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정진영 지음 / 징검다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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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성 역할을 강조한 성리학이 보급되고 자리잡은 조선 시대 이전엔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그리 낮지 않았다고 한다. 장자에게 모든 걸 몰아주던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시대엔 부모의 유산을 아들과 딸이 동등하게 나누었고, 과부의 재혼도 허용되었단다. 거기서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신라시대에 이르면 우리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여왕'의 존재가 무게를 더한다. 여자 대통령이 나오기도 쉽지 않은 요즘과 비교해 볼 때 고대 시대에 여성이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일종의 파격적인 처사로 보인다. 그러나 그건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의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공주를 여왕으로 추대하는 것이 어쩌면 그들에겐 별다른 거부감이 없는, 자연스런 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멀게만 느껴진 고대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역사책을 통해 딱딱하게만 다가왔던 우리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고 그들의 삶을 공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소설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장르다. 이 책 또한 우리 역사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이기에 눈길이 갔다. 그동안 다루지 않았던 신라의 여왕이야기라. 비교적 여성에게 관대했던 신라였다고 해도 여전히 남성위주로 펼쳐지는 권력세계를 제패한 여왕의 이야기는 소재 자체만으로도 흥미롭다. 더불어 천년고도인 경주와 가까이 살면서도 정작 신라에 대해 표피적인 지식만을 갖고 있던 내게 이 책은 신라에 대한 보다 깊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해줄 것 같았다.

그러나 기대감에 차서 넘기던 책장은 곧 한숨으로 바뀌었다. 툭하면 산으로 가는(무릎팍 도사도 아닌 것이;;) 이야기의 전개는 '아~ 왜 또 이러셔요~'라고 한탄하게 만들었고, 전설과 각종 야사를 꿰어놓은 이야기에는 주술적인 면이 너무 강해 이 책이 무얼 말하려고 이런 에피소드를 집어넣었나 하는 의구심을 품게 만들었다. 분명 주인공은 책 제목처럼 선덕여왕인데 작가는 그녀 주변의 모든 등장인물들을 챙기느라 이야기 나무가 커가지 못하고 옆가지만 늘어난다. 그래서 글은 흐름을 잃고 갈팡질팡한다. 거기다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앞날을 예언하는 선덕여왕, 귀신처럼 움직이고 귀신을 보는 비형, 금이 달린 수레를 순식간에 백제에서 신라로 이동하는 백제의 스님, 유신을 도우는 여신 등 고대사의 온갖 주술적인 전설들을 가감없이 모두 담고 있어 소설의 설득력이 떨어진다.

소설 <선덕여왕>을 읽은 감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선덕여왕 시대에 관한 온갖 야사와 전설을 짜깁기해서 엮어놓은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 싶다. 물론 워낙 오래전의 인물이라 역사적 사료가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나마 접할 수 있는 것이 고대사 특유의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잔뜩 뒤섞인 전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전설을 그대로 이야기 속으로 옮겨다 놓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소설 속에서 선덕여왕이란 인물에 맞게 각색되거나 변형되어 제 몸에 맞는 옷으로 단장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 책은 전해내려 오는 각종 전설들을 그대로 실로 꿰어 차려놓은 전설 모음집 그 이상도 아니었다.

그나마 중반부를 넘어서면 선덕여왕에 대한 이야기에 어느정도 집중한다. 이루어질 수 없기에 더욱 간절한 사랑은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지만 그들이 사랑에 대한 공감대는 쉽게 형성되지 않는다. 선덕여왕인 덕만공주와 비형랑은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지 못한 채 서로에 대한 사랑을 갈망하고 위험한 관계로 접어드는 연인들의 복잡한 심리상태는 너무 단편적인 면만 보여진다. 그래서 독자들은 함께 가슴 아파하지 못하고 그들을 관망한다. 또한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야기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해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던 까닭도 있다.

책의 뒷부분에 작가의 말을 보면 작가는 여왕의 영웅주의적 업적보다는 연애 이야기에 중점을 두고 싶었다고 말한다. 책의 진행도 그녀의 연애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가 그러했다면 책표지의 카피를 그렇게 적지 말아야 했다. '한 남자의 여자이기보다 한 나라의 어머니이기를 선택한 여인'이란 카피와 '여왕의 연애사를 쓰려고 했다'는 작가의 의도는 거의 반대지점에 있지 않은가 말이다. 자신의 사랑보다 국모의 역할을 받아들인 여인의 순탄치 않은 삶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던 독자들은 대체 어디에 대고 하소연을 해야 하는지.

한 숨도 쉬다가 졸기도 하다가 몰입해서 읽다가를 반복해 겨우 마지막장에 이르렀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자신의 혼을 쏟았을 텐데 이렇게 읽고 평하는 것이 솔직히 조금 미안하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독자다. 냉정히 말하자면 이 책은 나의 기대를 전혀 채워주지 못한 소설이었다. 재미도 없을 뿐더러 구성도 엉성하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도 확연히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긍정적인 책읽기를 하자면, 여러 역사책을 일일이 찾지 않아도 신라에 관한 전설들을 충분히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의외의(?) 장점이다. 물론 온갖 과장과 은유가 더해진 주술적인 전설이지만. 그리고 책에 전개되는 삼국 관계를 통해 멸망 전의 삼국의 치열한 정세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소설적 재미는 없어도 역사책류의 지식은 건질 수 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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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스 내 영혼의 지도 - 잉카인이 쓴 페루 여행의 초대
호르헤 루이스 델가도 지음, 이정아 옮김 / 담담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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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눈길이 빼앗긴 건 안데스, 잉카, 페루, 남미, 여행서 등등의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페루에서 안데스를 직접 거닐며 그 땅에 머무르며 삶을 살아가는 현지인이 직접 쓴 책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많은 여행서들은 대부분 여행자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 느낌을 전한다. 미지의 땅에 도착한 여행자는 그곳에서 한낱 이방인일 뿐이고 그래서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하고 흥미롭게 보인다. 낯선자의 눈으로 전해듣는 호기심어린 생각과 느낌들은 그 나름대로 재미있다. 나 또한 이방인이기에 그들과 공감할 수 있는 면들도 많다. 그러나 기껏해야 며칠 정도 머무르고 가는 여행자의 시선은 수박 겉핥기와 비슷하다. 순간의 흥분은 있지만 그곳이 품고 있는 깊은 맛을 느끼기엔 부족하다. '현지인'이 쓴 여행서는 그래서 또 다른 맛이 있는 것이다. 지나가는 자들은 알지 못하는, 그곳에 머무르는 자만이 알거나 느끼는 진한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미 대륙하면 생각나는 게 여러가지가 있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잉카나 마야, 아즈텍 같은 고대문명일 것이다. 나는 남미하면 항상 마추픽추가 떠오른다. 그런 높은 산에 잉카인들이 만든 공중도시 마추픽추. 그 자체만으로도 항상 의문점을 낳았었다. 그래서 그 언젠가 꼭 마추픽추에 가보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아직 그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여전히 그곳은 나의 꿈의 한 부분으로 남아있다. 또한 영화 '후아유'로 처음 알게 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수 '티티카카'도 가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다. 영화를 본 후 읽은 책에서 그 호수가 바다처럼 넓고 그 위에 갈대로 엮은 우로스 섬이 떠다닌다는 사실을 알고는 참으로 놀랐던 기억도 난다. <안데스 내 영혼의 지도>에는 잉카와 마야, 티티카카의 이야기가 모두 담겨있다. 그래서 더 반가웠다.

이 책의 저자는 과학적인 수치나 증거를 기준으로 정확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을 안내하는 과학적인 가이드로 자부하며 사는 여행 가이드였다. 여행 가이드 일을 하면서 여러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중에서 특히 영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단다. 그래서 그에겐 조금은 신기하고 설명 불가능한 에피소드들이 많이 있다. 그러다 영국 BBC 방송국의 다큐멘터리를 안내하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잉카의 전통 문화를 좀 더 가까이에서 접하게 되었다. 그동안 몰랐던 잉카의 전통에 빠져들게 되면서 그는 과학적 수치보다 영적인 삶을 우선 순위에 두게 되었고 잉카인들의 영적 전통의 참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지금 그는 자신의 여행사를 차려서 잉카인의 유산과 영적 전통을 알리기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중이란다. 이 책도 아마 그런 열정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책에는 페루의 여러 모습들이 다양하게 담겨있다. 페루의 역사나 문화, 사람들, 생활풍습, 신화나 주술 등 쉽게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이 줄을 잇는다. 그것들에 대한 소개와 개인적인 생각, 깨달음, 감상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솔직히 처음엔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낯선 곳의 낯선 이야기라는 점이 여행서의 매력이지만 너무나 소소한 것까지 짚고 넘어가는 부분에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어 조금 지루하기도 했다. 또한 잉카의 전통 문화 이야기로 빠져들면서 때론 주술적이고 영적인 면들이 너무 많이 부각되어 정서적 교류가 힘든 부분도 있었다. '현지인의 글'이란 장점이 때에 따라서는 기대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고나 할까. 기대했던 마추픽추나 티티카카 이야기들조차 주술적인 면이 강해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안데스 내 영혼의 지도>는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들과 신비로운 체험들도 많이 나온다. 무엇보다 자신의 조국과 그들의 역사인 잉카 문명에 대한 지은이의 큰 사랑과 자부심이 피부로 느껴진다. 기존의 여행서에서 염증을 느꼈다면 이 책이 별미처럼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행자들의 이야기에 익숙하고 주술적인 면에 반감을 갖고 있는 분들이라면 이 책에서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할 듯 하다. 아쉽게도 나는 후자였다. 그래서 책을 읽는내내 몰입하거나 동화되지 못하고 겉돌며 지루하게 책장을 넘겨야 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중간중간 눈을 시원하게 만들어줄 사진이라도 듬뿍듬뿍 넣어주었더라면 좀 더 즐거웠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마저 중간쯤 컬러 지면에 집중되어 있어 나를 더욱 아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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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피치 미술관 마로니에북스 세계미술관 기행 8
엘레나 지난네스키 지음, 임동현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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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매체의 수많은 패러디들을 통해 대중들에게 더욱 널리 알려진 보티첼리의 걸작 『비너스의 탄생』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책, <우피치 미술관>. 마로니에 북스에서 시리즈로 발간되고 있는 세계 미술관 기행 여덟번째 책이다. 더불어 <반 고흐 미술관> 이후 두 번째로 만난 세계 미술관 기행책이기도 하다. 루브르 박물관이나 대영 박물관 등은 워낙 유명해 익히 알고 있었으나 '우피치 미술관'은 솔직히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그 유명한 『비너스의 탄생』은 알았으나 그 작품이 어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지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피치 미술관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관이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르네상스 회화 컬렉션을 자랑하는 미술관이다. 르네상스가 태동하고 꽃피었던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자리잡은 이 미술관은 13~14세기 토스카나 대공국 시대의 작품부터 17,18세기의 베네치아, 프랑스, 스페인 작품 등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걸작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이처럼 여러 뛰어난 작품들이 많지만 앞서 말했듯 우피치 미술관의 핵심이자 가장 큰 자랑거리는 역시 르네상스 회화들이다.

손으로 살짝 가슴을 가린 비너스의 모습이 담긴 표지를 넘기면 보티첼리의 『봄』, 라파엘로의 『검은 방울새의 성모』,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등 눈에 익은 작품이 독자를 반긴다. 특히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작년에 출간됐던 소설 <르네상스 창녀>의 표지로 만났던 터라 괜시리 반가웠다. (이 그림의 제목을 여기서 처음 알았는데, '비너스'의 그림을 '창녀'라는 제목의 책표지로 쓴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우피치 미술관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루벤스 등의 유명 화가의 작품들과 그들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나름의 명성을 누렸던 많은 화가들의 아름다운 그림들이 포진해 있다. 특히 이 미술관에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그림들이 많이 있었는데, 너무나도 유명한 『비너스의 탄생』, 『봄』 뿐만 아니라 『메달을 든 남자』, 『동방박사의 경배』, 『필라스와 켄타우르스』, 『유디트의 귀환』 등 멋진 그의 그림을 많이 만날 수 있어 흠뭇했다.

다른 세계 미술관 기행책들이 그러하듯 <우피치 미술관> 또한 저자의 개인적인 감상보다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작품들을 해설하고 있다. 책의 첫머리에는 우피치 미술관의 역사와 설립배경 등을 설명하여 미술관에 대해 독자에게 개략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본격적인 미술감상으로 들어가서는 그 작품의 의의나 회화기법, 그림이 그려진 배경이나 제작 의뢰자 등을 소개한다. 특히 독자가 집중해야 할 그림의 감상 포인트에는 따로 주석을 달거나 확대하여 실어두었다.

<우피치 미술관>은 다양한 르네상스의 걸작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반가운 책이었다. 성서 속 장면이나 신화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그림에서 점차 인간의 모습을 내세운 그림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각 작품들에 대한 설명이 때론 너무 간략해 나같은 초보자는 감상 포인트를 잡기가 수월하지 않았고, 작품의 의뢰인이 누구며 어디에서 어디를 거쳐 미술관에 오게 되었는지 등의 과정에 대한 설명이 작품 해설의 많은 분량을 차지하기도 해 감상을 방해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지식을 환영하는 다른 독자들에겐 흥미로웠겠지만. 더불어 너무나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한다는 우피치 미술관의 건물 사진도 한 컷 정도는 넣어주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미술관 기행 시리즈는 그 미술관의 겉모습 사진에 대해선 너무 인색한 듯 하다. 

이래저래 약간의 아쉬움이 남은 책이긴 하지만 미술관에 직접 가지 않고도 빛나는 르네상스 회화들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선 반가운 책이었다. 우피치 미술관을 방문할 계획이 있는 분들이라면 방문 전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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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가면 키스를 훔쳐라 - 에로틱 파리 스케치
존 백스터 지음, 이강룡 옮김 / 푸른숲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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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파리의 상징 에펠탑이 떠오른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찬미했던 센강과 빵 중에 가장 좋아하는 바게트, 거리의 화가들이 늘어선 몽마르트 언덕, 모나리자로 대표되는 루브르 박물관, 심지어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이나 드라마 <파리의 연인> 등 파리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은 너무나 많다. 그러나 역시 파리하면 낭만을 빼놓을 수 없다. 도시 전체에서 뿜어내는 낭만적 분위기는 파리를 더욱 매혹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파리에 대한 나의 감상들은 실제로 그곳이 전해주는 이미지라기보다 아마 영화나 드라마, 문학 등으로 포장되고 가공된 이미지들가 대부분일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생각에 더욱 확신을 준다. 낭만만이 가득할 것 같았던 도시, 파리. 작가 존 벡스턴은 그동안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던 파리가 아니라 곳곳에 숨어있는 파리의 모습을 읊는다. 그가 들려주는 파리 이야기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개방적인 파리의 성문화다. '에로틱 파리 스케치'라는 부제는 책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타오르듯 붉은 표지도,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사진들도.

호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직장을 다니던 존 백스터는 입사한지 10년이 되던 해에 회사를 관두고 호주를 떠난다. 영국에선 BBC 방송국의 통신원과 책관련 프로그램을 맡았고, 미국에선 영화 평론과 시나리오 작가로 제법 잘 나갔던 그는 어느날 과거에 사랑했었던 옛 연인 마리-도를 다시 만나고, 그녀를 따라 미국에서의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미련없이 파리로 떠난다. 그리고 사랑하는 그의 연인과 함께 파리에 정착한다.

존 백스터는 파리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고전 문학과 영화 속의 파리를 추억한다. 많은 작가와 배우, 책과 영화 속의 장면과 대사들이 그의 입을 따라 떠돌고 평범하게만 보이던 파리의 그곳은 그의 설명을 지나면 특별한 곳으로 탈바꿈한다. 특히 그는 파리지엔의 개방적인 성문화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데 그 결과 지면의 대부분을 그 주제에 할애한다. 그래서 이 책엔 파리를 스쳐간 유명인들과 그들 사이의 헤프닝들과 파리의 뒷면에 숨어있는 온갖 에로티시즘에 관한 이야기가 들썩인다. 낭만으로 가득할 것 같았던 파리의 숨겨진 모습에 조금은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이 에로틱한 이야기로만 채워져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파리에 도착한 이후 파리라는 낯선 공간에서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람들과 문화, 생활 습성들에 대한 느낌이 담겨있다. 파리에서의 그들의 동거가 계속되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일상 생활의 한 단면들과 임신, 결혼, 출산을 통해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는 그들의 결혼이야기도 함께 녹아있다. 프랑스식 결혼 풍경과 온갖 엽기적인 재료로 만들어진 요리들(이 부분에선 갑자기 우리나라의 개고기 음식문화를 비하했던 프랑스 여배우가 떠오르면서.. 그들이 과연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스러워졌다.)도 등장하고, 개를 끔찍하게 사랑하지만 길거리에 배설되는 개들의 배설물에 대해선 묵과하는 파리의 모습들. 이렇게 파리의 여러 단면을 겪으며 이방인이었던 저자는 점점 파리를 예찬하는 파리지엔이 되어간다.

<파리에 가면 키스를 훔쳐라>는 기존과는 다른 색다른 파리 이야기라는 점에서 우선 눈길이 간다. 포장되고 번지르르한 파리의 겉모습들이 아니라 겹겹이 숨겨진 파리의 모습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선 신선했다. 그러나 파리라는 도시에 깔려있는 성문화를 파고드는 작가의 관심은 나랑 코드가 맞지 않아 별다른 재미를 느낄 수 없었고, 파리의 숨겨진 명소들을 돌며 저자가 인용하는 온갖 고전 문학과 영화의 장면들, 작가와 배우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알지 못하는 것들이라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눈으로 확인할 사진조차 내밀지 않으니 저자의 기분에 발맞추지 못함이 아쉬울 따름이다. 새롭고 에로틱한 파리의 모습, 신선함과 지루함이 교차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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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의 날씨
볼프 하스 지음, 안성철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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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특이한 한 편의 소설을 읽었다. 독일 작가 볼프 하스의 소설 <15년 전의 날씨>, 이 책을 읽어본 독자라면 '특이하다', '독특하다'라는 이 표현에 대부분 수긍할 것이다. 비록 다중적 시점에 먹칠과 구멍까지 뚫려있던 책 <종이로 만든 사람들>에 비한다면 비교적 '얌전한 독특함'에 속하지만 말이다.

15년 만에 코발스키를 만난 아니는 그의 '왼쪽 눈초리 2센티미터 아래'에 키스를 한다. 그와 함께 15년 전에 중단되었던 키스가 다시 이루어지는 이 장면을 언급하며 질문을 하는 기자와 그에 답하는 작가의 인터뷰가 시작된다. 15년 전 코발스키와 아니에게 갑자기 나타난 폭풍우, 밀렵꾼의 창고, 난데없는 죽음,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15년간 그곳의 날씨에 집착하는 남자 코발스키.. 도대체 15년 전 그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5년 전의 날씨>는 매우 파격적인 형식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서술과 묘사로 이루어진 보통의 소설들과 달리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의 신작에 대해 논하는' 기자와 작가의 '인터뷰'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의 작가 볼프 하스는 책 속에서 새로운 '소설'을 발표해 인기를 얻고 있는 작가 볼프 하스로 등장한다. 그리고 책 속의 여기자와 함께 자신의 소설에 대해 토론을 벌인다. 말하자면 작가가 작가 스스로를 인터뷰하는 책인 셈이다. 

'인터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책은 그 안에 담겨 있는 작가의 '소설 줄거리'를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독자들은 이어지는 그들의 인터뷰를 통해 던져주는 단편적인 단서들을 모음으로써 책 속의 주인공 '코발스키'와 '아니'에게 벌어진 일들을 짐작하고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조각조각을 맞춰 전체를 완성해가는 퍼즐같다고나 할까. 인터뷰의 끝으로 갈수록 '코발스키와 아니'의 이야기도 대부분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고 그들 사이에 있었던 드라마틱한 사건들과 약간의 반전들이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또한 작가와 기자의 대화를 통해 책 속에 담겨있는 온갖 은유와 상징 등을 파헤치고, 곳곳에 감춰진 허위와 위선을 풍자적으로 까발리며, 글을 쓴 사람과 글을 읽는 사람 사이의 시선의 차이를 보여준다. 인터뷰가 또 하나의 이야기로 기능하는 셈이다. 다시 말해 작가는 책 속에서 자신의 책을 인터뷰함으로써 작가가 원래 들려주려던 이야기인 '소설'과 소설을 쓴 의도나 배경, 기타 상황설명 등을 덧붙이는 또 다른 이야기인 '인터뷰'라는 각각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에 절묘하게 담아낸다. 한 권으로 두 가지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책의 뚜렷한 장점은 반대로 뚜렷한 단점이 되기도 한다. 작가가 시도한 '새로운' 형식은 독자에 따라 이질적이고 불편한 틀로 다가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터뷰의 내용을 통해 알게되는 '코발스키와 아니'에 관한 이야기는 툭하면 삼천포로 빠져 허우적대는 작가와 기자의 입담 자랑 속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잠시만 한 눈 팔면 그들은 다른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런 까닭에 퍼즐 조각을 채워나가기가 쉽지 않다. 그들의 인터뷰를 독립된 또 하나의 이야기로 즐기지 못하는 독자라면 사건의 더딘 진행에 지쳐 하품이 나올 수도 있다.

새로운 형식, 과감한 풍자, 엇갈리는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라면 이 책이 꽤나 즐거울 것이다. 반면 지루한 전개, 과다한 수다, 이해하기 힘든 독일식 유머에 빠져들지 못하는 독자라면 조금 지겨울 수도 있을 듯 하다. 안타깝게도 나는 후자에 속했다. 그들의 멈출 줄 모르는 입담과 그에 비례해 진전없는 이야기가 종종 나를 지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책이 독특하다는 것과 책 속 '소설'의 반전 부분은 제법 흥미로웠다는 데는 동의한다.



아참, 이 책을 읽을 분이라면 책 속의 책인 '소설'의 줄거리에 대해 절대 어떤 정보도 접하지 말고 읽을 것을 권한다. 이야기의 앞과 뒤가 뒤섞인 특이한 구성으로 보는 내내 이야기를 추론하느라 머리를 굴려야 했던 영화 <21그램>처럼, 이 책 또한 그 줄거리를 알아버리는 것은 아주 치명적이다. 그걸 아는 순간 책의 재미는 반감되고 만다. 주의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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