보고 나면 금세 질리고 만다. 드라마건 소설이건 현실에 기반해야 새로운 시도의 성과가 드러날 수 있다. 심각하지 않으려는 동일한 시도가 야마모토 후미오에게서는 성공적인 반면 김애란에게서는 미완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나는 그러한 차이가 경험과 깊이의 부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써 놓고 보니, 나이 어리다고 타박하는 것인지, ‘깊이에의 강요’를 하고 있는 것이지 알 수 없긴 하지만, 내 느낌은 그렇다. 김애란은 젊다. 지나치게 젊은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에게 기회로 작용할지 혹은 독이 될지는 자신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좀 더 나이들기를, 더불어 깊어지기를 강요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