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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 1 - 투사편, 인간의 운명을 가를 무섭고도 아름다운 괴수 ㅣ 판타 빌리지
우에하시 나호코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판타지 소설의 재미에 제대로 빠져들게 했던 <테메레르> 이후 또 한 편의 멋진 판타지 소설을 만났다. 이번엔 동양 판타지다. 일본소설에 한창 빠져들던 시절에도 본격적인 판타지 소설은 거의 접해보지 못했었기에 우에하시 나호코의 판타지 소설 <야수>를 처음 만났을 때는 솔직히 조금 생경했다. 일본식 판타지 소설이라.. 혼자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문득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지브리 애니메이션들이 떠올랐다. 그래, 지브리의 애니가 있었구나! 미야자키의 애니들은 항상 익숙한 현실을 넘어 신기한 판타지의 세계를 펼쳐 보이지 않는가. 그간 보아왔던 지브리의 애니들이 떠오르자 갑자기 이책 <야수>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신들의 나라에서 건너와 신성한 피를 가졌다는 요제의 딸들이 다스리는 나라, 료자 신성왕국. 신으로 칭송받는 '요제'는 온전히 백성들의 존경심을 바탕으로 한 왕권을 갖고 있고, 요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가신 대공 아르한은 '투사' 부대로 형성된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신성왕국을 수호하며 실질적인 군권을 행사한다. 분리되었지만 적절하게 유지되는 왕권과 군권의 균형은 신성왕국에는 평화로운 시대를 이어나간다. 그러나 아르한의 군사력이 갈수록 강성해지고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자객 무리가 요제를 시해하려는 일이 잦아지면서 요제와 아르한 사이에는 서로를 향한 경계와 미묘한 갈등이 싹트기 시작한다.
대공령의 투사지기 마을. 어린 소녀 에린은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다. 녹색의 눈동자를 가진 엄마 소욘은 아료(안개의 백성) 출신이라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천시 받지만 뛰어난 의학지식으로 최강의 투사 '엄니'를 관리하는 투사지기로 일하고 에린은 그런 엄마를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날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소욘의 '엄니'들이 이유로 모른 채 한꺼번에 몰살당하고, 투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죄로 소욘은 사형에 처해진다. 사형이 집행된 엄마를 구하기 위해 에린은 강속으로 뛰어들고, 소욘은 망설임 끝에 목숨과도 같던 아료의 계율을 깨고 손가락 피리를 불어 에린을 구한다.
강가에 쓰러져있던 에린은 우연히 벌치는 노인 조운에게 발견되어 그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다. 나이답지 않게 성숙하고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에 예민한 감수성을 보이는 에린의 남다른 재능을 눈여겨 본 조운은 에린에게 이것저것 가르치기 시작하고 에린은 스펀지처럼 그 지식들을 왕성하게 흡수해간다. 어느날 귀한 약초를 캐려고 벼랑으로 향하는 조운이 걱정된 에린은 몰래 그를 따르고 낙마 사고가 일어난 조운을 돕는 동안 우연히 야생 왕수와 그것이 투사를 향해 내지르는, 엄마의 손가락 피리와 닮은 소리와 그 소리에 반응해 경직된 투사의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거대한 야생 왕수의 아름답고 신비한 모습에 매료당한 에린은 그 이후 틈만 나면 벼랑으로 찾아가 야생 왕수와 새끼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것은 훗날 에린이 리란을 통해 운명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엄마를 잃은 채 홀로 남겨졌다는 공통점을 가진 왕수 리란을 만난 에린은 생명을 가진 것들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바탕으로 리란과 대면한다. 정해진 왕수사육법이 아닌 진심을 담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리란을 대했고 그 결과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인간에게 절대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새끼 왕수 리란과 교감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사람과 동물이 다르듯 에린과 리란의 사이가 항상 순탄하지는 않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며 통제되지 않는 리란을 보며 에린은 좌절과 체념을 경험하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리란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에린의 마음에 화답하듯 리란은 커다란 날개를 움직이며 에린에게 날아온다. 마지막 그 장면에서 가슴 한 켠을 찡해지며 괜시리 눈물이 났다. 벅찬 감동의 열쇠, 그것은 바로 진심인 것이다.
우에하시 나호코의 <야수>는 가상의 무대인 신성 료자왕국과 가상의 생물 야생 왕수와 투사가 전체 이야기를 차지하는
판타지 소설이다. 왕권을 향한 음모와 갈등, 가공할만한 위력을 지닌 상상의 동물들을 이용한 전투, 왕수와 투사를 순식간에 경직시키는 무성피리라는 독특한 아이템, 다양한 인물들의 등장과 그들 사이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 등 <야수>는 판타지 소설의 거의 모든 흥미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잘 버무린 대작이다. 또한 <야수>는 한 편의 훌륭한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연약한 소녀였던 에린은 조운과 에살의 도움속에 여러 역경을 슬기롭게 이겨나가고, 리란과 동고동락을 통해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끼며 한층 성숙해져 간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동안 요제와 아료가 지키려고 했던 봉인을 뜻하지 않게 풀어 혼란이 일어날 때에도 새로운 세상을 향한 올바른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
우에하시 나호코는 <야수>의 '에린(인간)과 리란(야수)'의 관계를 통해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잘못된 태도를 꼬집고,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의 '교감과 소통'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왕수나 투사를 왕권과 군권의 상징으로 삼아 서로의 권력에 이용하거나, 야수들을 무성피리로 경직시켜 지배하는 행위는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의 일방적 의사전달이다. 거기에 교감이나 소통 따위는 없다. 그러나 인간을 우월한 위치에 있게 해주는 무성피리를 거부하고, 야수를 인간의 소유물이 아닌 하나의 생명체로 존중함으로써 그들을 가로막고 있던 벽을 허물고 소통에 성공한다. 작가는 이런 에린의 모습을 통해 '일방적 명령'이 아닌 '쌍방향적 소통'이야말로 자연을 대하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임을 넌지시 알려준다.
책을 읽는 동안 꿈을 꾸는 듯한, 머리속에서 상영되는 스펙터클한 영화를 한 편 감상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작품과 비교되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명작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본지 너무 오래되어 내용도 희미하고, <원령공주>는 아직 보질 못한지라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야수> 또한 그것들 못지 않은 대작 판타지라 생각된다. 너무나 매력적인 구석이 많은 판타지 소설이라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듯 한데, 블록버스터 영화도 나쁘지 않지만 그것보다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이책의 매력을 더 잘 살려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인간과 자연을 아우르는 거대한 스케일과 그속을 채우는 등장인물의 섬세한 내적 심리묘사가 매력적인 소설, <야수>. '단연 최고의 동양 판타지다!'라는 띠지의 문구가 부끄럽지 않은, 올여름에 만난 최고의 판타지로 꼽을 만한 멋진 소설이었다.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더구나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면 후회없는 선택이 될 듯 하다.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