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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두 얼굴 - 무엇이 보통 사람을 영웅으로 만드는가?
김지승 외 지음 / 지식채널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2003년, 온 국민을 경악과 슬픔으로 빠뜨렸던 대구 지하철 참사가 발생했다. 한 사람의 잘못된 행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고 유가족은 헤어날 수 없는 슬픔에 빠졌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참사 당시의 상황이 전해졌고, 참사 직전 지하철 내부의 모습을 찍은 사진도 공개됐다. 그런데 뭔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있었다. 불이 난 후 지옥같은 상황이 연출되기 전까지 10분 간의 시간이 있었다. 곧 출발한다는 안내방송이 있긴 했지만 사진을 보면 시커먼 연기가 스며들어 지하철 내부는 온통 뿌옇다. 누구나 당황하며 의구심을 품을 만한 상황이다. 그러나 사진속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다. 그들은 왜 지하철에서 탈출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렇게 있었을까?
그점에 의문을 품은 EBS 다큐 제작진은 모의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 참가자들이 있는 방 안에 가짜 연기를 흘려보내 대구 지하철 참사와 비슷한 상황을 재연한 뒤 반응을 살폈다. 결과는 놀라웠다. 10분이 지나도록 방을 나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 실험은 4명의 사전 공모자와 1명의 피실험자로 진행됐다. 사전 공모자들은 가짜 연기에도 움직이지 말라는 지시를 미리 받았다. 실험이 시작되고 방 안에 가짜 연기가 스며들자 피실험자들은 당황해 하며 하나같이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먼저 살폈다. 그리고 주변인들이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걸 확인하자 자신도 그냥 자리를 지켰다. 실험이 끝난 후 왜 밖으로 나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피실험자들은 방 안의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누군가와의 관계를 형성하고 사는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나 상황 속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그속에서 '상황의 힘'이 발생한다. 위의 실험을 통해 불확실한 상황에 부딪칠 때 사람들은 함께 있는 주변인들의 반응을 먼저 살피고, 대부분 다수의 반응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의문도 같은 맥락에서 해결된다. 지하철 내부의 뿌연 연기에 당황한 사람들도 모의 실험의 피실험자들처럼 주변인들의 반응에 동조했던 것이다. 결과를 모른 채 내가 그 상황에 던져졌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과연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 많은 이들이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떤 상황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상황의 힘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크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탠포드 대학의 가짜 교도소 실험과 함께 위의 실험이 특정 상황의 힘을 보여준다면,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에 대한 맹종에 관한 실험이나 패스트푸드점 사기 사건은 권위가 만들어내는 상황의 힘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또한 너무나 확실한 답이 보임에도 집단 전체가 오답을 말하면 정답을 말하기 전에 집단의 눈치를 보거나 집단의 답을 따라가는 제작진의 실험은 집단 사고의 함정을, 목격자가 너무 많아 죽음에 이르러야 했던 제노비스 살인 사건은 어떤 상황을 목격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책임감이 분산되어 도움을 받기 힘들어진다는 방관의 비극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나 인간이 항상 상황의 힘에 지배되는 것은 아니다. 때론 인간이 상황을 지배하기도 한다. 참사 당시 같은 상황에서도 주변 사람들의 행동에 동조하지 않고 지하철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목숨을 구했다.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사람에게 몸을 날려 구한 지하철 영웅은 위험에 처한 사람을 방관하는 다수의 상황을 깨고 들어갔다. 열차와 승강장 사이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역에 있던 사람들이 다같이 힘을 모아 전동차를 밀어낸 것도, 상황을 깬 누군가와 힘을 보탠 동조자들로 인해 방관이라는 기존의 이기적인 상황에서 도움을 주려는 이타적인 상황으로 전환되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은 모두 상황의 힘을 넘어 새로운 상황을 만들었고 기적을 이뤘다.
이들을 통해 상황을 만드는 것도 인간이고, 그 상황을 다르게 변화시키는 것 또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곧 상황인 것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상황의 힘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 힘을 합쳐 전동차를 밀어내고 사람을 구한 것처럼 말이다. 쓰레기를 몰래 버리던 골목에 꽃이 핀 작은 화단을 조성하자 골목길이 깨끗해진 것처럼 그 전환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것인 경우가 많다. 타인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판단에 충실할 때 상황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상황에 지배되느냐, 상황을 지배하느냐는 인간의 선택에 달려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전혀 다른 방향을 연출할 수 있다.
<두 얼굴의 인간(지식채널,2009)>는 EBS 다큐 프라임에서 방영되었던 다큐멘터리 <두 얼굴의 인간>을 바탕으로 구성된 책이다. 제작진은 2003년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2007년 버지니아텍 조승희 총기 난사 사건, 군대 및 체대 폭력 사태, 학내 왕따 등의 사건이 가지는 특정 상황에 주목하고, 그 사건들을 개개인의 윤리나 도덕이 아닌 특정한 상황에 놓일 때 반응하는 인간의 심리로 접근하여 풀어나간다. 살아가면서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어', '너도 그 상황이 되어봐' 등의 말을 수시로 하면서도 상황이 뿜어내는 힘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이책의 내용은 신선하면서도 흥미진진했다.
웬만한 심리학 서적에는 대부분 인용되는 유명한 심리학 실험들이 이책에도 예시로 쓰이지만, 다큐 제작진은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만나는 다양한 선택의 상황을 연출해 낸다. 그리고 거기에 반응하는 참가자들의 행동을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두 가지 얼굴, 즉 상황에 지배되는 얼굴과 상황을 지배하는 얼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라며 함께 고민하기도 하고, 우리를 지배하는 상황의 힘을 넘어서는 방법 등을 재차 읽기도 했다. 특히 선행 바이러스가 보여주는 놀라운 변화는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책의 기본 바탕이 되었던 EBS 다큐 프라임에서 방영되었던 <두 얼굴의 인간> 1~3부는 보지 못했지만 책으로나마 그 내용을 접할 수 있어 무척이나 즐거웠다. 제작진의 맺음말을 보면 <두 얼굴의 인간> 시즌 2로 4~6부가 제작중이라고 되어 있다. 시즌 2는 꼭 챙겨보리라는 다짐했는데 4월 말에 방영된 시즌2를 또 놓쳐버렸다. 다행히 재방송으로 다시 봤는데 시즌1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갖고 있지만 잘 몰랐던 인간의 두 얼굴을 잘 보여준 수작이었다. 인간과 상황에 대한 관계, 또는 심리학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이책이 즐거운 책읽기를 할 좋은 벗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