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 - 알라딘 조유식 사장에게 편지보내기 카페를 엽니다.

막상 편지글의 형식을 쓰려니까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알라딘을 이용하면서 실제 알라딘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머리 속에 그려본 적은 한번도 없더군요. 온라인 상점이다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구매가 완료되고, 실제 대화는 알라딘을 이용하는 다른 알라디너와만 나누었으니까요.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새삼 깨닫게 되는건, 제 아무리 온라인 서점이라고해도 결국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람이 결정해서 움직이는 곳이라는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 알라딘에서 누군가는 비정규직으로 일하다가 해고를 당하고, 누군가는 "고객의 불만"에 답변을 하고, 또 이렇게 누군가 얽힌 끈을 풀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 있어 그에게 편지를 쓰게까지 되었습니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이 곳도 사람 사는 세상인게지요.

사건의 경과를 자세히 지켜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글을 드리는 시점에도 다소 애매한 위치에 서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불매 자체에 어깃장을 놓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 불매 운동을 하시는 분들과 함께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건 제가 다른 분들과 다소 다른 관점에서 이 사태를 접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불매 운동 참여와 불참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짜 차이는 무관심과 관심 사이에 있을 뿐이지요. 구체적인 행동은 다르더라도 이 사안에 관심을 가지고 토론을 통해 저마다의 정치적, 윤리적 판단들을 내려 가는 과정에서 모두가 이 사건의 당사자가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알라딘이야말로 이 토론의 가장 핵심적인 참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어진 질문에 대한 답변에 머무는 대신,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여러 한계들를 토로하고, 가능한 해법을 위해 머리를 모으는 적극적인 행위자가 되기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 시점에서 조사장님은 아마 내가 왜? 혹은 당신들이 뭔데? 라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기업-소비자 관계에 지나친 요구를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저는 알라딘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하고, 알라딘은 제가 생산한 컨텐츠를 알라딘 상품 DB 의 한 항목으로 사용합니다. 저는 알라딘에 돈을 지불하고, 알라딘은 다른 곳보다 (때론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책을 공급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합리적인 계약관계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이 계약관계 안에서는 알라딘 이용자들이 경영과 관련된 부분까지 간섭하고 드는 것은 월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의 알라딘의 대응은 이 계약관계에 충실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객의 불만에 고객팀장이 답하는 방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저는 그 계약관계 이전에 더 근본적인 관계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알라딘이나 우리 모두 같은 시민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여기서 잠깐 제가 살고 있는 동네 이야기를 하겠습니다.(저는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저희 집은 도심 근처에 있는지라 주변에 수십년 이상 된 오래된 건물들이 꽤 많습니다. 대개는 여전히 잘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어떤 건물들은 허물고 그 자리에 현대식 빌딩이 들어서곤 하지요. 그런데 이런 재건축이 진행되기 전, 건물 앞에 꽤 오랫동안 공고가 붙습니다. Land Use Proposal 이라고, 이 자리에 어떤 건물을 지으려고 하며, 대략적인 설계는 어떻고, (가장 중요하게)이러한 건축을 심의하기 위한 공청회가 언제 열린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지요. 당연히 공청회 참가 자격 요건 같은건 없습니다.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참석 가능하지요. 그리고 그 공청회에서 논의되는 내용 또한 다양합니다. 예컨데, 그 정도로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건물이 생기면 주변 도로에 교통 체증을 일으키지 않겠냐는 실무적인 문제제기도 나오고, 기존 세입자들과 갈등이 있다면 그 문제도 논의됩니다. 심지어 그 자리에 유서 깊은 커피숍이 있었는데 어떻게 보존할건지도 논의되곤 하지요. 공청회의 결과는 심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건물주로서도 대충 뭉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지고보면, 그 땅과 건물은 엄연히 사유재산입니다. 그리고 미국만큼 사유재산에 대해 강박적일 정도로 엄격한 나라도 드물겁니다.(심지어 총기 소유의 유래도 국가가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것에 저항하기 위한 시민의 권리로 해석하지요) 그런데, 내 땅에 내가 건물을 짓겠다는 결정을 공공의 의견을 통해 심의를 내리도록 해 두었습니다. 건축 승인을 위해 필요한 법적인 요건들이 있을테고, 그 요건들을 충족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제가 이러한 제도들을 통해 발견하는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시민사회가 차지하는 역할과 위상입니다. 법은 최소한의 테두리와 절차를 위한 것이지, 실질적인 판단은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이 토론을 통해 결정하도록 해 둔 것이죠. 다른 예로 재판에서의 배심원제를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판단을 결정하는 최종 결정권이 시민사회에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일겁니다. 간단히 줄여 말하자면, 그게 민주주의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업 활동은 앞서의 예와는 좀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꼭 그래야하냐는 반론도 가능하겠지만 아무튼 이래저래 비밀로 해야 할게 많은게 기업 활동이라는 것까지는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공공의 토론으로 결정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영상의 판단도 기업 고유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마땅할 겁니다. 사실, 앞서의 건축 심의 공청회에서도 건물에 대한 모든 것을 논의하는게 아니거든요. 기본적으로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는 그 소유주에 있으니까요.(예,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 행사 과정에서 시민사회에 어떤 영향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시민사회와 함께 논의해야 할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그러한 사유재산권 조차도 시민사회가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대한민국의 기업하시는 분들은 대개 자신들의 기업이 시민사회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심지어 (대표적으로 S 모 그룹처럼) 시민사회 위에 군림하려 들기 때문에 더 큰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되네요.

아시다시피,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사회 제반 이슈에 대한 시민사회의 적극적 개입이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시민사회라 하면 일부 시민단체들에 한정해서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만, 시민단체는 조금 더 효율적이고 조직적인 개입을 위해 생겨난 단체이지 결코 시민사회 그 자체의 대체물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는 시민사회는 구성원인 독립적 개인(시민)들을 모두 통칭하는 말이며, 개인들의 자발적 참여와 협의를 통해 그 방향을 잡아가는 군집체로의 성격을 가집니다. 당연히 시민사회의 목소리는 하나가 아닙니다.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퍼지며 그 안에서 토론을 통해 결론을 도출해가는 과정 자체가 시민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불매 운동을 소비자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들을 "소비자"라는 틀로 가두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매에 참여하든 않든, 자신의 삶이 접한 곳에서 이렇게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참여하는 시민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긍정적인 시민사회의 미래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조사장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도, 알라딘 역시 자신이 속한 시민사회와 함께 문제를 고민하고 바람직한 결론을 함께 도출해 나가자는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요청을 드리자면, 알라딘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토론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마 사태를 지켜보는 알라딘 임직원 중에서도 답답하신 분들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유출되어서는 안되는 영업 비밀이 있다면 내부 논의를 거쳐서 글을 남겨주셔도 됩니다. 조사장님께서 직접 토론에 참여하신다면 더 좋겠지요. 원하는 결론이 나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적어도, 지금처럼 서로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되풀이하지 않고, 상황을 폭 넓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주장들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분명 우리는 조금 더 성장할 수 있을겁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닌 한계를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어쨌든, 이것은 당사자들과 시민사회가 함께 토론하고 고민해야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거지요.

저는 우리에게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건 시민사회에 대한 믿음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기도 합니다. 조사장님께서도 그 믿음을 함께 해 주시길 바라면서, 글을 이만 마칠까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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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12-16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어제 읽었다면 저는 등록 버튼을 못 눌렀을 거예요. 턴님에게서 자꾸 빛이 나네요. 눈부셔요.^^

turnleft 2009-12-16 13:38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이건 그저 의견 중 하나일 뿐인걸요. 각자의 목소리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빛이 나고 있습니다 ^^

비로그인 2009-12-16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나만 깡패였어... ㅠ.ㅜ

드팀전 2009-12-16 12:07   좋아요 0 | URL
토닥 토닥. 흐흐

밑에 수정으로 다시 쓰세요. 폼 안나게...ㅎㅎㅎ

간단 명료, 운율까지 좋던데요 뭘...ㅎㅎ

Mephistopheles 2009-12-16 12:29   좋아요 0 | URL
난 그래도 메아쿨파님 글이 가장 눈에 확 들어옵니다.
(다크포스의 소유자라서 그런가 봅니다..ㅋㅋ)

turnleft 2009-12-16 13:38   좋아요 0 | URL
그 얼마나 효율적인 언어랍니까. 저처럼 길게 써봤자 사실 본전도 안 남아요 ㅠ_ㅠ

마냐 2009-12-16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턴님...멋진걸요 ㅎㅎ 그리고 메아쿨파님. 전 메아쿨파님 덕분에 편지 썼어요. 아님 생각 안했을검다. ㅎ

turnleft 2009-12-16 13:40   좋아요 0 | URL
역시 짧고 굵은 글이 강하게 더 강하게 와 닿나 봅니다 ㅎㅎ

2009-12-16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6 1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09-12-16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방적인 행동과 그에 대한 또 일방적인 반발 - 이 일방통행은 이 나라 전체를 갉아먹고 있는 나쁜 병폐인데 그걸 참 적절하게 지적해주시네요. 들으면서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까지 다시 느끼게 됩니다.

turnleft 2009-12-17 03:58   좋아요 0 | URL
그쵸.. 갈수록 민주주의의 근본에서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