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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시집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5월 5일 어린이날 그 즐거운 날에 우연히 집어든 신문에서 박경리 님의 타계 소식을 접했다. 오늘이 만우절인가,라는 생각을 할 만큼 정말 놀랐었다. 얼마전 건강이 악화되어 의식을 찾지 못한 채 중환자실에 계시다는 소식을 접하긴 했지만 그래도 곧 훌훌털고 일어나시리라 믿었다. 꼭 그래주시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녀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벗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후 박경리 님의 미발표 신작시들을 모은 유고시집이 출간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서야 처음 알았다. 박경리 님이 시를 쓰셨구나. 생의 마지막에 선 그녀의 노래는 과연 어떤 것들일까. 궁금해졌다. 시집을 그리 즐기진 않지만, 시와 그리 친하진 않지만 왠지 이 시집만은 꼭 읽고 싶어졌다. 故 박경리 님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그렇게 내 손에 왔다.
시집에는 생전에 발표하신 3편의 시(까치설, 어머니, 옛날의 그집)와 미발표 신작시 36편, 총 39편의 시가 실려있다. 서른 아홉 개의 노래가 담긴 이책은 작고 얇지만 물리적 무게로는 표현할 수 없는 '박경리'라는 이름의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는 시집 제목이나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남몰래 시를 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라는 띠지의 문장은 시를 읽기 전부터 마음을 아릿하게 만든다.
이책의 시들은 '시'라기 보다는 '에세이'에 가깝다. 박경리 님은 시의 형식을 빌어 군더더기 없는 언어로 자신이 걸어온 인생길을 담담하게 노래한다. 은유나 상징, 비유같은 기교를 배제한 시는 하얀 고무신을 신고 고추밭 사이를 다니며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사진속 박경리 님의 모습처럼 꾸밈없이 소박하다. 그녀는 그런 담백함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듯 시를 읊는다. 시어 곳곳에 그녀의 삶이 배어있다.
시집은 네 개의 꼭지로 엮여있는데, 「옛날의 그 집」에는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에 대한 마음을, 「가을」은 자연을 향한 존경을, 「까치설」은 사회를 향한 시선을 담은 시들로 채워져있다.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하듯 들려주는 시 한 수 한 수가 모두 가슴을 울렸다. 많은 눈물을 흘렸던 청춘이지만 지나고 보니 그 시절이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는 첫 시부터 가슴이 찌릿했고,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은 깊은 감동을 남겼다. 어머니와 할머니에 대한 시들은 지금 곁에 계신 나의 어머니를 비롯해 '우리 시대의 어머니'를 생각해보게 했고, 잘못 돌아가는 사회에 날리는 쓴소리는 지금 우리의 삶을 되짚어보게 만들었다.
이책에 담긴 서른 아홉 편의 시들은 모두 그녀 자신의 이야기다. 그녀는 시라는 형식을 빌어 자신이 살아온 순탄치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던 삶의 이야기를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들려준다. 길고 길었던 지난날들이 시를 통해 다시 되살아난다. 빛나는 진심이 담긴 시들은 그래서 더욱 진한 감동을 남긴다. 생의 마지막까지 펜을 들고 글을 쓰고 시를 지었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라 시집을 읽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저려왔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고 말하던 박경리 선생님, 부디 그곳에서는 아픔없이 행복함으로 가득찬 나날을 보내길 바라본다.
참, 시집 사이사이에 수록된 김덕용 님의 그림은 시와 잘 어울어져 글의 느낌을 잘 살려낸다. 따뜻함이 가득한 그림들, 그림 자체만으로도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