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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원 니시키 씨의 행방
이케이도 준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한동안 자제하던 일본소설에 다시 눈이 돌아갔다. 이 책 <은행원 니시키 씨의 행방>으로 인해. 일본소설 특유의 분위기와 너무 진지하거나 깊지 않은 무게에 적당한 미스터리, 그리고 일상이 버무려진 책이라는 입소문에 덧보태 꽤 괜찮은 작품이란 평들이 나의 유혹했는데 책을 읽어보니 생각보다 더 괜찮았다. 이 책은 일본소설의 장점이나 특색이었던 가벼움의 미학이나 코믹 코드 등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은행이라는 거대 조직 속에서 소모품처럼 취급당하는 개인과 출세를 향한 치열한 경쟁 등에 대한 직장인들의 이야기가 매우 현실감 있게 그려진다. 더불어 이야기의 중반부에 이르면서 실체를 드러내는 사건의 단서를 쫓아 니시키 씨의 행방을 추적해가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다.
책은 모두 10개의 짧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매번 다른 인물을 중심에 내세워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부지점장, 융자과 차석, 영업과 평사원, 업무과 대리 등 은행 내의 여러 직급과 분야의 다양한 인물들이 직장인으로서의 느끼는 애환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각 에피소드들이 이어지면서 책 전체를 관통하는 사건도 계속 함께 진행된다. 각각 다른 이야기같던 에피소드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어느새 이야기의 큰 흐름을 이룬다.
소설의 주요무대는 도쿄제일은행 나하가라 지점이다. 대부분의 회사에서 그렇듯 이곳에도 실적을 부르짖는 상사들과 그들에게 닥달당하는 직원들이 등장한다. 상사의 눈치를 살피고 실적에 매달리는 샐러리맨의 모습과 그들 뒤에 자리잡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들이 드러나는 책의 시작은 과연 이 책이 미스터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일상적이다. 그러나 나가하라 부지점장 후루카와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융자과 차석 도모노를 거쳐 영업과 상담팀의 아이리에 이르면서 서서히 사건의 실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독자들은 서서히 그러나 복잡하게 얽혀드는 이야기를 따라 니시키를 행방을 찾기 위해 함께 머리를 굴리게 된다.
마감을 앞둔 창구에서 현금 100만엔을 분실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은행 안은 뒤짚히고 없어진 현금을 찾기 위해 모두가 애쓰다 최종 수단으로 직원들의 물품과 사물함을 검사하고, 뜻밖에 아이리의 사물함에서 그날 도장이 찍힌 띠지(현금 다발을 묶는 종이)가 발견된다. 범인으로 몰릴 위기에 처한 아이리는 그녀의 직속 상사 니시키 대리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지만 여전히 현금은 나타나지 않은 채 사건은 대충 수습되다. 그러나 니시키 대리는 범인 추적을 멈추지 않고 급기야 어느날 실종되어 버린다. 그의 행방을 찾기 위해 추적하는 과정에 그간 감추어졌던 은행의 비리들이 하나둘 드러나고 사건은 전혀 뜻밖의 상황에 직면한다. 과연 니시키씨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의 행방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인가.
<은행원 니시키 씨의 행방>에는 실적을 위해 자존심까지 내팽개쳐야 하는 현실, 경쟁사 뿐만 아니라 내부 직원과의 숨 막히는 경쟁, 닥달하는 상사, 출세를 향한 야망과 그것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들, 조직 내부에 은폐되어 있는 온갖 비리와 더러운 뒷거래 등 회사 속 직장인들의 모습을 현실감있게 묘사해낸다. 니시키의 행방을 찾는 미스터리 못지 않게 이 책이 재미있는 건 바로 이런 현실감에 대한 공감 때문일 것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직장 상사에게 깨지고, 거래처 상대의 비위 맞추고, 동료에겐 뒤통수 맞고, 가족에게까지 격려를 받지 못하는 축쳐진 어깨로 터벅터벅 길을 걷는 은행원들의 모습이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오로지 '실적'으로만 평가되며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부품화 되어가는 은행원들의 모습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네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어 가슴이 저릿해진다.
평범한 듯 하지만 잔인한 하루하루를 맞닥뜨려야 하는 회사원들의 일상과 애환, 그리고 그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적절히 잘 버무려 놓은 이 책은 오랫만에 아주 흡족하게 읽은 소설이었다. 강도높은 긴장감을 요하는 미스터리물은 아니지만, 회사라는 거대 조직에서 피할 수 없는 일상의 공포를 잘 살림으로써 독자의 공감을 유도한다. 또한 각 이야기마다 다른 인물을 내세워 다양한 면면을 만날 수 있고 또 그것을 아울러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가는 형식이 신선했다.
다만 독자들에 따라 거듭되는 반전 끝에 이르는 결말이 다소 예측 가능하고, 독자에게 선택권을 넘기는 열린 결말이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을 듯 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독자의 능동적 참여를 유도하는 열린 결말은 마음에 들었다. 책을 다 읽은 후 작가가 내비친 여러가지 가능성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나누는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을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