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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3월
평점 :
팀장이 그랬었다. 그런 얘기라면 너무 빤하지 않은가요? 엄마가 집 나가고 아이들은 불쌍하고…… 너무 상투적이에요. 상투적인 그런 얘기 새삼스레 할 필요 있나요? 그런 건 피디수첩에서도 안 다뤄요. (겨울의 정취)
맞다, 상투적이다. 어느 시대 어느 마을에나 집 나간 엄마는 있었고, 그 엄마 찾아 전국을 떠도는 아빠가 있었고, 병든 혹은 거동이 어려운 할머니나 할아버지와 사는 아이들이 있었다. 엄마가 집 나가고 아이들이 불쌍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피디수첩에서도 안 다루는 진부한 얘기. 그런 줄 알면서 작가는 왜 굳이 집 나간 엄마와 엄마 찾는 아빠와 남겨진 아이들에 천착하는가.
돈을 벌기 위해, 몸서리쳐지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나와 도시의 변두리에서 다시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는 사람들은, 사실 우리 문학의 전통에서 보자면 전혀 낯선 인물들이 아니다. 저 멀리 일제시대부터 가깝게는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소설 속에 수도 없이 등장한다.
그들이 사라진 건 언제부터였을까. 어느날 그들은 사라졌다. 포스트모던의 시대가 왔고, 가난은 상투적이었고, 가난을 얘기하는 것은 진부했고, 그래서 문학 작품 속에 꾸준히 살아있던 궁핍하고 애처로운 사람들은 더 이상 차지할 자리가 없었고, 우리 시대에는 더 이상 궁폐한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불행은 가난이 아니라 인간의 의식에서 비롯된다는 듯, 그렇게 그들은 사회에서 잊혀졌다. IMF로 다시 절대적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뉴스에 등장했으되 다만 가십거리일 뿐, 시대와 사회의 문제로 인식되지는 못했다. 살인적인 빈곤은 끝나지 않았는데 빈곤에 대한 담론만 뚝, 끝나버렸다.
공선옥의 작품을 접하는 것은 <유랑가족>이 처음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읽으면서 무척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공선옥이, 오랫동안 잊고 지낸 저 우리 문학의 전통과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90년대 이후로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상투적이고 진부한 이야기. 작가 자신이 무척 어렵게 살아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일까, 그가, 남들이 진부하다며 묻어버린 이야기를 꿋꿋이 끌어내어 샅샅이 보여주는 이유가. 남들이 뭐라든 간에 그에게는 그것이 현실이고 진실이니까. 아직은 끝나지 않은, 끝내서는 안되는 이야기니까.
다섯 편의 연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궁상이다. 다들 가난하고, 그러면서도 서로 버리고 버려지고, 속고 속이고, 악다구니와 칼부림이 난무한다. 간간이 보이는 사람 사는 정이라는 것도 어느새 슬그머니 묻혀버린다. 게다가 작가는 상황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부엌이 망가졌어도 둘이 함께 하니 문제 없는 두 사람이……영주를, 키워줄 것이(남쪽 바다, 푸른 나라)”라고 기대했던 사진작가 한에게 두 사람의 처참한 결말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나는 그만 울컥하고 만다. ‘가난하지만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결말은 애초에 작가에게는 허황한 꿈일 뿐이다. 그는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불가능한 희망은 과감히 뿌리친다. 전국 방방 곡곡을 아무리 헤매도 한번 엮인 가난과 불운의 사슬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는 걸 작가 스스로 처절하게 깨닫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랑가족>에 등장하는 인물들 때문에, 그들의 비참한 결말 때문에 먹먹하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보았기에 아직은 절망에 이르지 않았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