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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의 에로틱한 잠재력
다비드 포앙키노스 지음, 김경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눈에 거슬리던 '에로틱'이란 단어 앞뒤에 '내 아내'와 '잠재력'이 붙어주시니 거슬림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단숨에 매혹적인 제목으로 변신한다. 에로틱한 잠재력, 그것도 내 아내의! 뭔가를 상상하게(?) 만드는 제목만으로도 한 번쯤은 궁금해지게 하는 이책, 프랑스 소설이다. 예전엔 프랑스 소설하면 느릿느릿한 어려움과 지루함이 감돈다고 생각했었는데, 최근 프랑스의 젊은 작가들이 쏟아내는 작품들은 나의 이런 편견을 여지없이 깨주는 재기발랄함이 가득하다. 이책 또한 마찬가지.
문체와 표현, 글의 구성방식과 캐릭터까지 곳곳에서 독특함을 마구 풍긴다. 표지의 그림은 또 어떠한가. 처음엔 그냥 재미있군, 하고 넘겼었는데, 책을 다 읽고 다시보니 스토리의 핵심 내용이 그림으로 모두 표현되어 있더라는. 오오~ 그녀의 환상적인 종아리까지! 그런데 과연 표지 그림만으로 엑토르를 꼼짝 못하게 하는 아내는 에로틱한 잠재력을 찾아내는 독자가 얼마나 될까. (거의 없지 않을까; ㅎㅎ)
'우리 시대의 종아리 굵은 영웅’이란 소개말로 화려하게 등장하는 엑토르, 이책의 모든 사건을 일으키는 우리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그는 '영웅'이란 수식어가 무색하게도 이야기의 시작과 함께 어설픈 자살을 시도하고 바로 실패한다(솔직히 시작부터 주인공이 죽어버리면 좀 난감할테지;). 그리고 그덕에 6개월간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주인공 엑토르가 병원에서 황망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책의 작가는 과거 각종 물건 수집에 광적으로 마음을 뺏겨 물건 관계(?)가 복잡했던 그의 수집 편력들을 늘어놓고, 그를 둘러싼 가족과 직장 사람들에 대한 에피소드 등을 통해 그의 암울했던 과거사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병원에 있는 동안 자신의 행방을 묻는 가족과 회사 사람들에게 순간적으로 미국 여행을 간다고 거짓말을 해버린 엑토르는 퇴원원과 함께 자신의 거짓말을 감당할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국에 대한 공부에 돌입한다.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스타아아아아아아아아아츠(미국에 오래 머문 프랑스인들이 미국(states)을 친근하게 부른다는 발음)'는 오히려 도서관 지리학실의 미국 전도 앞에서 운명의 여인 브리지트를 만나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미국에 다녀온 척 거짓말을 해야 하는 비슷한 처지가 그들의 초고속 사랑에 발판이 되어준다. 그에 힘입어 서로에게 푹 빠져버린 엑토르와 브리지트는 마침내 결혼에 골인한다.
- 그들은 상냥함과 정중함을 결합하여 다음과 같은 합의를 이끌어냈다. 책을 같이 보기로 한다. 함께 앉을 데를 찾아가기로 한다.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 서로의 책 읽는 속도를 배려하기로 한다. 소파로 가는 길에, 그리고 왠지 모르게, 엑토르는 크로아티아 속담을 떠올렸다. 운명적인 여인은 책 앞에서 만나게 된다는. 속담처럼 책 한 권이 이미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61쪽)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결혼 후 시작한 사업이 승승장구하는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엑토르. 과거에 자신을 괴롭히던 광적인 수집 본능을 잊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눈에 숨이 막히도록 에로틱한(?) 아내의 모습이 들어온다. 차마 아내에게 말은 못하고(차라리 말을 하지!)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엑토르는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아내의 모습들을 수집하기로 마음먹고, 그것을 발단으로 사건이 터진다. 전혀 뜻밖의 모습에서 아내의 에로틱한 잠재력을 발견한 우리의 주인공, 그는 과연 그 희한한 수집에 성공할 수 있을까.
엑토르의 엉뚱한 수집광적 면모와 브리지트의 감출 수 없는 황당한 에로틱한 매력이 뒤섞여 좌충우돌 굴러가던 이야기는 어느 순간 화해 무드에 접어들고, 그녀의 에로틱한 매력은 그들 부부는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전염되어 모두 해피 바이러스에 전염된 듯 행복한 미소를 머금는다. 시작에 비해 결말이 너무 교훈적이지 않느냐고 반박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과연 그런 독자가 있긴 할까;;), 그러면 뭐 어떤가. 함께 행복하다면 그것 또한 좋지 아니한가.
- 진리를 찾는 것은 성스러워 보일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반드시 행복해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우리의 거짓말과 우리의 충동을 없애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188쪽)
<내 아내의 에로틱한 잠재력>은 제목과 내용과 캐릭터에 이르기까지 황당함과 유쾌함, 기발함과 어이없음, 난감함과 통쾌함 등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한 마디로 엉뚱하지만 유쾌하고 매력적인 소설이라고나 할까. 엑토르가 변태마냥 침 흘리며 훔쳐보는 아내의 에로틱한 장면은 보통 사람들에겐 에로틱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상적인 모습인가 하면, 그런 엑토르에게 실행을 요구하는 브리지트의 황당한 판타지는 입을 못 다물 정도로 난감하고, 그들의 친구와 가족이 보여주는 과장되고 엽기적인 행각은 순간순간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 특이한 캐릭터들의 모습이 밉살스럽기는 커녕 귀엽게 느껴진다.
작가의 표현이나 문체 또한 재미있다. 서른 중반 정도의 젊은 작가는 통통튀는 - <캐비닛>의 그 기발함이 생각나는 - 문체로 소설에 상큼함을 부여한다. . 황당한 상황을 태연하게 묘사하고, 어이없는 현장을 더욱 어이없게 만들어주는 재미란! 예를 들면 이런 표현. "가방 내려놔!" 엑토르는 '내려놔'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키는 대로 했다. 그녀는 손가락을 남편의 입에 갖다댔다. 입 다물라는 뜻으로 잘 알려진 수신호였다(165쪽). 거침없이 읽히는 기막힌 가독성 덕에 몇 번 킥킥대고 에~?하고 몇 번 어이없어 하다보면 어느 순간 끝이 나버린다. 안그래도 얇은 책, 가독성까지 끝내주니 이를 어쩌랴. 한 번 잡으면 어쩔 수 없이 끝까지 가게 된다.
미혼인 데다가 솔로인 까닭에 이들 부부가 보여주는 에로틱한 고민과 판타지들이 실제 부부들 사이에서 흔한 건지 어떤 건지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유부들에게 물어봐야 하나;;), 엑토르와 브리지트를 보며 일상의 무덤덤함으로 굳어버리기 쉬운 결혼 생활에서 서로에 대한 에로틱한 판타지 한두 가지 쯤은 오히려 생활의 활력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 판타지 스릴러(?) <내 아내의 에로틱한 잠재력>, 톡톡쏘는 청량음료 같은 소설이었다.
- 엑토르는 브리지트를 도서관에 데려가서 그들 사랑의 씨앗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미국 전도 앞에서 그들의 손은 자연스레 서로를 맞잡았다. 손은 뇌가 없지만 사랑을 기억한다. 그들은 책 앞에서 다시금 우연을 만들기 위해 입구에서 헤어졌다. (중략) 그들은 그 책 앞에서 다시 만나서, 빨간 제본 앞에서 키스를 했다. (181~2쪽)
* 덧붙임, 하나 - 참고로 이책은 제목의 '에로틱'이란 단어가 풍기는 강렬함을 만족시킬 만큼 에로틱하지 않다. 물론 '부부'와 그들의 생활이 전면에 등장하는 만큼 완전한(?) 건전함을 주장할 순 없고, 엑토르가 가끔 변태적인 성향을 숨기지 않으며, 때때로 민망한 성인 개그(?)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행여 제목만 보고 흑심을 품으셨다면 실망의 늪에 빠질 염려가 높다는 말씀! 반대로 제목 때문에 skip할 필요도 없다는 사실! 덧붙여 말하자면~~ 제목 속의 '에로틱'은 순전히 주인공 엑토르의 관점에서 '에로틱'한 것임을 살짝쿵 알려드린다. 후훗.
* 덧붙임, 둘 - 마지막에 등장하는 '우아르자자트-카사블랑카'는 과연 무슨 의미일까? 브리지트의 오빠 제라르의 치명적(?) 비밀과 관련이 있는 걸까? 그럼 작가는 마지막에 이 단어를 넣음으로써 이 이야기는 결국 제라르의 그것과 같다는 걸 말하려는 것일까? 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