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두 얼굴 - 무엇이 보통 사람을 영웅으로 만드는가?
김지승 외 지음 / 지식채널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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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03년, 온 국민을 경악과 슬픔으로 빠뜨렸던 대구 지하철 참사가 발생했다. 한 사람의 잘못된 행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고 유가족은 헤어날 수 없는 슬픔에 빠졌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참사 당시의 상황이 전해졌고, 참사 직전 지하철 내부의 모습을 찍은 사진도 공개됐다. 그런데 뭔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있었다. 불이 난 후 지옥같은 상황이 연출되기 전까지 10분 간의 시간이 있었다. 곧 출발한다는 안내방송이 있긴 했지만 사진을 보면 시커먼 연기가 스며들어 지하철 내부는 온통 뿌옇다. 누구나 당황하며 의구심을 품을 만한 상황이다. 그러나 사진속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다. 그들은 왜 지하철에서 탈출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렇게 있었을까?

그점에 의문을 품은 EBS 다큐 제작진은 모의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 참가자들이 있는 방 안에 가짜 연기를 흘려보내 대구 지하철 참사와 비슷한 상황을 재연한 뒤 반응을 살폈다. 결과는 놀라웠다. 10분이 지나도록 방을 나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 실험은 4명의 사전 공모자와 1명의 피실험자로 진행됐다. 사전 공모자들은 가짜 연기에도 움직이지 말라는 지시를 미리 받았다. 실험이 시작되고 방 안에 가짜 연기가 스며들자 피실험자들은 당황해 하며 하나같이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먼저 살폈다. 그리고 주변인들이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걸 확인하자 자신도 그냥 자리를 지켰다. 실험이 끝난 후 왜 밖으로 나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피실험자들은 방 안의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누군가와의 관계를 형성하고 사는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나 상황 속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그속에서 '상황의 힘'이 발생한다. 위의 실험을 통해 불확실한 상황에 부딪칠 때 사람들은 함께 있는 주변인들의 반응을 먼저 살피고, 대부분 다수의 반응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의문도 같은 맥락에서 해결된다. 지하철 내부의 뿌연 연기에 당황한 사람들도 모의 실험의 피실험자들처럼 주변인들의 반응에 동조했던 것이다. 결과를 모른 채 내가 그 상황에 던져졌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과연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 많은 이들이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떤 상황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상황의 힘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크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탠포드 대학의 가짜 교도소 실험과 함께 위의 실험이 특정 상황의 힘을 보여준다면,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에 대한 맹종에 관한 실험이나 패스트푸드점 사기 사건은 권위가 만들어내는 상황의 힘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또한 너무나 확실한 답이 보임에도 집단 전체가 오답을 말하면 정답을 말하기 전에 집단의 눈치를 보거나 집단의 답을 따라가는 제작진의 실험은 집단 사고의 함정을, 목격자가 너무 많아 죽음에 이르러야 했던 제노비스 살인 사건은 어떤 상황을 목격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책임감이 분산되어 도움을 받기 힘들어진다는 방관의 비극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나 인간이 항상 상황의 힘에 지배되는 것은 아니다. 때론 인간이 상황을 지배하기도 한다. 참사 당시 같은 상황에서도 주변 사람들의 행동에 동조하지 않고 지하철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목숨을 구했다.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사람에게 몸을 날려 구한 지하철 영웅은 위험에 처한 사람을 방관하는 다수의 상황을 깨고 들어갔다. 열차와 승강장 사이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역에 있던 사람들이 다같이 힘을 모아 전동차를 밀어낸 것도, 상황을 깬 누군가와 힘을 보탠 동조자들로 인해 방관이라는 기존의 이기적인 상황에서 도움을 주려는 이타적인 상황으로 전환되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은 모두 상황의 힘을 넘어 새로운 상황을 만들었고 기적을 이뤘다.

이들을 통해 상황을 만드는 것도 인간이고, 그 상황을 다르게 변화시키는 것 또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곧 상황인 것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상황의 힘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 힘을 합쳐 전동차를 밀어내고 사람을 구한 것처럼 말이다. 쓰레기를 몰래 버리던 골목에 꽃이 핀 작은 화단을 조성하자 골목길이 깨끗해진 것처럼 그 전환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것인 경우가 많다. 타인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판단에 충실할 때 상황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상황에 지배되느냐, 상황을 지배하느냐는 인간의 선택에 달려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전혀 다른 방향을 연출할 수 있다.


<두 얼굴의 인간(지식채널,2009)>는 EBS 다큐 프라임에서 방영되었던 다큐멘터리 <두 얼굴의 인간>을 바탕으로 구성된 책이다. 제작진은 2003년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2007년 버지니아텍 조승희 총기 난사 사건, 군대 및 체대 폭력 사태, 학내 왕따 등의 사건이 가지는 특정 상황에 주목하고, 그 사건들을 개개인의 윤리나 도덕이 아닌 특정한 상황에 놓일 때 반응하는 인간의 심리로 접근하여 풀어나간다. 살아가면서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어', '너도 그 상황이 되어봐' 등의 말을 수시로 하면서도 상황이 뿜어내는 힘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이책의 내용은 신선하면서도 흥미진진했다.

웬만한 심리학 서적에는 대부분 인용되는 유명한 심리학 실험들이 이책에도 예시로 쓰이지만, 다큐 제작진은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만나는 다양한 선택의 상황을 연출해 낸다. 그리고 거기에 반응하는 참가자들의 행동을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두 가지 얼굴, 즉 상황에 지배되는 얼굴과 상황을 지배하는 얼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라며 함께 고민하기도 하고, 우리를 지배하는 상황의 힘을 넘어서는 방법 등을 재차 읽기도 했다. 특히 선행 바이러스가 보여주는 놀라운 변화는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책의 기본 바탕이 되었던 EBS 다큐 프라임에서 방영되었던 <두 얼굴의 인간> 1~3부는 보지 못했지만 책으로나마 그 내용을 접할 수 있어 무척이나 즐거웠다. 제작진의 맺음말을 보면 <두 얼굴의 인간> 시즌 2로 4~6부가 제작중이라고 되어 있다. 시즌 2는 꼭 챙겨보리라는 다짐했는데 4월 말에 방영된 시즌2를 또 놓쳐버렸다. 다행히 재방송으로 다시 봤는데 시즌1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갖고 있지만 잘 몰랐던 인간의 두 얼굴을 잘 보여준 수작이었다. 인간과 상황에 대한 관계, 또는 심리학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이책이 즐거운 책읽기를 할 좋은 벗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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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의 유쾌하게 사는 법
마크 트웨인 지음, 린 살라모 외 엮음, 유슬기 옮김 / 막내집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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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크 트웨인의 유쾌하게 사는 법 | 마크 트웨인 | 
린 살라모, 마이클 B. 프랭크, 빅터 피셔 (엮음) | 유슬기 (옮김) | 막내집게 | 2009년 4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사주신 동화 전집을 통해 <톰 소여의 모험>을 처음 읽었다. 어린 마음에 너무 재미있어서 보고 또 봤던 기억이 난다. 나중엔 책장이 너덜너덜해질 정도였다. 비록 지금은 그 내용마저 가물거리지만.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왕자와 거지>도 재미있게 읽었다. 티비에서 방영되었던 영화나 만화도 봤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최근에서야 알았다. 그책들의 저자가 바로 미국의 대 문호 마크 트웨인이라는 것을.

학교에 입학해 친구들과 어울려 뛰어다니며 놀기 시작하면서 책 읽는 시간이 점점 더 줄어들었다. 머리가 굵어졌을 땐 어린이 동화는 애들이나 읽는 거라는 무식한 편견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런 이유로 이제껏 읽은 마크 트웨인의 작품이라고는 꼬맹이 때 동화 전집에 포함되어 있던 내용을 간추려 놓은 어린이용 책들이 전부다. 그나마도 이젠 내용이 가물가물하니, 안 읽은 것보다는 낫다고 말할 입장도 못 된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살며시 붉어진다.

이렇게 나는 마크 트웨인에 대한 명성은 익히 들어왔으나 정작 그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다. 얼마전 구입한 <톰 소여의 모험>을 읽기에 앞서 가벼운 마음으로 그를 만나보고자 고른 책이 바로 <마크 트웨인의 유쾌하게 사는 법(막내집게, 2009)>이다. 유쾌하기는커녕 우울함의 연속인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라 유쾌하게 사는 방법에 대한 어떤 비법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전혀 안 들었다고는 말 못하겠다. 물론 이책은 어떤 '방법'을 알려주는 실용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주절대는 에세이지만. ;)

<마크 트웨인의 유쾌하게 사는 법>은 '미국 현대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크 트웨인의 사적인 편지와 자전적인 글, 연설문과 소설은 물론 미발표된 원고 등에서 여러 가지 일화와 기발한 제안, 격언, 훈계 등에 대한 내용의 글들을 발췌해 엮은 책이다. 다양한 출처 만큼 도덕, 건강, 옷, 음식, 육아 등 다루는 분야 또한 폭넓다. 그러다 보니 이책에 실린 글들의 성격을 딱 꼬집어 하나로 규정하기는 힘들다. 뭉뚱그려 표현하자면 마크 트웨인의 잡식성 산문 발췌집 정도라고 할 수 있으려나. 

몇 줄 안 되는 짤막한 글이 있는가 하면 몇 장에 걸쳐 이어지는 장문의 글도 있다. 전문이 실린 경우도 있지만 부분만 소개된 것도 있다. 분야도 출처도 길이도 제각각 다르지만 모든 글에서 마크 트웨인 특유의 재치와 익살을 엿볼 수 있었다. 솔직히 여기저기서 발체한 글들을 모은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처음엔 조금 시큰둥했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점점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여러 가지 잡다하고 소소한 글들을 통해 마크 트웨인을 조금씩 알아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계속되는 불경기에 팍팍한 삶을 살다보니 점점 웃을 일이 줄어든다. 이런 상황에서 '유쾌하게 살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마크 트웨인은 이책에 실린 다양한 글들을 통해 우리의 삶을 유쾌하게 만드는 건 생각보다 그리 어렵거나 거창한 건 아니라고 말한다. 때론 진지하고 때때로 황당하며 수시로 재기발랄해 삐죽이 웃음을 짓게 만드는 글들을 통해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유쾌하게 사는 방법이라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가짐이라고 말이다.









☞ 막내집게 4총사 합체!!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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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의 행진
오가와 요코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수첩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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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그해엔 무슨 일들이 있었을까. 일본에선 <설국>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자살해 의문을 남겼고, 독일에선 뮌헨 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선수촌에 무장단체가 습격해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으며, 전세계가 세기의 우주쇼인 거대한 유성우 지아코비니의 출연을 기다리며 흥분했다가 실망했다. 

1972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전문학교에 들어가면서 토모코는 이모네 집에 거처를 옮기게 된다. 자신을 마중나온 이국적인 외모의 미남 이모부부터 벤츠 자동차, 으리으리한 대저택, 정원 동물원의 짧은 다리와 터질듯한 엉덩이를 가진 피그미하마 포치코까지 부자 이모집은 토모코에게 놀라움의 연속이다. 더불어 귀여운 독일인 할머니, 부지런한 가정부 고메다 씨,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하는 정원사 고바야시 씨, 눈부신 외모만큼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이모부, 멋진 환경에 있지만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이모, 스위스에서 유학중인 매력적인 사촌오빠 류이치, 천식으로 힘들어하는 사촌동생 미나 등 개성 뚜렷한 가족들의 모습까지..

아름다운 얼굴에 부서질 듯 약한 몸을 가진 사촌 미나는 특이한 모양의 성냥갑을 모으고, 성냥갑의 그림에 맞춰 이야기 짓기를 즐기며, 자신을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포치코를 사랑하고, 책읽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매주 수요일 프레시 한 상자와 함께 독특한 성냥갑을 전해주는 '수요일의 청년'을 짝사랑한다. 반면 평범한 외모의 토모코는 책보다는 뛰어놀기를 좋아하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알며, 잘 생긴 남자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사춘기 소녀다. 그리고 미나의 부탁으로 도서관에 책 심부름을 다니면서 그 또래의 소녀들이 그러하듯 잘 생긴 도서관 사서 '자라목 청년'에게 연정을 품게 된다. 다른 듯 비슷한 미나와 토모코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사춘기의 여러 감정들을 공유한다.


1972년에서 1973년 사이, 그해에 두 소녀에겐 무슨 일이 있었을까. 토모코가 미나의 집으로 왔고, 평생동안 잊지 못할 친구가 되었으며, 둘 만의 빛나는 추억을 만들었다. 그리고 각각 첫사랑의 두근거림이 찾아왔다. 매력적인 이모부는 여전히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유학중인 류이치가 잠시 다녀갔다. 우연찮게 토모코는 이모부의 비밀을 알아내고 사라졌던 이모부가 다시 나타난다. 로자 할머니가 지휘한 마지막 크리스마스 밤을 행복하게 보냈고, 그날 밤 집근처 산에서 산불이 났으며, 소동이 일어났던 사이 포치코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미나는 처음으로 포치코 없이 자신의 발로 걸어서 학교를 갔고, 토모코는 다시 엄마가 있는 곳으로 떠났다. 두 소녀는 그렇게 헤어졌다.

우리들은 자라면서 크든 작든 여러가지 일련의 사건들을 겪게 되고 그것들을 계기로 조금씩 내면의 성장을 경험한다. 위의 일들이 일어났던 한 해 동안 두 소녀들도 그러했다. 유리관 속 공주 같았던 미나는 짝사랑했던 수요일의 청년이 회사를 그만두면서 사랑의 아픔을 겪었고, 피그미하마 포치코의 죽음으로 세상의 도전을 받는다. 자신을 태워다녔던 하마 포치코가 미나를 보호하던 유리관 속 세계였다면, 처음으로 자신의 발로 걸어가는 등굣길은 유리관 밖의 험난한 세상이다. 앞으로 미나가 맞닥뜨려야 할 현실이다. 그래서 작은 발을 옮겨 세상으로 한 걸음씩 내딛는 미나의 행진은 힘겹지만 당당하다.

- 미나는 초등학교를 향해 자기 발로 걷기 시작했다. 오로지 자기 혼자 하는 행진이었다. 그 작은 등이 언덕길을 내려가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미나를 지켜보았다. (377쪽)


<미나의 행진>은 삶의 가장 중요한 한 때를 함께 한 사춘기 두 소녀의 우정과 내면의 성숙을 따뜻한 시선으로 들려주는 성장 소설이다. 어른이 된 토모코가 어린 시절 미나와 자신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가족이자 친구였으며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소울 메이트였던 그녀들이 함께한 보석같은 시간들을 추억하기에 애잔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더불어 사춘기 소녀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과 그네들이 느꼈던 다양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오가와 요코의 문체는 조용하고 차분하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이런 느낌 정말 좋다! 더불어 전체를 아우르는 꾸미지 않은 담담한 시선 또한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이야기는 단순한 듯 하지만 아주 빈틈없이 잘 짜여져있다. 특히 이모부의 정체를 파악하는 과정은 한 편의 미스터리물처럼 흥미롭다. (처음 이모부의 부재가 길어지는 동안 나는 혼자서 온갖 시나리오를 다 짜냈다. 이모부의 재출연에 모든 가능성이 녹아버리긴 했지만) 빈틈없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며 진행되는 이야기와 각각의 사건들을 통해 성숙해가는 미나와 토모코의 모습을 보며 나도 한 뼘쯤 성장한 기분이 들었다.


누구나 어린 시절을 되새김질할 만한 추억을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누구나 거쳐왔지만 모두가 똑같지는 않았던 성장기. 미나와 토모코의 그 시간들이 <미나의 행진>에 가득 담겨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마음 속 기억창고에 담겨있는 아름다운 나만의 추억들을 미나와 토모코의 반짝반짝 빛나는 시간들과 함께 떠올려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오가와 요코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가슴 따뜻한 책으로 시작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오가와 요코에게 푹 빠져버린 책, <미나의 행진>. 그녀의 팬이 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이 기분 좋은 느낌을 이어받아 이제 그녀의 대표작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책꽂이에서 꺼내들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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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원 니시키 씨의 행방
이케이도 준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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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자제하던 일본소설에 다시 눈이 돌아갔다. 이 책 <은행원 니시키 씨의 행방>으로 인해. 일본소설 특유의 분위기와 너무 진지하거나 깊지 않은 무게에 적당한 미스터리, 그리고 일상이 버무려진 책이라는 입소문에 덧보태 꽤 괜찮은 작품이란 평들이 나의 유혹했는데 책을 읽어보니 생각보다 더 괜찮았다. 이 책은 일본소설의 장점이나 특색이었던 가벼움의 미학이나 코믹 코드 등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은행이라는 거대 조직 속에서 소모품처럼 취급당하는 개인과 출세를 향한 치열한 경쟁 등에 대한 직장인들의 이야기가 매우 현실감 있게 그려진다. 더불어 이야기의 중반부에 이르면서 실체를 드러내는 사건의 단서를 쫓아 니시키 씨의 행방을 추적해가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다.

책은 모두 10개의 짧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매번 다른 인물을 중심에 내세워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부지점장, 융자과 차석, 영업과 평사원, 업무과 대리 등 은행 내의 여러 직급과 분야의 다양한 인물들이 직장인으로서의 느끼는 애환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각 에피소드들이 이어지면서 책 전체를 관통하는 사건도 계속 함께 진행된다. 각각 다른 이야기같던 에피소드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어느새 이야기의 큰 흐름을 이룬다.

소설의 주요무대는 도쿄제일은행 나하가라 지점이다. 대부분의 회사에서 그렇듯 이곳에도 실적을 부르짖는 상사들과 그들에게 닥달당하는 직원들이 등장한다. 상사의 눈치를 살피고 실적에 매달리는 샐러리맨의 모습과 그들 뒤에 자리잡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들이 드러나는 책의 시작은 과연 이 책이 미스터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일상적이다. 그러나 나가하라 부지점장 후루카와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융자과 차석 도모노를 거쳐 영업과 상담팀의 아이리에 이르면서 서서히 사건의 실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독자들은 서서히 그러나 복잡하게 얽혀드는 이야기를 따라 니시키를 행방을 찾기 위해 함께 머리를 굴리게 된다.

마감을 앞둔 창구에서 현금 100만엔을 분실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은행 안은 뒤짚히고 없어진 현금을 찾기 위해 모두가 애쓰다 최종 수단으로 직원들의 물품과 사물함을 검사하고, 뜻밖에 아이리의 사물함에서 그날 도장이 찍힌 띠지(현금 다발을 묶는 종이)가 발견된다. 범인으로 몰릴 위기에 처한 아이리는 그녀의 직속 상사 니시키 대리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지만 여전히 현금은 나타나지 않은 채 사건은 대충 수습되다. 그러나 니시키 대리는 범인 추적을 멈추지 않고 급기야 어느날 실종되어 버린다. 그의 행방을 찾기 위해 추적하는 과정에 그간 감추어졌던 은행의 비리들이 하나둘 드러나고 사건은 전혀 뜻밖의 상황에 직면한다. 과연 니시키씨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의 행방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인가.

<은행원 니시키 씨의 행방>에는 실적을 위해 자존심까지 내팽개쳐야 하는 현실, 경쟁사 뿐만 아니라 내부 직원과의 숨 막히는 경쟁, 닥달하는 상사, 출세를 향한 야망과 그것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들, 조직 내부에 은폐되어 있는 온갖 비리와 더러운 뒷거래 등 회사 속 직장인들의 모습을 현실감있게 묘사해낸다. 니시키의 행방을 찾는 미스터리 못지 않게 이 책이 재미있는 건 바로 이런 현실감에 대한 공감 때문일 것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직장 상사에게 깨지고, 거래처 상대의 비위 맞추고, 동료에겐 뒤통수 맞고, 가족에게까지 격려를 받지 못하는 축쳐진 어깨로 터벅터벅 길을 걷는 은행원들의 모습이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오로지 '실적'으로만 평가되며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부품화 되어가는 은행원들의 모습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네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어 가슴이 저릿해진다.


평범한 듯 하지만 잔인한 하루하루를 맞닥뜨려야 하는 회사원들의 일상과 애환, 그리고 그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적절히 잘 버무려 놓은 이 책은 오랫만에 아주 흡족하게 읽은 소설이었다. 강도높은 긴장감을 요하는 미스터리물은 아니지만, 회사라는 거대 조직에서 피할 수 없는 일상의 공포를 잘 살림으로써 독자의 공감을 유도한다. 또한 각 이야기마다 다른 인물을 내세워 다양한 면면을 만날 수 있고 또 그것을 아울러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가는 형식이 신선했다.

다만 독자들에 따라 거듭되는 반전 끝에 이르는 결말이 다소 예측 가능하고, 독자에게 선택권을 넘기는 열린 결말이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을 듯 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독자의 능동적 참여를 유도하는 열린 결말은 마음에 들었다. 책을 다 읽은 후 작가가 내비친 여러가지 가능성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나누는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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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IC 2009-06-06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런 삶을 한탄하면서도, 바꿀 용기를 갖지 못하는 현대인들이기에 더욱 서글픈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simple 2009-06-12 01:41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용기있는 자들이 오히려 핍박을 당하는 시대이다보니,,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게 지금을 사는 우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퇴계잡영 - 이황, 토계마을에서 시를 쓰다
이황 지음, 이장우.장세후 옮김 / 연암서가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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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친구와 안동으로 여행을 갔었다. 안동,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하회마을과 도산서원이었기에 친구와 그곳을 가보자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옛 정취가 남아있는 하회마을은 다녀왔으나 도산서원은 가질 못했다. 점심을 먹느라 도산서원으로 가는 차를 놓친 데다가 다음 버스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학자 퇴계 선생의 발취를 느껴보려던 도산서원의 여기저기를 거닐어 보려던 계획은 아쉽게도 다음으로 미룰 수 밖에 없었다.

퇴계 선생을 생각할 때 도산서원과 함께 떠오르는 것이 바로 그의 시 「도산십이곡」이다. 한문과 친하지 않아 국어시간에도 한시는 늘상 어렵고 힘든 부분이었다. 더구나 시를 충분히 느낄 만큼 감수성이 깊지도 않고, 그 시대의 시를 읊었던 선비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임금을 그리거나 공부를 강조하는 등 틀에 박힌 주제를 노래한 것도 한시가 가깝지 않았던 한 이유이기도 하다. 퇴계 선생의 「도산십이곡」 또한 마지막엔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등 교훈적인 마무리가 그리 썩 와닿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한시 중에서도 자연을 노래하는 시들은 또 느낌이 달랐다. 순수하게 자연을 노래한 시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 감성이 부족한 내게도 흥취를 일으키고 감동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이책이 좀 남다르게 다가왔다. 퇴계 선생하면 대학자로 유교를 강조했고, 그의 한시 또한 대표적인 시 도산십이곡에서 보듯이 교훈적인 내용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이책 <퇴계잡영>은 그런 굴레에서 벗어나 퇴계 선생이 오로지 자연에 취해 흥에 겨워 읊은 시들을 모아놓은 책이란다. 잡영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생겨나는 일에 따라 읊조리는 것'으로 시의 제목으로 상용되었다고 한다. 비슷한 말로 '잡시'라는 것도 있는데 , 이러저러한 흥취가 생겨날 때 특정한 내용이나 체제에 구애받지 않고 어떤 일이나 사물을 만나 즉흥적으로 지어내는 시를 뜻한단다. 잡영이라는 말보다는 잡시라는 말이 확 와닿는다. 여튼 퇴계 선생이 이런 시를 지었다는 자체가 무척이나 신기했다.

책은 퇴계 선생의 이런 시들을 모아 원문과 우리말 번역본을 함께 실어두었다. 밑에는 주석을 달았고, 작품 전문 뒤에는 따로이 쉽게 해석을 해두었다. 그래서 시심이 부족하고 한문에 대한 이해마저 부족한 나같은 독자도 퇴계의 시를 충분히 즐길 수 있게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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