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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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텍스트를 읽는 시간을 견딜 수 없었어. 감각과 이미지, 감정과 사유가 허술하게 서로서로의 손에 깍지를 낀 채 흔들리는 그 세계를, 결코 신뢰하고 싶지 않았어. - 본문 117쪽

 

 

나를 나보다 잘 설명하는 말을 만나게 되면 멍해진다. 저 문장을 읽고 또 읽고 또 읽다가, 결국 책을 덮고 모니터를 켠 지금처럼.

 

 

아직 117쪽에 있다. 이 책은 자꾸 이렇게 된다. 머물게 한다. 곱씹고 곱씹으며 머뭇거리게 한다.

 

 

단단하고 안정적인 상태가 아니어서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걸까, 근 몇 개월에 이르도록 소설을 읽지 못하는 이유가.

 

 

감정보다는 사유를 오히려 택하고 있던 이유를, 줄곧 '요즘은 왜 이런 책들에 자꾸 눈이 가나 몰라 '라고 말해오던 이유를, 여기에서 발견한다. 감각이, 감정이 자극받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고.

 

 

오랜 친구가 '오히려 좀 발산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했던 신경질적이고 불친절하고 예민한 기질들을 잠재우고 싶은데,

 

여행길에서 즉흥적으로 골라 잡은 이 책은 정반대여서, 아주 오랫동안 조금조금씩 읽고 쉬고 읽고 쉰다.

 

활자들이 말을 읽은 그녀의 목소리가, 빛을 잃어가는 그의 방안의 푸른 기운이 되서 오래 오래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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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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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지인의 추천으로 읽은 후, 너무 훌륭해서 나만 알고 있었으면 하는 비밀 장소와도 같은 작품이 되었다. 추천작 이야기가 나와도 시침 뚝 떼며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았다"라고 밝힌 미치오 슈스케가 누군지도 몰랐는데,
읽게 되었다. 빌려서도 아니고 오랫만에 장바구니를 그득하게 채워서.

하루만에 후루룩 읽고, 줄곧 열흘이 넘도록 아.. 그렇구나.. 그래.. 그르게.. 를 혼자 중얼중얼 거리고 있다.

1960년에 발표되었다는 이 추리소설은, 추리의 재미에 관해서라면 솔직히, 무척 시시하다.
홈즈처럼 나는 미처 몰랐던 단서들을 조잘되는 사람도 없고,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의뭉스러운 인물도 없다.
이러니까 이 소설은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야! 끝!' 이런 소설이 아니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관성에 젖은 독서경험에 대한 반전이다, 라고 말하면 될까. 이렇게 말하고 보니 이건 정말 어마어마한 일인건데, 누구에게 뒤통수를 맞은 듯 강한 충격이라기보다는, 헤어스타일을 완전히 바꾼 후 기저기서 유리창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에 문득문득 '맞아 내 머리가 이런 모양새였지' 하게 되는 느낌. 영 설명이 안 되는군.

기기묘묘한 독서경험이었다. 틀림없이. 이 책을 읽는 (아마도) 모든 사람이 어? 하면서 앞장을 다시 들춰보게 될 거고,
혹시 빼먹고 안 읽은-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단서는 하나도 없는데 갑자기 천장과 바닥이 기우뚱~하는 기분을 갖게 될 거다.
졸고 있는 지도 모르다가 졸음에서 깨어날 때의 기분, 타이레놀의 도움으로 두통이 사라지고 시야가 환해질때의 기분, 충분히 권할 만 하다.

자꾸 다시 곱씹게 되고, 그럴 때마다 은근 재밌어 죽겠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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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
마커스 주삭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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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감동을 주었던 작가의 이전작품을 읽는 일은 조심스럽다.
책도둑 1,2 - 마커스 주삭의 여운이 굉장한 기간동안 남아있었던 터라, 혹시 그걸 망치게 될까 싶기 때문인데, 단 하나의 작품을 읽자마자 여기저기 입소문을 냈게 했던 작가님은, 역시, !!!!!!

세련된 생략,을 흉내내고 싶게 했던 책도둑보다는 문장들이 친절하고 인물들도 친근하고 사건들은 아기자기하다.
'대중적'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부분. 책도둑을 꺼이꺼이 하며 읽었던 터라, 감동에서라면 뭐랄까,
'책도둑'이 폭풍우 직전의 성난 파도 앞에 선 경우라면, '메신저'는 폭우가 지난 후 하늘이 점차 개어가고 물결은 잔잔해지는 뭐,그런 정도의 다른 느낌.

아직 정식 택시기사가 될 수도 없을 만큼 어린 우리의 '에드'와 그의 세 친구 - 사실은 연인이고픈 여자친구를 포함해서 - 이야기, 일 것 같아서 오히려 앞부분은 띄엄 띄엄 집중하지 못했다. 그닥 설레지 않아서. 
대학을 졸업하고도 딱히 무엇,이랄 것 하나 없이 주말이면 피씨방 야간정액권을 끊어 스타나 로그 스피어스나 뭐 이런 게임을 했던 그 시절의 나와 친구들이나, 다를 바가.

주인공 에드가 우연히 어설픈 은행강도를 잡고 나서, 세 곳의 주소가 쓰여진 카드 한 장을 받게 되는 그 어느날, 이야기는 끊어오르기 시작한다. 완전한 타인들의 삶에서 시작해서 결국은 자신에게로 에드가 걷게 되는 그 길은, 평범하기 그지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저 놀랍고 부럽기만 할 뿐이다. (물론 내가 그 카드를 받았다면 퀘스트 성공! 했을 리 없겠지만.)

타인에게 '존재만으로 기적같은 사람'이 되고 디 엔드 했다면 이건 뭐 그냥 뜬구름이었을텐데,
가장 먼 곳에서 시작한 길이 점점 가까워져 마침내 에드와 그녀가 딱 노래 한 곡 만큼의 시간동안 함께 하는 그 순간에는 벅차오르기까지 했다. 
이 작가는 인물들을 사랑하게 만든다.

어떤 이야기 안에서건,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 사람이건, 
그의 삶이 더 바랄 나위 없이 풍요로워 졌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이 작가님은 나에게 르 귄 여사님 다음, 그러니까 '두번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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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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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폴 오스터를 읽어야지. 역시 또 새 책을 내주셨어."
"요즘, 누가 폴 오스터를 읽냐. 촌스럽게."

친구가 확실히 '촌스럽게'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구식이라는 느낌의 단어를 말하긴 했는데..

사실은, 내심 속으로 동의하긴 했었다.
기록실로의 여행- 에서부턴 '의리' 혹은 '끝까지' 라는 생각이 있었으니까. 그 생각은 여전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어떤 관계의 사람이건 이 작가를 소개하곤 했었는데, 매번 같은 선택을 해야 했다.
'공중곡예사' 인지 '뉴욕 3부작' 인지를.
'스토리텔링이란 이런 것이다' 인지 '네가 누군지 너는 알겠니' 인지를.
내 경우엔, 처음엔 전자에 끌리고 이후 후자에 반한 경우라서, 대부분 공중곡예사나 달의 궁전을 첫선물로.

'신탁의 밤' 부턴가 헷갈리기 시작했었다. 흐음..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읽는 재미야 보증수표랄 만 한데,
작가님이 나이가 드시는가 싶기도 하고, 내가 잘 못 읽어서 알아채지 못하는가 싶어지는 것이.
물론 독서력의 결핍이 주된 이유였을 건데, 그래도 조금은 작가님 탓으로 돌리고 싶은 뭔가 개운하지 않은 느낌.
그래서인지, 이번 책은 '내가 처음으로 빌려 읽은 폴 오스터의 소설' 이 되었고, 다 읽고 난 후에 후회했다.
이야기의 힘과 사람의 마음을 꿰뚫고 질문을 던지는 힘이 완전 합체가 된 것 같은 느낌. 사야지.

콜럼비아에서 문학을 전공하는 대학 2년생 Adam 에게 그의 청춘시절을 흔들어 놓은 사건이 일어난다.
그 사건으로 인한 죄의식, 자기 경멸에서 벗어나려는 종적을 따라 이야기는 흘러가지만 사실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게 생각된다. 그 과정에 있었던 세 명의 여성, 마고와 세실과 그윈. Gwyn 과 Adam. 책을 덮고 난 뒤에 마음속에 남는 건 그 두 사람의 관계,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사건, 그것에 대한 두 사람의 기억이었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아닌지 따져볼 수도 없을 거고 그럴 필요도 없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나의 역사가 알려주는 거라면, 그럼에도 내가 기억하는 나의 역사가 어느 순간 흐릿해진다면.
나는 어떤 사람인건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나와 누군가만 알고 있는 일에 대해 십년 쯤 지난 후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십년 동안 내가 되새기고 되새겼던 것을 그 누군가는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 확신에 찬 이야기에 꽤 당황했었고, 아직도 당황스럽다. 그 당황스러움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이 소설 덕분에.

이 소설이 나에게 말하는 Invisible 이란 그런 것이었다. 뿌옇고 모호한 기억. 너는 어떤 이였고 나는 어떤 이였는지.
내가 확신하고 있는 것이 정말 그럴 수 있는 건지. 그렇다면 믿고 찾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런 질문을 던지는 소설에게 물음표를 달 이유란 없는 것이다. 


뉴욕타임즈 서평에 실린 사진. 마음에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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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 크리처스 - 그린브라이어의 연인,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3-1 판타스틱 픽션 블루 Blue 3
캐미 가르시아.마거릿 스톨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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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클릭할때, 항상 생각한다. 별 반개를 선택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이 책은 두 개 반 주고 싶은, - 형편없다는 게 아니라 - 딱 반 쯤 주고 싶은 경우여서.

트와일라잇을 잇는 판타지 로맨스, 라는 어느 소개 문구때문에 동네 도서관에 신청해서 읽었다.
어차피 한 권의 책을 구입하는 거라면 나 혼자 사서 보는 것보다 책 없는 동네 도서관에 신청해서 누군가에게도 노출된다면, 그것도 괜찮지 뭐, 하면서.

일단 '재미'는 괜찮다. 꽤 두꺼운 책인데 중단하지 않았으니까.
다만 트와일라잇보다 더 '영 어덜트' 스럽다.
16세의 생일에 자신이 '빛'이 될지 '어둠'이 될지 선택을 받게 되는 소녀와,
보수적이고 지루하고 (덕분에?) 평화로운 마을에서 그녀를 마주하게 된 소년의 이야기.

사람의 마음을 읽거나, 그 사람이 겪어온 시간을 읽거나, 물건을 들어올리고, 몸을 변화시키고, 기타 등등의 아기자기한 (넘쳐나는 판타지 속에서 이 정도는 이제 아기자기하다고 해도..) 장기들을 선보이는 소녀의 주술사 가족이나,
아무도 가늠하지 못하는 능력을 가진 자신의 미래를 불안해하는 십대 소녀보다는,
오히려 소년에게 시선이 간다.

미국 남부의 시골마을 -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누구네집 숟가락이 몇개인지도 꿰고 있는- 에서
커트 보네거트나 앵무새 죽이기를 읽는 다는 걸 친구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친구들과 엇비슷한 아이'이길 애썼던 소년이,
동네 사람 모두가 외면하는 낯선 존재와, 그 존재와 더불어 자신의 삶에 끼어든 모든 낯선 것들에 마음을 여는 것이 기특하다.

그런데 그냥 딱 그런 정도.
해리포터를 완독하지 않아서 그것과 비교하는 얘기에는 뭐라 말할 수 없고, 트와일라잇과는 흠, '사양합니다'
영화 트와일라잇의 샤방샤방한 그림들이 소설 트와일라잇에 대한 호감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긴 하지만,
너무 애들 얘기다. 뱀파이어라는 존재에 대한 에드워드의 고민이나, 에드워드 가족들의 사연들, 벨라가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이질감, 등등의 이야기들이 깊이가 다르다. 주인공들의 나이차가 좀 나는 것도 상관이 있기야 하겠지. 총 4부로 나올 예정이라고 하니, 고작 4분의 1을 읽은 것이니 좀 더 두고 볼 필요도 있겠고.

중학교 다니는 책 좀 읽는 친구가 '재미있는 판타지 없어요?' 라고 묻는다면 분명 권할 만한 책이다.
다만 트와일라잇과의 비교는 다시한번 '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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