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 - 글 못 쓰는 겁쟁이들을 위한 즐거운 창작 교실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애초부터 소설쓰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책을 잡았던 건 아니다. 시시껄렁한 혼잣말을 끄적대는 것도 힘에 부치는 내가 소설이라니, 무슨 말씀을. 그저 지금 쓰는 잡문 나부랭이나마 제대로 맛깔나게 써보는 것이 나의 소소한 희망사항이다. 이 책, '글 못 쓰는 겁쟁이들을 위한 즐거운 창작 교실'이란다. 글 못 쓰는 겁쟁이, 딱 나네.. 이런 생각이 들자 <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란 다소 뜬금없는 제목도 확~ 땡겨준다. 그래, 연필을 창 삼아 어디 고래나 한 번 잡아 볼까. 이렇게 책을 펼쳤다.

그런데 그저 '글쓰기법'을 알려주는 줄 알았더니 아니다. 저자는 처음부터 '소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 쓸 생각이 없던 나는 어찌하나. 책을 덮어야 하나. 그런데 그러기엔 이 책, 너무 재미있다! 소설책도 아닌 것이, 인문서적이 이렇게 재밌어도 되는 건가(물론 안 될 건 없지만;). 게다가 웃기기까지 한다. 사실 읽는 동안 많이 웃었다. 여태껏 작법관련책을 별로 접해보진 못했지만 이렇게 웃기고 이렇게 재미있는 글쓰기 책은 처음이다. 그래서 소설 쓰는 법을 배울 생각이 전혀 없었음에도 흔쾌히 그를 따라 고래잡는 '소설' 쓰기의 세계로 향했다(내가 생각한 소설과 그가 말하는 '소설'은 조금 다르다. 뒷부분에 언급하련다;). 솔직히 그의 수업을 듣게 된 건 순전히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뒤에 이어질 내용이 궁금해서 도저히 중간에 책을 덮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그럼 어떻게 연필로 고래를 잡을 수 있을까. 저자는 느긋하게, 그러나 치밀하게 계획된 글쓰기의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그의 수업은 여러 면에선 다소 뜬금없어 보이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론 그런 점들이 이책을 더욱 재미있고 특별하게 만들지 않나 싶다. 물론 나처럼 그저 즐기려는 생각이 아닌, 글쓰기에 대한 '실용적인' 어떤 '방법'을 배우고자 이책을 집어든 독자라면 '이게 무슨 글쓰기 법이야? 얼른 글 잘 쓰는 방법이나 가르쳐 달라고!'라며 버럭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런 분들은 이책을 과감히 덮고 시중 의 쏟아져 나오는 실용적 글쓰기 '기술'을 가르쳐주는 책들을 찾아보시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책의 목차는 다소 불친절하다. 큰 덩어리 뿐만 아니라 겐이치로가 던져준 열쇠의 페이지까지 같이 소개해주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독자들에게 일일이 찾아보는 재미를 선사하려고 그런 것은 아니겠지, 설마. 초등학생들의 소설 수업으로 시작된 겐이치로의 글쓰기 수업은 그 시작만큼이나 아주 독특하다. 무엇을 주제로 어떤 방법으로 글을 써야 하는지 미주알고주알 알려주는 다른 작법책과 달리 그는 소설 쓰기에 앞서 가장 먼저 할 일로 아무 것도 시작하지 않은 상태를 충분히, 마음껏, 실컷 즐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섣불리 글을 시작하지 말고 글과 상관없는 전혀 다른 것들을 떠올리며 고래 다리가 몇 개인지 조사하라고 귀뜸해준다.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그러나 그가 던져주는 열쇠들을 하나하나 받다보면 어느새 그의 황당무계한 글쓰기법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에리히 캐스트너의 이야기를 빌려 겐이치로는 이야기란 쓰는 게 아니라 붙잡는 거라고 말한다.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볼 때 당신 앞에 나타나는 이야기, 그것을 붙잡으면 바로 당신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를 떠도는 이야기는 흠씬 얻어맞은 개와 같아서 섣불리 다가가면 도망쳐 버리기 일쑤다. 반짝 떠오른 아이디어가 금새 사라져버리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성급히 말을 걸거나 다가가기 보다는 그저 즐겁게 놀아주라고 한다. 잘 하겠다는 의무감을 던지고 즐겁게 놀아주라고. 그러면 그 '얻어맞은 개'도 조금씩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라고.

이야기를 붙잡았다면 이제는 날아오는 공을 받아보자. 세상의 온갖 이야기들이 공이 되어 우리에게 날아온다. 이책에서 저자가 던져준 공 중에는 다소 난해하거나 충격적인 것들도 있었다(몇몇은 행여 어린애들이 볼까 겁나던;). 그 공을 받느냐, 피하느냐는 당신의 몫이다. 그러나 다양한 공들을 보다 정확히 붙잡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넓은 시야와 안목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충분한 연습을 통해 날아오는 다양한 공들을 정확히 잡을 수 있게 된다면 이제 그것들을 흉내내어 보자. 아기가 엄마의 말을 흉내내듯 다양한 공들을 흉내내다 보면 어느새 성큼 성장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살아있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보자, 살짝 즐거운 거짓말도 뿌리면서.


처음에 나는 소설을 쓰기 위해 이책을 읽은 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모든 수업이 끝난 후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이렇게 말한다. 이책에서 가르쳐준 '소설'은 우리가 생각하는 소설이 아니라 그보다 더 넓은 범위의 언어 덩어리라고. 소설의 원천이 되는 것이 바로 '소설'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나는 이책을 제대로 집어든 셈이다. 이책은 일반적인 소설 뿐만 아니라 저자가 말하는 '소설' 쓰는 법이 함께 포함된 책이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했 듯이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이책을 통해 글쓰기에 대한 기술을 전해주진 않는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본질적인 것, 즉 글쓰기에 임하는 기본적인 자세와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보처럼 세상을 세세히 관찰하고, 바닥에 누워 세상을 바라보다 이야기를 붙잡은 캐스트너처럼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잘 하려는 의욕보다 글쓰기 자체를 즐기라고 조언한다. 다양한 공(이야기)들을 붙잡아 안목을 넓히고, 그것들을 흉내내어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켜 가다보면 어느새 자신의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거라고, 그땐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를 붙잡아 쓰라고 이 재미있는 괴짜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가르쳐준다.


이것도 글이라고, 몇 자 끄적이는 게 힘들 때마다 새삼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은 분들에 대한 존경심이 불쑥불쑥 솟곤 한다. 이책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이렇게 유쾌하고, 재미있게, 그리고 제대로 글을 써낸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참말로 존경스러웠다. 그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이책은 그와의 첫만남인데, 단 한 권으로 이 괴짜 작가님에게 반해버렸다. 그의 소설들은 또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모르겠지만, 조만간 제목으로만 무수히 들어왔던 그의 <우아하고 감성적인 일본야구>라는 공을 붙잡아보려 한다. 나는 과연 그 공을 붙잡아서 흉내까지 낼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일단 날아오는 공을 피하지는 않으련다.




- 날아오는 수많은 공 속에서 당신의 인연을 찾아주십시오. 좋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을 찾아주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흉내 내 주십시오. 몇 번이고 수없이 읽어주십시오. 읽고 또 읽고 그렇게 베껴 써주십시오. 거듭 거듭 베껴 썼다면 그 다음은 그 문장으로, 그것을 쓴 사람의 시선으로 이 세계를 바라보십시오. 그것을 쓴 사람의 감각으로 이 세계를 걷고 만져주십시오. 만일 그것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타인의 감각이며 시선이 조금씩 당신의 내면에 흡수되고, 자신의 감각이나 시선과 뒤섞여 새로운 감각과 시선으로 변화해 갈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식물처럼 이윽고 시들어 갈 것입니다. 하지만 시든 식물은 그저 죽는 것이 아닙니다. 분해되어 무수한 구성요소로 변해 땅의 깊숙한 안쪽에 스며들어 다른 생물에 흡수되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것니다. (132~3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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