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늦은 밤, 뭘 읽을까 고민하다 권여선의 데뷔작 <푸르른 틈새>를 집어 들었다. 65년생, 80년대 학번 작가의 95년 혹은 96년작. 자신의 글이 어떻게 비춰질지 짐작하는 듯, 작가의 말에서, 이 글을 운동권의 후일담 문학으로 읽어도 좋고 여성 소설(맞나? 제대로 기억이 안난다)로 읽어도 좋지만, 어느 쪽이라도 자신은 기분이 나쁘다,라고 말하고 있다.

장황한 작가의 말을 뒤로 하고 두 장(章), 50여 쪽을 읽었다. 졸린다. 며칠 잠을 적게 자서 그런 탓도 있지만, 서른살 먹은 여자가 뱉어놓는 대학 시절 이야기가 도무지 흥미로운 구석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기억한다, 내가 한국 소설들을 읽지 않게 되었던 때가 95~6년 무렵이었음을. 

그 전날, 자기 전에 잡지에 실린 권여선의 단편 하나를 읽었다. 역시 서른살 먹은 여자의, 옛 선배와 그의 부인과 애인에 관한 이야기. 따분하다. 이 여자나 <푸르른 틈새>에 등장하는 여자나 같은 느낌을 준다. 결국은 자기 얘기. <푸르른 틈새>의 표지에는 흐릿하게 작가의 사진이 실려있다. 짙게 쌍거풀진 두 눈과 얼굴에 올라와 있는 가늘고 긴 손가락, 그 손가락에 어울리는 잘 손질된 길다란 손톱.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의 이미지가 딱 그렇다. 예쁜 여자 작가, 지겹다.

97년인가 98년인가, 출판 기획 강좌를 들으러 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 강사 중 한 명, 당시 유명한 베스트셀러 몇 권의 기획자라고 했는데, 자신이 모 유명 여자 작가를 키웠다고 자랑했었다. 그러면서 요즘 여자 작가들이 다들 예쁜 이유가 뭔지 아냐, 라고 질문을 던졌다. 그의 대답은, 예쁜 작가가 많이 팔리기 때문,이었다. 글을 쓰는 솜씨야 다들 비슷비슷한데, 책을 팔려면 신문이나 방송에 인터뷰를 내보내야 하고, 당연히 사진발 조명발 잘 받는 그럴듯한 외모가 필요하다, 입심 좋으면 금상첨화다, 뭐 이런 얘기. 당시에 뜬 몇몇 작가들이 글에 관한한 남들보다 특출한 능력이나 깊이가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모든 책들은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나쁜 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그가 기획했다는 베스트셀러는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고 숱한 지적을 받고 있었다.) 하여간, 그의 강의에 무지 기분이 나빴고, 업계에 뛰어들기보다는 그저 책을 좋아하는 독자로 남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더불어, 미안하게도, 예쁜 여자 작가들은 그냥 싫어졌다.

 

어제 읽던 <푸르른 틈새>는 제자리로 돌아갔고, 오늘 아침에는 이 책을 뽑아서 들고 나왔다. 에코의 소설은 좋아하지만 원체 에세이나 칼럼 류의 글을 좋아하지 않는지라 에코의 다른 책들도 읽어본게 없다.

몇 편은 키득거리며 읽는다. 그러나 같은 식의 독설이 반복되는 건 지겹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어쩌다 한 편씩 읽게 되면, 이 사람 재미있군, 하며 가볍게 웃어줄 수 있겠지만, 이런 글들을 수십편 모아 책으로 내 놓고 읽어내라고 하는 건, 몇날 몇일 동안 식빵만 먹고 살라는 것과 똑같다. 으아아!

다른 책이 없으므로 퇴근 길에야 어쩔 수 없이 몇 편 더 읽게 되겠지만, 지하철에서 내리면서 덮는 걸로 이 책과도 이별이다.

내일부터 휴가다. 집에 갈 때 <제5도살장>과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들고 갈 생각. 읽다가 덮는 일은 없겠지, 설마.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여우 2005-08-12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들은 에코의 저 책을 재미나게 읽었다는데
전 도무지 모르겠더라구요.
다시 읽어보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지만...
설마, 이번에는 즐독하시길 기원합니다.^^

sudan 2005-08-12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얘기에 동의 내지는 공감. 게다가, 에세이류의 글은 저도 싫어해요.
마지막 두 권의 책이 문젠데.(좋아하는 작가들이라서)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표제작부터 읽어보시길.
그리고, 혹 보네것이 처음이시라면, 좋아하게 되거나 나가떨어지거나 둘 중 어느 쪽 길로 들어서게 될지 궁금하군요.
테드 창도 보네것도 둘 다 중간에 덮어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래요.

urblue 2005-08-12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단님, 보네것은 처음이에요. 이걸 사 준 후배가 먼저 읽고 주었는데, 전쟁 이야기를 싫어하지만 괜찮은 경험이었다고 말하더군요. 좋아할까 나가떨어질까, 기대. ㅎㅎ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관한 권고, 접수.

따우님, 그게, 언젠가도 얘기한 적 있는데, 몇 년 지나서 의미와 재미를 잃어버리는 작품이라면 좋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 없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만 합니다. <처녀치마>는 평이 꽤 좋은 것 같던데, 글쎄, 다시 손을 내밀 것 같진 않네요.

여우님, 여우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반갑습니다. ㅎㅎ 다른 두 권은 즐독해야지요.

히피드림~ 2005-08-12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제목이 책덮기인가 했더니...
에코의 저 에세이는 언젠가 조영남이 TV,책을 말하다에 나와서 추천한 책이었어요. 이 책은 또 얼마나 재기발랄할까 하고 기대하던 책이었는데...
평소에 에코를 우러러보며 질투(?)하던 제가 유아블루님의 이 글을 읽으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는 건 왠일일까요? ^^

로드무비 2005-08-12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르른 틈새> 십여 년 전 나는 재밌게 읽었는데.
<처녀치마>가 좀 후줄근해져서 그렇지.
테드 창의 책과 제5도살장 내 보관함에도 있는 책인데......
회심의 미소 짓고 갑니다.
왜인지는 아시죠?^^

2005-08-12 1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urblue 2005-08-12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그럼요. ^^

punk님, ㅎㅎㅎ~ (음흉하게.)
에코는, 재기발랄은 다른 사람한테 줘 버리고 소설만 열심히 쓰면 좋겠어요.

바람돌이 2005-08-12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의 바보들에게... 는 진빠 열받는 인간 있을 때 열받아서 말도 못하고 버벅거리지 말고 웃으면서 폼잡고 한 번 화내볼까 하고 보다가 도로 열받은 책이었구만요. 왜냐구요. 결국 그걸 해내려면 무지 똑똑해야 된다는 걸 깨달아서리... 나랑 상관없는 얘기더라구요. ^^ 그래도 재밌게는 읽었는데.... 뒤로 갈 수록 좀 지겨운건 맞아요.

urblue 2005-08-13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코는, 사실 과하게 똑똑하죠. ㅎㅎ 저랑도 전혀 상관없는 얘기. 퇴근길 지하철에서는 조금 더 킬킬댔더랍니다.

책속에 책 2005-08-13 0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신인생의 이야기는 근래에 읽은 최고의 소설이었어요..제게는^^
에코는 아직인데, 어쩐지 선뜻 집어들게 되지가 않네요..어려울 것 같아서;;;

urblue 2005-08-19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