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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링, 천국을 바라보다 - 시즌 3 ㅣ 엘링(Elling) 3
잉바르 암비에른센 지음, 한희진 옮김 / 푸른숲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노르웨이에서 건너온 사랑스런 소설, <엘링, 천국을 바라보다>.
해외 문학이라곤 이제껏 영미나 일본 등 극히 제한된 지역의 소설들만 접해왔던지라 '노르웨이'라는 낯선 태생의 이책과의 만남은 신선했다. 노르웨이,라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위치한 나라 중 하나라는 정도의 단출한(;;) 지식 밖에 없지만, 그러면 뭐 어떠랴~ 백지에 가까운 사전지식 덕분에 오히려 별다른 편견없이 순수하게 작품만으로 만날 수 있었으니 전화위복이 된 셈. 어쨌든 소심쟁이 엘링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엘링, 천국을 바라보다>는 4부작으로 이루어진 '엘링 연작 소설'의 세 번째로 엘링 시리즈 중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작품이란다. 노르웨이에서 영화로도 제작되어 각종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아카데미상 최우수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고(우리 영화계의 숙원(?) 중 하나인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노미네이트, 노르웨이에선 엘링이 이룬 모양이다). 소심하고 엉뚱한 엘링이 영화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표현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그러나 현실적으로 노르웨이 영화를 구해보긴 하늘의 별따기;).
4권에 걸쳐 이어지는 연작소설인 만큼 1권부터 순서대로 읽으며 엘링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독서의 자세이겠지만, 나처럼 땡기는 편만 불쑥 골라 읽어도 나쁘지 않다. 꾸준히 엘링이 등장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각 편마다 다른 방식과 이야기로 진행되기 때문에 내용 이해에는 별다른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엘링 시리즈로 노르웨이 평단과 독자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다는 작가 잉바르 암비에르센은 노르웨이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라고. 책날개에 실려있는 긴 웨이브 머리의 그의 사진은 카리스마 짱! 그를 감싸는 진지한 분위기가 그의 책 속 아들인 엘링과는 전혀 다른 포스를 풍겨주신다. 훗.
이책의 주인공 '엘링'을 한 마디로 소개하자면 흔히 말하는 '사회부적응자'다. 겉으로 보기엔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른 것이 없지만 내면의 사회성이 결여된,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데 익숙하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그러나 그 정도가 자폐증만큼 심하진 않다;)인 사회부적응자. 그러나 엘링은 그런 딱딱한 단어 하나로 정의해버리기엔 너무나 사랑스런 점이 많은 캐릭터다. 못말리는 소심쟁이에다가 작은 일 하나에도 머릿속으로 끝없이 상상의 날개를 펼쳐나가는 과대망상증의 증세를 보이긴 하지만, 시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 그가 바로 엘링이다.
- 고양이는 바구니 안에서 꼼짝도 않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바로 그 순간 우리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으리란 걸 예감했다. 나 또한 평생 저런 모습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새롭고 낯선 것에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두려움.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세상이 나를 향해 열렸다. 아니면 내가 세상을 향해 열렸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것은 표 나지 않게 천천히 진행되었다. 결코 내가 세상을 향해 달려갔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작은 걸음을 느리게 몇 발짝 뗐을 뿐. 그러다 몇 번 넘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분명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50쪽)
엘링과 그의 룸메이트 키엘은 웬만해선 집밖으로 나가려 하질 않는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가기를 두려워한다. 익숙한 것들로 채워진, 그래서 낯선 이들과의 불편한 만남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집은 그들에게 있어 최상의 공간이다. 계산대에서 점원과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하는 그 순간이 두려워 수퍼마켓을 못 가고, 수화기 넘어 낯선 이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전화기 앞에서 식은 땀만 흘려대는 엘링과 키엘. 그러나 그들은 복지원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선 사회에 적응해야 했고, 담당 복지사 프랑크의 도움과 격려, 그리고 열렬한 협박(?)에 힘입어 세상으로 발을 내딛는 연습을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미친듯이 쿵쾅대는 심장을 억누르고 수퍼마켓에 들러 물건을 사는데 성공한다. 조금씩 자신감을 가진 그들은 신문광고를 보고 낯선 이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의 집에서 새끼 고양이를 분양받아 오는가 하면, 프랑크 없이는 꿈도 못 꾸던 식당에 들어가 당당히 음식을 주문하고 식당의 웨이트리스와 자연스레 농담까지 주고 받는다. 급기야 집 앞 계단에 쓰러져있는 윗층 미혼모 레이둔을 도와 집으로 데려다 주고, 식당과 시낭독회에서 우연히 만났던 노시인 알폰스를 찾는 등 주변인들에게 도움의 손길까지 뻗는 활약을 펼친다.
레이둔과 알폰스를 도와준 것을 계기로 엘링과 키엘은 처음으로 낯선 이들과 특별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 사회부적응자, 미혼모, 예전 시인이란 특이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모임답게 그들은 각자의 방식의 독특함을 존중하면서 서로 친해지게 되고, 급기야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엘링과 키엘이 여행을? 그러나 그들은 프랑크의 허락 아래 여행을 떠났고, 그 여행은 엘링과 키엘에게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 가끔 이른바 운명이라는 것을 믿게 될 때가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이면에 숨겨진 하나의 뜻을 믿게 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당신의 공간으로 들어온다고 치자. 물론 이상할 건 없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각자 우주를 하나씩 품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을 어떻게 맞아들이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 사람을 조심조심 자신의 뜰로 데려와야 하는 것이다. (138쪽)
<엘링, 천국을 바라보다>는 자신만의 세계에 머무르던 엘링이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그것을 계기로 세상 속으로 나아가며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우리에겐 지극히 평범하지만 엘링에겐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일상들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자극적인 소재나 극적인 긴장감 없이도 충분히 유쾌하고 재미있다. 엘링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일상의 비일상성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취향에 따라 이책이 심심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오히려 그런 밋밋함이 엘링스러운 감동을 선사한다. 또한 작가는 살짝 부족하고 자주 독특하지만 따뜻한 마음 만큼은 남부러울 게 없는 주인공 엘링을 통해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한껏 드러낸다.
인간적인 따뜻함과 잔잔한 감동이 그립다면 엉뚱하지만 사랑스러운 엘링을 만나보는 건 어떨까. 세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거북이 발걸음 만큼이나 더디고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두렵지만, 그럼에도 자신만의 도전을 멈추지 않는 우리의 주인공 엘링. 다음 책에서 계속될 엘링과 키엘 콤비의 활약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 오탈자 - 54쪽 4줄) 녀석들이 창가에서 제대로 몸을 가
두지도 못하면서 → 가
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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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 이왕이면 '제대로'를 '몸을' 뒤에 두면, 그러니깐 '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면서' 보다는 '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면서'가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하는 (혼자만의) 생각을 해봤다. 물론 '제대로'가 부사인 까닭에 어디 있어도 틀린 문장은 아니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