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 - 셰익스피어 & 컴퍼니
제레미 머서 지음, 조동섭 옮김 / 시공사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내가 좋아하는 영화 <비포 선셋>은 주인공인 제시와 셀린느가 10년 만에 재회하는 장면으로 긴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10년이란 세월 후 그들이 처음으로 만난 곳은 서점, 그것도 파리에서 유명한 고서점 <셰익스피어 & 컴퍼니>였다. 작가가 되어 파리를 찾은 제시가 책들이 빼곡한 서점 안에서 사인회를 하고, 서점 한구석에 서서 그런 그를 지켜보던 셀린느. 그들 뒤로 화면을 가득 채우던 서점의 모습이, 높은 천장까지 다다른 책장에 책으로 빼곡하게 들어찬 서점의 풍경이, 화면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듯한 그 책향기가 참 인상적이었다. 노란 간판의 초록색 문까지. 그것 때문인지 가지런히 꼽힌 책사진의 표지와 '셰익스피어 & 컴퍼니'라는 부제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것도 바로 영화 속에 나오는 서점의 모습이었다.
책제목에 맘이 달떠 표지를 넘기자 책날개에 얹혀진 저자의 이력에 눈길이 간다. 한편의 영화같은 파란만장한 과거가 나의 호기심을 부추겨 재빨리 본문으로 눈길을 돌리자 그의 화려한(?) 지난날들의 면면이 책속에 펼쳐진다. 캐나다 중소도시의 신문사 사회부 기자로 한창 잘나가며 방탕한 생활을 하던 저자 제레미 머서는 어느날 그가 집필했던 범죄 서적에 실명이 실린 것에 분개한 범인으로부터 협박전화를 받는다. 살해 위협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바로 캐나다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무작정 파리로 날아온다. 그러나 그간의 사치스럽고 방탕했던 생활로 인해 그의 수중에 남은 돈은 그를 곧 파리의 노숙자로 만들기 알맞은 액수다.
자신 앞에 놓인 암담한 미래와 현실의 궁핍한 생활이 던져주는 번뇌를 잠시나마 피하고자 센강 주변을 산책하던 그는 갑자기 내린 세찬 비를 피하고자 서점으로 뛰어든다. 바로 파리의 전설적인 고서점 '셰익스피어 & 컴퍼니'로. 붐비는 관광객들 속에서 문고본 책 한 권을 산 그는 뜻밖의 홍차 파티에 초대되고, 그곳에서 서점의 주인에 대한 소개와 함께 뜻밖의 말을 듣게 된다. "이 서점은 안식처 같은 곳이에요. 조지는 여기서 사람들이 공짜로 살게 해주죠. (36쪽)" 그것이 바로 운명의 시작이었다! 곧 노숙자로 내몰릴 위기에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그는 기적처럼 만난 조지의 서점에서 낯선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뜻밖의 행운은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된다.
서점에서 지내는 동안 저자의 삶은 그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책장 사이사이에 위태롭게 놓인 침대에서 자는데 익숙해지고 바퀴벌레가 기어다니는 모습을 봐도 무덤덤해졌다. 씻지 못해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지내기가 일쑤였으며, 공중 목욕탕을 이용하고 싸구려 식당의 음식들로 배를 채웠다. 그 시간동안 육체는 힘들었으나 정신은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워졌다. 비록 짝사랑으로 끝났지만 누군가를 사랑했고, 서점을 스쳐간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겪었으며, 그들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와 삶을 접했다. 암울한 미래와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았으며, 조지를 통해 새로운 삶의 가치를 만났고, 조지 부녀의 만남을 주선함으로써 조지의 행복은 물론 서점의 미래에도 공헌했다. 살인사건이 일어나기를 고대하고 술로 밤을 새고 마약에 손을 댔던 과거보다 겉모습은 비루해졌지만 속은 훨씬 더 깊어졌다.
머물 곳 없는 가난한 작가와 떠돌이에게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서점, 셰익스피어 & 컴퍼니. 고서점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담긴 이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뭐니뭐니해도 바로 서점의 주인이자 시인이며 이상주의자이자 공산주의자인 조지 휘트먼이었다 책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짜로 책을 주고, 갈 곳 없는 가난한 작가들과 떠돌이에게 침실을 제공하며,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새로운 사랑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로맨티스트이고, 이상주의자적 공산주의자로서 끝없는 나눔과 공유의 삶을 몸소 실천하며 살고 있는 조지 휘트먼! 다소 괴팍하고 변덕스럽고 무모하거나 무책임해 보일 때도 있지만,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천진한 면을 잃지 않고 평생동안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책에 대한 변치않는 무한 사랑으로 오랜 세월 서점이자 공동주거지인 그곳을 운영하고 있는 그에게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읽을 줄 모르는 것보다 더 나쁘다. (44쪽, 조지 휘트먼)
: 나를 뜨끔하게 만든 말이자 이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 서점 식구들에게 하루에 책 한 권 읽기를 권한다는 조지의 방침이 바로 그의 이런 생각에서 나온 것이리라.
- '줄 수 있는 것은 주고, 필요한 것은 가져라'. 내가 늘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지. (130쪽, 조지 휘트먼)
: 이상주의적 공산주의자인 조지의 철학이 그대로 묻어나는 말. 그는 이말을 그대로 실천하며 살고 있다.
- 있잖은가, 작가가 되려면 삶을 사랑해야 하네. 그리고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보다 삶을 사랑하기에 좋은 곳은 없지. 여기서는 어떤 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어. 책도 읽을 수 있고 아름다운 여자들도 만날 수 있지. 이런 장소를 충분히 즐기게. 세상에 이런 곳은 흔치 않으니까. (280쪽, 조지 휘트먼)
: 여든이 넘은 나이에 손녀뻘되는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또 이별의 슬픔에 힘들어하는 조지. 어찌보면 바람둥이 늙은이로 보일 수도 있지만 늙어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그는 어떤 면에선 로맨티스트다.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은 인생이 위기에 몰렸던 한 청년이 파리의 고서점 '셰익스피어 & 컴퍼니'와 그 서점의 주인 '조지 휘트먼'을 만나면서 변화 되어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에세이다. 그는 이책에서 낭만적으로 보이는 서점의 겉모습이 아닌, 서점 안의 진풍경들을 담아낸다. 서점 안에서 조지가 만들어낸 하나의 새로운 세계와 그곳을 지키고 있거나 거쳐간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이 벌이는 일련의 사건들과 그것들을 겪으면서 조금씩 성장해가는 자신의 변화까지. 저자 제레미 머서는 솔직하고 담백한 문체로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나간다. 암울한 상황의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면서도 위트를 잃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덮을 때쯤엔 입가에 흐뭇한 미소 한 모금 머금는다.
발을 들이는 순간 시간이 그대로 멈춰버린 것같은 마법의 서점, 셰익스피어 & 컴퍼니. 그곳의 멈춰버린 시간 동안 어떤 이는 삶의 희망을 발견하고, 또 어떤 이는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며, 또 다른 이는 피폐했던 삶의 에너지를 충전한다. 이책의 저자는 이곳에 머무르면서 그동안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되짚어보고 새로운 인생길을 선택했다. 파리의 고서점에 머무는 동안 그를 파리로 내몰았던 과거의 악몽들은 어느새 거짓말처럼 풀렸고, 이제 그는 누군가의 불행을 기다리는 사회부 기자가 아닌 자신의 행복을 노래하는 작가가 되었다. 쫓기듯 파리에 와서 고서점을 만나 인생을 바꿔버린, 그러나 자신의 꿈을 이룬 저자의 삶은 한 편의 영화같다.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삶이란 이렇게 예측불허의 게임이라서 더 재미있고 풍요로운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물론 잘 견뎌낼 경우에만 해당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언젠가 파리에 가게 된다면 주변이 모두 책으로 빼곡하게 둘러싸인 센강 주변의 이 고서점에 들러보고 싶다. 그때도 여전히 수많은 관광객들로 북적거릴 테고 나 또한 그런 관광객 중의 하나로 머물겠지만, 그래도 그 잠깐이나마 마음껏 책의 향기에 취해 보고 싶다. 영화 <비포 선셋>의 제시와 셀린느를 떠올려 보기도 하며, 할 수만 있다면 제레미가 머물렀던 고서실과 도서관 등도 둘러보고 싶다. 그때도 고서실엔 사이먼이 자리잡고 문을 열어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브의 손에 이끌린 저자처럼 나도 마법처럼 홍차 파티에 초대된다면 더 근사하겠지. 전설적인 서점 주인 조지 휘트먼을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딸 실비아가 그 서점을 당당하게 지키고 있을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세상의 시간을 멈추고 자신만의 시간이 흐르는 파리의 고서점, 셰익스피어 & 컴퍼니. 그곳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렌다.
춥고 비 오는 밤
파리에 온다면
셰익스피어 서점을 찾아요
반가운 곳이죠
그 서점 모토는
다정하고 따뜻하죠
변장한 천사일지도 모르니
낯선 이에게 친절하라 (160쪽,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의 공식 노래,라고..)
* 오탈자 (초판1쇄본, 오탈자가 적잖게 보여 아쉬웠다;)
- 71쪽 8째 줄) 그들이미쳤~ → 그들이 미쳤~ (띄워쓰기)
- 40쪽 밑에서 4째 줄) 윌 트 → 월 트 (조지 휘트먼의 아버지인 월트 휘트먼의 이름이 여기만 잘못 나온 듯;)
- 134쪽 13째 줄) 일흔 여섯 → 여든 여섯 (조지의 나이는 일흔이 아닌 여든 여섯임;;)
- 212쪽 밑에서 3째 줄) 나관 → 난관,이 아닐런지;
- 229쪽 밑에서 9째 줄) 어는 순간 → 어느 순간,일 듯;
- 288쪽 밑에서 4째 줄) 힘이들었다 → 힘이 들었다 (띄워쓰기)
- 307쪽 밑에서 4째 줄) 조지는 실비아와 함께한 시간이 없는 것 같았고 → 문맥상 '함께할(or 함께 할)'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