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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아이처럼 - 아이, 엄마, 가족이 모두 행복한 프랑스식 육아
파멜라 드러커맨 지음, 이주혜 옮김 / 북하이브(타임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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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이 분분하다. 만나는 모든 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더할 수 없는 확신에 차 있고, 경험이 없는 나의 생각들은 그만큼 흔들린다. 살면서 이토록 불확실한 과제를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육아가 그렇다. 아이는 사람이니까. 워낙에 사람을 읽는 일에 소질이 없는 탓에 내 아이를 읽지 못하고 놓칠 일이 두렵다. 그래서 이런 책을 읽게 되는가보다.

일단 재미있다. 저자의 서술에 비추어보면 우리와 꽤 비슷한 모습의 미국인 엄마가 프랑스 엄마들과 아이들, 그 사회가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관찰하고 감탄하고 의심하는 과정들이 남 얘기가 아니다보니.

어떤 부분에선 매우 확실하다. 신뢰할 만 하단 생각이다. 실습해보고 싶어서 아이가 더 갓난아기였을때 읽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어떤 부분에선 도대체 어떻게 한다는 건지 감이 안 잡힌다. 나의 단호함과 그들의 단호함은 어떻게 다르길래. 프랑스 엄마 한 분 모셔서 과외라도 받고 싶다.

전반적으로는 참고할 만 하다는 수준이다. 네이버 맘키즈 섹션에 올라오는 각종 글들과 거리가 멀다. 이것저것 보고 내 노선을 정하는 것이 바램인데 간극을 메우는 합의점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 결국은 엄마의 직관인가.

가장 부럽다 할 수 있던 건, 사회 전반에 육아법에 대해 무의식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는 것. 어제 만난 친구와 오늘 만난 친구가 극과 극의 육아법을 얘기하는 사회에서 초보엄마들은 너무 혼란스럽다. 프랑스 사람들이 ‘맘충‘이라는 단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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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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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임신 출산 육아로 연결되는, 결코 내 것일것 같지 않았던 장르로 지내오면서 육아서와 아이그림책을 제외하고 책 한권을 곱씹으며 완독한 것이 얼마만인지. 종이의 질감이 낯설면서 귀찮기도.

작가의 말대로 문득 뒤돌면 그간 겪은 어떤 것들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큰 굽이진 길을 걷고 있는 모양이다. 그저 동요를 따라부르고 하루에 수십번씩 같은 단어를 소리내는 일상에 압도당하고 있었는데, 이 짧은 글 몇편에 순식간에 숨어있던 나로 돌려져버렸다. 무섭게도 서늘하다.

희랍어시간도, 채식주의자도 그랬다. 아이 앞에서 감정을 숨겨야 하는 시간에는 이 작가를 피해야하는 모양이다. 저녁 반찬을 고민하고 인터넷 최저가 육아용품을 검색하는 편이 안전하다.

그래도, 모르는 척 외면할 수도 없고 어찌해줘야 할 지 모르겠는 그녀가, 다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안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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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없이 걸었다 - 뮌스터 걸어본다 5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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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시인의 문장이 읽고 싶었다.

 

울기 위한 변명이 필요할 때 그 변명이 되어준 시인의 이름을 보고 주저없이 주문.

 

한참 지난 얘기이긴 하지만, 예전의 나에게 '걷기'란 '울음'과 같을 때가 많았어서 울다가- 걷다가- 걸으면서 울다가- 울음이 멈출때면 무덤덤한 마음으로 걷기도 멈추곤 했었다. 그런데 제목이 '너없이 걸었다'라니. 아무리 평소에 여행기나 에세이는 읽지 않아 라고 말하는 주제라도 못 본 척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뮌스터라는 이름도 낯선 독일의 거리가 궁금하진 않았다. 낯선 도시의 이방인인 시인은 무엇을 보고 어떻게 느끼고 무어라 말하는지 그저 그녀의 문장이 그리웠고 그런 면에서 충분히 만족스럽게, 근래 들어 읽은 책들 중 드물게 문장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켜주었다.

 

강변과 골목과 건물과 길을 따라 과거의 이야기와 과거의 누군가의 이야기가 지금과 미래를 대하는 마음이 어때야 하는지 이끌어준다. 역사란 이런게 아닐까. 가장 기억이 남았던 뮌스터 길 바닥 곳곳에 박혀 있다는 걸림돌처럼. 여기에 살았다 - 이름 - 태어난 해 - 끌려간 장소가 새겨져 있는.

 

'..... 그러다 어느 날 보도로 눈을 줄 때 걸림돌은 보인다. 사람들은 잠깐 걷기를 멈추고 들여다본다. 아, 이곳에서 살던 어떤 이가 언제 어디로 끌려갔구나! 이 멀쩡한 도시에, 활기한 사람들 사이에, 명랑하게 달려가는 자전거들 사이에, 어울려 즐거운 술자리를 벌이는 술짚 앞 보도에, 그 돌들은 있다. 희생된 이들에게 잊히는 것은 무자비한 일이다. 잊음을 독촉하는 사회가 비인간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누군가의 억울한 일을 잊어버리면서 인간은 짐승이 되어간다. 그 짐승은 인간을 다시 억울한 구석으로 몰고 가면서도 자신이 어떤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고 관철하려고 한다. 잊음에 저항하는 것은 인간성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몸짓이다. " (92쪽)

 

왜 우리는 저렇게가 안될까. 도대체 뭐가 그렇게들 중요한가.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요즘에 어떻게든 하루 한 차례 산책은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이제 나의 걸음은 점점 더 너무나 야만적이고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이 곳에서 태어날 나의 아이에게 어떤 얘길 건넬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예전 어느 영화에서처럼 괴물은 되지 말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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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팻 캐바나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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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만한 사람은 알만한 지긋한 작가에겐
역시나 알만한 사람은 알고 있는 부인이 있었다.
그녀를 추억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매우 빛나던 사람이었다고들.

30년이랬나. (숫자는 정말 기억이 안 난다..) 세월의 무게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20인지 30인지에 따라 뭐 그리 다를까..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존재가 되는 시간을 함께 한 부인이 갑자기 쓰러져 남편을 떠나는 데 걸린 시간은 40일이 못 되었다고 한다. 세상은 그녀를 잃은 그를 꽤 궁금해 한 모양인데, 정작 당사자가 시치미떼듯 내 놓은 소설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라니.

아내를 잃고 5년뒤에 비로소 그간의 시간을 온전히 담아 낸 이 책이다. 그런 스토리를 갖고 있는 이 이야기는,


고스란하다. 바른 말법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그렇다. 고집스럽고 집요하달수도 있겠다. 사별을 겪은 비탄의 당사자가 아닌 외부인의 눈에는. 단순한 이별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사별이다.

너무도 당연하게 자살을 생각하지만, 여전히 매 순간 그녀에게 말을 걸고 그녀를 떠올리니 어쩌면 그녀가 여전히 자신의 곁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죽었지만 살아있는- 자신이 사라지면 지금 자신의 곁에 그렇게 존재하는 그녀도 사라지는 일이라, 그녀를 두 번 사라지게 할 수 없는 일이라 자살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계속 계속 떠오른다.


외부인인 우리는 이제 그만 놓으라고 잊으라고 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도 하고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도 한다. 그 정도면 할만큼 하지 않았냐고도 한다. 그 정도, 그만큼의 시간, 외부인인 우리가 감히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나. 이제는,이라는 단어가 사별의 당사자인 그들에게도 존재할까. 그들을 비난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 정말이지 제발.


이제껏 이런 러브스토리를 본 적이 없어서, '사랑은 그렇게 완성된다'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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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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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아직 영화를 보기 전이지만 이미 너무 예쁜 두 배우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고 이 소설을 읽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낭패다. 어린 이 부부가 그저 이쁘기만 하니.

고칠 수 없는 병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픽션이건 그렇지 않건, 결국은 비슷한 감정을 불러오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 반갑지 않다. 이미 예전에 패스,하고 넘긴 이 책을 다시 찾은 건, 솔직히 너무 예쁜 두 배우 덕분이었다.

고칠 수 없는 병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독자인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눈물을 뺀다. 아무래도 어쩔 수 없다. 단어의 '몸피'를 느껴보겠다고 지근지근 조용조용 읽으려고 애썼지만 결국은 휴지가 필요했다.

다만, 슬픔과는 조금 다른 무엇이어서, 예전에 보았던 미드 The Bic C 가 생각났다.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린 각각의 주인공들이 온전히 삶을 살아내고 눈을 감는 모습이 비슷해서인가. '소멸'이 아닌 '가득 채워진' 죽음. 안타깝지만 아쉽진 않은.

그러나, 온전히 이해할 순 없는 노릇이다. 눈 먼 사람이 손으로 더듬어 코끼리의 모습을 그린다고 했던가. 내가 딱 그 모양새다. 열일곱에 여든의 모습인 소년이 제 자신과 제 부모를 바라보는 마음도, 열일곱에 그 아이를 낳아 서른 넷에 아이를-여든의 모습인- 떠나보내는 부모의 마음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읽는 내내 내가 느끼고 이해하는 것들은 진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 글을 제대로 읽기위해 갖추어야 할 것들이 나에겐 아무것도 없으니.

아마도 다른 어떤 이들이겐 훨씬 더 큰 울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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