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의 행진
오가와 요코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수첩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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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972년, 그해엔 무슨 일들이 있었을까. 일본에선 <설국>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자살해 의문을 남겼고, 독일에선 뮌헨 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선수촌에 무장단체가 습격해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으며, 전세계가 세기의 우주쇼인 거대한 유성우 지아코비니의 출연을 기다리며 흥분했다가 실망했다. 

1972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전문학교에 들어가면서 토모코는 이모네 집에 거처를 옮기게 된다. 자신을 마중나온 이국적인 외모의 미남 이모부부터 벤츠 자동차, 으리으리한 대저택, 정원 동물원의 짧은 다리와 터질듯한 엉덩이를 가진 피그미하마 포치코까지 부자 이모집은 토모코에게 놀라움의 연속이다. 더불어 귀여운 독일인 할머니, 부지런한 가정부 고메다 씨,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하는 정원사 고바야시 씨, 눈부신 외모만큼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이모부, 멋진 환경에 있지만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이모, 스위스에서 유학중인 매력적인 사촌오빠 류이치, 천식으로 힘들어하는 사촌동생 미나 등 개성 뚜렷한 가족들의 모습까지..

아름다운 얼굴에 부서질 듯 약한 몸을 가진 사촌 미나는 특이한 모양의 성냥갑을 모으고, 성냥갑의 그림에 맞춰 이야기 짓기를 즐기며, 자신을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포치코를 사랑하고, 책읽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매주 수요일 프레시 한 상자와 함께 독특한 성냥갑을 전해주는 '수요일의 청년'을 짝사랑한다. 반면 평범한 외모의 토모코는 책보다는 뛰어놀기를 좋아하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알며, 잘 생긴 남자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사춘기 소녀다. 그리고 미나의 부탁으로 도서관에 책 심부름을 다니면서 그 또래의 소녀들이 그러하듯 잘 생긴 도서관 사서 '자라목 청년'에게 연정을 품게 된다. 다른 듯 비슷한 미나와 토모코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사춘기의 여러 감정들을 공유한다.


1972년에서 1973년 사이, 그해에 두 소녀에겐 무슨 일이 있었을까. 토모코가 미나의 집으로 왔고, 평생동안 잊지 못할 친구가 되었으며, 둘 만의 빛나는 추억을 만들었다. 그리고 각각 첫사랑의 두근거림이 찾아왔다. 매력적인 이모부는 여전히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유학중인 류이치가 잠시 다녀갔다. 우연찮게 토모코는 이모부의 비밀을 알아내고 사라졌던 이모부가 다시 나타난다. 로자 할머니가 지휘한 마지막 크리스마스 밤을 행복하게 보냈고, 그날 밤 집근처 산에서 산불이 났으며, 소동이 일어났던 사이 포치코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미나는 처음으로 포치코 없이 자신의 발로 걸어서 학교를 갔고, 토모코는 다시 엄마가 있는 곳으로 떠났다. 두 소녀는 그렇게 헤어졌다.

우리들은 자라면서 크든 작든 여러가지 일련의 사건들을 겪게 되고 그것들을 계기로 조금씩 내면의 성장을 경험한다. 위의 일들이 일어났던 한 해 동안 두 소녀들도 그러했다. 유리관 속 공주 같았던 미나는 짝사랑했던 수요일의 청년이 회사를 그만두면서 사랑의 아픔을 겪었고, 피그미하마 포치코의 죽음으로 세상의 도전을 받는다. 자신을 태워다녔던 하마 포치코가 미나를 보호하던 유리관 속 세계였다면, 처음으로 자신의 발로 걸어가는 등굣길은 유리관 밖의 험난한 세상이다. 앞으로 미나가 맞닥뜨려야 할 현실이다. 그래서 작은 발을 옮겨 세상으로 한 걸음씩 내딛는 미나의 행진은 힘겹지만 당당하다.

- 미나는 초등학교를 향해 자기 발로 걷기 시작했다. 오로지 자기 혼자 하는 행진이었다. 그 작은 등이 언덕길을 내려가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미나를 지켜보았다. (377쪽)


<미나의 행진>은 삶의 가장 중요한 한 때를 함께 한 사춘기 두 소녀의 우정과 내면의 성숙을 따뜻한 시선으로 들려주는 성장 소설이다. 어른이 된 토모코가 어린 시절 미나와 자신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가족이자 친구였으며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소울 메이트였던 그녀들이 함께한 보석같은 시간들을 추억하기에 애잔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더불어 사춘기 소녀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과 그네들이 느꼈던 다양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오가와 요코의 문체는 조용하고 차분하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이런 느낌 정말 좋다! 더불어 전체를 아우르는 꾸미지 않은 담담한 시선 또한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이야기는 단순한 듯 하지만 아주 빈틈없이 잘 짜여져있다. 특히 이모부의 정체를 파악하는 과정은 한 편의 미스터리물처럼 흥미롭다. (처음 이모부의 부재가 길어지는 동안 나는 혼자서 온갖 시나리오를 다 짜냈다. 이모부의 재출연에 모든 가능성이 녹아버리긴 했지만) 빈틈없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며 진행되는 이야기와 각각의 사건들을 통해 성숙해가는 미나와 토모코의 모습을 보며 나도 한 뼘쯤 성장한 기분이 들었다.


누구나 어린 시절을 되새김질할 만한 추억을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누구나 거쳐왔지만 모두가 똑같지는 않았던 성장기. 미나와 토모코의 그 시간들이 <미나의 행진>에 가득 담겨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마음 속 기억창고에 담겨있는 아름다운 나만의 추억들을 미나와 토모코의 반짝반짝 빛나는 시간들과 함께 떠올려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오가와 요코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가슴 따뜻한 책으로 시작해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오가와 요코에게 푹 빠져버린 책, <미나의 행진>. 그녀의 팬이 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이 기분 좋은 느낌을 이어받아 이제 그녀의 대표작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책꽂이에서 꺼내들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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