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한 힘 - 제3의 시 시인세계 시인선 12
함민복 지음 / 문학세계사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20201226 매일 시읽기 89일 

길의 길 
-함민복 

길 위에 길이 가득 고여 있다 
지나간 사람들이 
놓고 간 길들 
그 길에 젖어 또 한 사람 지나간다 

길도 길을 간다 
제자리걸음으로 
제 몸길을 통해 
더 넓고 탄탄한 길로 
길이 아니었던 시절로 

가다가 

문득 
터널 귓바퀴 세우고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의 소리 듣는다 


어제오늘 홀로 느릿느릿 혹은 빠릿빠릿 동네 뒷산을 산행하노라니 길에 관한 시를 읽고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민복 시집 <<말랑말랑한 힘>>에서 이 시를 발견하고 기뻤다. 함민복 시인의 시들은 시집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순하고 따숩고 정겹다.

<길의 길>은 내가 산길을 걸을 때면 떠올리게 되는 생각을 응축해서 표현해 놓았다. ˝길 위에 길이 가득 고여 있다˝라고. 내가 딛고 있는 길은 나만의 길이 아니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먼먼 시절로부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고 간 길이다. 그들은 무슨 일로, 무슨 생각으로 이 길을 걸었을까 하는 상상을 종종 해보는데, 함민복 시인은 ˝그 길에 젖어˝라고 씀으로써, 앞서 걸은 이들의 발자국 위에 내 발자국을 얹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삶이 내 삶에도 녹아들어 있다는 확장된 인식에 가 닿는다.

길의 길의 길의 길. 길들이 모여 삶을 이룬다. 길들이 모여 사람과 사람을 엮는다. 그렇기에 ˝길도 길을 가˝는 것이다. 그렇게 ˝가다가˝ 우리는 내가 걸었던 길을, 더 넓게는 다른 사람들이 걸었던 길을 돌아보기도 해야 한다. 내가, 그들이 ˝가고(갔던) 길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산에서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일은 늘 흐뭇하다. 길을 잘못 들지 않고 제대로 왔고 또 가고 있다는 자신감과 안도감이 든다. 산에서는 누군가가 낸 길을 따라 잘 걷기만 하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 반면에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일은 꼭 유쾌하지만은 않다. 또한산길처럼 삶의 길에도 무수한 사람들이 걸어온 궤적이 있지만 삶의 길은 타인이 남긴 발자국을 그대로 밟고 갈 수만은 없다는 딜레마가 있다. 삶의 길에는 사람
수만큼 다양한 각양각색의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그렇기에 ˝터널 귓바퀴 세우고˝서 나는 삶이라는 길에 어떤 발자국을 찍고 있고 찍을 것인지 내 속의 소리를 들어봄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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