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펌프가를 뒤덮은 겨우살이 향기에 이끌려 오솔길을 걸었다. 누군가 펌프에서 물을 긷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물이 뿜어져 나오는 꼭지 아래에다 내 손을 갖다대셨다. 차디찬 물줄기가 꼭지에 닿은 손으로 계속해서 쏟아져 흐르는 가운데 선생님은 다른 한 손에다 처음에는 천천히, 두번째는 빠르게 ‘물’이라고 쓰셨다. 선생님의 손가락 움직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나는 마치 얼음조각이라도 된 양 가만히 서 있었다. 갑자기 잊혀진 것, 그래서 가물가물 흐릿한 의식 저편으로부터 서서히 생각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돌아오는 떨림이 감지됐다. 언어의 신비가 그 베일을 벗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제야 지금 내 손 위로 세차게 내리꽂히는 이 차가운 물줄기가 ‘물’이라는 것의 정체임을 알았다. 살아 숨쉬는 낱말의 입맞춤을 받은 내 영혼은 긴 잠에서 깨어나 그가 가져다준 빛과 희망과 기쁨을 맛보았을 뿐만 아니라 비로소 자유를 찾았다. 물론 아직도 많은 장애물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장애물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질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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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좌우로 나누어 무리지어놓은 각기 다른 크기의 구슬들을 큰 거 두 개, 그보다 작은 걸로 세 개 하는 순서로 꿰고 있었다. 나는 자꾸 틀렸고 선생님은 그럴 때마다 친절하게 잘못을 바로잡아 주셨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어디서 자꾸 틀리는지 알게 됐고 작업에 정신을 집중하게 됐으며 어떻게 해야 틀리지 않겠는지 생각하게 됐다. 그러자 선생님은 내 이마에 대고 ‘생각하다’라고 결정적인 한 단어를 쓰셨다.
바로 그때 나는 내 머릿속에서 계속되던 일련의 과정을 가리키는 바로 그 단어를 섬광과도 같이 깨우쳤다. 추상적인 개념을 최초로 이해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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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이애가라 폭포가 준 놀라움과 아름다움에 감동받았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를 기이하게 여긴다. 그들은 묻곤 한다. “당신은 지금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음악 운운하는데 대체 그 모두가 당신에게 무슨 의미란 말입니까? 솔직히 일렁이는 파도를 볼 수 있는 것도 으르렁거리는 포효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요? 대체 당신이 무엇을 알 수 있다는 건지.” 보고 또 들으면 다 안 것인가. 다 설명한 것인가. 사랑이 무엇이며 종교란 무엇이고 또 선함이란 어떤 것인지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만큼이나 나이애가라, 이 대자연의 그러함을 설명하기 어려운 건 피차 마찬가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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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이 힘이다.” 아니, 아는 것이야말로 행복이다. 폭넓고 깊이 있는 지식을 소유함으로써 무엇이 참된 목적이며 어떤 것이 보다 가치 있는 것인지 분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진보를 특징짓는 사상과 행동 양식의 어떠함을 안다는 것은 수세기를 관통해온 위대한 인간의 심장 고동을 느끼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심장 박동 속에서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열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삶의 조화, 그 가락을 들을 귀가 멀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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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뼈마디가 뒤틀리고 몸이 굽은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의 딱딱하고 거친 손을 만진다. 그러고는 아뿔싸 깨닫는다. 이들이 끊임없이 치러야만 하는 투쟁이 온갖 장애물에 맞서는 헛된 노력, 싸움의 연속일 뿐임을. 결국 이들에게 있어 삶은 노력과 기회 사이에 가로놓인 엄청난 불균형을 건너는 것임을. 우리는 말한다. 해와 공기는 만인에게 내리신 신의 선물이라고.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도시 한구석 거무튀튀한 뒷골목엔 오늘도 해가 들지 않는다. 악취가 진동한다. 오, 인간이여! 어찌 우리가 한 형제인 그들을 잊으며 그들을 유폐시킬 수 있는가. 그들의 손엔 아무것도 들린 게 없는데 어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는가. 오, 제발 이 도시, 온갖 화려함과 떠들썩함이 출렁이는 황금의 그늘에서 벗어나 숲과 들로 단순 정직한 생활로 돌아가라. 그러면 그대들의 자식들은 고귀한 나무처럼 당당하게 자랄 것이요, 그들의 생각 또한 길가에 핀 꽃처럼 아름답고 순결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