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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촐라체, 이름부터 입에 착착 달라붙는 이곳은 네팔의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한 봉우리란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에베레스트가 있는 곳이라 그런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5천 미터가 넘는 웬만한 높이의 산도 '마운틴(mountain)'이라 부르지 않고 '힐(hill)'이라 부른다고. 숫자만으로는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나는 감도 잡지 못하지만, 문득 높이 3천 미터가 조금 안되는,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가장 높은 백두산을 히말라야 산맥에 가져다놓으면 귀여운 꼬맹이 취급받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슬쩍 웃음이 흘러나왔다.
사실 산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한지라 촐라체라는 지명도 이책을 통해 처음 알게됐다. 히말라야 산맥하면 오직 에베레스트만 떠올리는 단순지식의 소유자인지라 그 안에 존재하는 다른 수많은 봉우리들을 생각도 못한 까닭이다. '촐라체'라는 지명과 함께 또한 박범신 님 작품과의 만남도 이책이 처음이다. 살짝 얼굴이 붉혀지지만 한동안 한국소설, 아니 소설 자체를 거의 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어설픈 변명을 해본다.
한참 손놓았던 소설이라는 장르를 조정래님의 <태백산맥>을 시작으로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 이후론 가능한 다양한 한국문학들을 접하려고 노력중이다. 다행히 요즘 한국문학이 전성기가 다시 도래했다는 말이 들릴 정도로 다양한 연령대의 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내고 있어 무척 반갑다. 걔중에는 실망스러운 작품들도 몇 있긴 하지만 그보단 멋진 작품들이 더 많아 기분이 좋다. 그러다 때때로 내 마음을 흔들어놓는 멋진 책들을 종종 만나기도 하는데, 이책 <촐라체> 또한 그런 책이었다. 깊이있는 무게감에 읽는내내 가슴이 벅차올랐다.
알려졌다시피 <촐라체>는 네이버 블로그에 연재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던 소설이다. 기성작가의 소설이 블로그에 연재되기는 처음이라 그의 새로운 시도에 주변인들의 우려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마다 작가는 자신의 글을 '젊은 독자들에게 읽히고 싶다'라고 대답했다고 하는데, 기존에 그를 잘 몰랐던 나같은 독자들까지 <촐라체>의 매력에 빠져들게 만든 걸 보면 그의 바람은 성공적인 듯 하다(물론 내가 그 '젊은' 독자에 포함된다면 말이다. 아마,, 포함되지 않을까;). 블로그를 통해 좋은 작품을 알게 됐고, 그 인연으로 이책을 읽게 되었기에 그의 새로운 시도가 더욱 고맙게 느껴진다.
하나뿐인 아들을 절에 들여보낸 '나'는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네팔로 계획없는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교생시절 알게 된 제자 상민을 만난다. 상민은 아버지가 다른 그의 동생 영교와 촐라체 북벽을 오를 계획을 이야기하고, 그 인연으로 나는 그들의 베이스 캠프를 맡게 된다. 한겨울 인적없는 촐라체 북벽을 최소한의 장비만 갖춘 채 짧은 기간 내에 오르려는, 위험이 다분한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그들 형제는 산행을 시작하지만, 촐라체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만만하지가 않다.
비교적 순조로웠던 첫날과 달리 산행길은 갈수록 험난해지고,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두 형제의 갈등도 깊어진다. 지친 가운데 상민과 영교는 마침내 촐라체 정상에 오르지만 구름으로 뒤덮힌 정상에서 그 기쁨을 만끽할 겨를도 없이 거친 날씨에 하산을 서두른다. 이제 무사히 내려올 일만 남았는데 그들의 하산길은 녹록치가 않다.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크레바스를 피해 신중하게 빙산을 내려오는 상민 뒤에 영교가 그만 발을 헛디뎌 추락하고, 그와 한 밧줄에 묶여있던 상민까지 위험에 처한다.
촐라체는 그들의 몸을 만신창의로 만들었지만, 그 조난 사건은 오히려 상민과 영교가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다. 아버지가 다른 형제라는 모진 인연이 만들어낸 온갖 오해와 그로 인해 생긴 애증의 거대한 벽을 허물기 시작하자 그속엔 작고 상처입은 영혼의 속살이 드러난다. 서로를 미워했던, 그러나 그만큼 사랑했던 두 형제는 서로의 상처를 향해 뒤늦은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그와 함께 이어지는 극한의 고통스러운 상황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둘은 정신적 자유를 맛본다. 그들로 하여금 현실을 떠나 촐라체 북벽까지 오게 만든 각각의 죄책감, 세상을 향한 분노, 우울한 현실 등 그간 그들을 짓누르던 삶의 조각들을 촐라체에서 모두 벗어던진다. 그렇게 삶에 대한 애증을 온전히 비워버리자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생을 향한 열망이 다시 되살아났다. 그 열망이 촐라체에서 그들을 살려냈다. 상민과 영교에게 있어 촐라체는 삶의 끝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인 셈이다.
클라이머들를 소재로 한 책이라 쉬지않고 등장하는 생소한 산악 전문용어들 덕분에 책을 읽는 처음 얼마간은 엄청 헤맸다. 피켈, 크레바스, 프렌즈 등등 아는 단어라곤 하나도 없으니 그럴 수 밖에. 다행히 뒷부분에 수록된 '등반 용어'를 뒤적이며 도움을 받았지만, 책을 읽다 매번 뒷장을 뒤적이는 게 여간 번거롭지 않았다. 책 읽는 속도도 느려짐은 말이 필요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전문영역을 다룬 소설은 직접 경험하지 못한 낯선 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매력적이다. 더불어 얄팍하게나마 그들의 정서를 공감할 수도 있다는 것도 큰 수확이다. <촐라체>도 그런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소설이었다. 예전엔 목숨걸고 산을 오르는 산악인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상민ㆍ영교와 함께 촐라체 빙벽에서 동거동락하다보니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지금도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산과 산악인을 소재로 한 이야기지만 <촐라체>는 단순히 산악소설에 머물지 않는다. 빙산과 클라이머는 곧 우리의 인생길과 그길을 걷는 각자의 모습으로 치환되고, 작가는 거대한 빙벽을 오르는 두 형제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비춰보인다. 거대한 사회속의 '나'라는 존재에 대한 고민과 번뇌가 나로 하여금 그들을 따라 촐라체에 오르게 만든다.
책의 서문에서 작가는 '문학'이 자신의 영원한 촐라체라고 말한다. 책을 덮으며 그가 이번 촐라체를 훌륭하게 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나의 촐라체는 무엇일까. 목숨을 걸고 산을 오른 그들처럼, 글쓰기에 자신을 건 작가처럼 모든 걸 걸 만큼 지독하게 열망하는 것이 내게 있었던가. 책을 다시 넘겨보며 나의 촐라체를 더듬어본다. 벼랑으로 치닫던 현실에서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 되어준 촐라체처럼 팍팍한 삶에서 나를 지탱해줄 수 있는 나만의 촐라체를 지금이라도 찾아나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