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로라>

비라 캐스퍼리 지음


리뷰어: 김용언 (미스테리아 편집장)






워런 처낵(Warren Chernaik)의 책 <아트 오브 디텍티브 픽션(The Art of Detective Fiction)>에 따르면, 1931년 미국 탐정 소설 독자들에게 행해진 설문에서, 소설 속에서 가장 싫은 타입의 인물로 “시끄러운 독신녀, (……) 이야기를 망쳐버리는 여자들, (……) 너무너무 여성적인 이야기, (……) 혼자 다락방을 배회하는 여주인공”이 꼽혔다고 한다. 사실상 1930년대 출간된 소설 속 여성들 거의 전부를 싫어한다고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특히 이 시기는 미국의 미스터리 소설계에서 ‘하드보일드’라는 신천지를 발견한 무렵이기도 하다. 고독하고 터프한 남자들의 모험담, 여기서 여성들은 대개 팜파탈로서 주인공 남자의 강박이나 판타지가 과장되게 구현된 그림자 같은 인물로만 등장했다. 


그러나 비라 캐스퍼리는 1943년 하드보일드 누아르 <나의 로라>(이은선 옮김, 엘릭시르 펴냄)를 집필하며 수많은 남성 독자들의 편견을 산산조각냈다. 소설은 미모의 커리어우먼 로라가 뉴욕 한복판 호화로운 맨션에서 시체로 발견되면서 시작한다. 무뚝뚝하고 자부심 강한 형사 맥퍼슨은 ‘모두에게 사랑받았다’고 알려진 로라가 살해된 이유를 알기 위해선 피해자의 성격을 세심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믿는다.


로라는 ‘남자 같은’ 여자였다. 겉모습은 아름답고 가냘픈 소녀 같지만, “자기가 얼마나 똑똑한지 알고 있었고, 자신의 재능을 증명해 보일 수만 있다면 수백 번이라도 퇴짜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던 여자였다.


“응접실 세트도 필요 없었고, 결혼이 지상 최고의 과제도 아니었단 말입니다. 직업도 있겠다, 돈도 많이 벌겠다, 떠받들며 찬양하는 남자들도 넘쳐 나겠다. 결혼을 해 봐야 채워지는 곳은 한군데뿐인데, 그건 결혼하지 않아도 채울 수 있었으니까. (……) 그녀는 남자처럼 일하고 남자처럼 걱정을 했던 여자올시다. 뜨개질에 재능이 있었던 여자가 아니었어요.”


한편 로라는 남자들의 ‘욕망의 모호한 대상’이기도 했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로라를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적인 감정을 녹여 넣어 초상화 속에 로라를 박제하려 했다. 하지만 로라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을 둘러싼 그 이미지들의 휘황찬란함을 파괴했다. 로라는 돈을 많이 벌었지만, 또 그만큼 품위 있는 삶을 유지하고 그녀의 호의를 기대하며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응당 주어야 할 사랑과 우정을 베풀기 위해 그 돈을 다 써버렸다. 그녀는 사람들의 장식품이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그녀 자신의 위치를 위해 사람들을 이용했다. 그녀는 바흐의 정갈한 클래식만큼이나 베니 굿맨의 스윙을 사랑했고, 직장에선 똑 부러지게 일을 해냈지만,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기획서를 쓸 때만큼의 질서를 찾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모두에게 잘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지만, 그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면 상류층의 예의범절을 미련 없이 내동댕이쳤다.


“화가 나서 좋았다. 증오할 수 있어서 기뻤다. 나는 복수를 위해 고함을 질렀다. 살기등등하게 덤볐다.”


이 모든 묘사는, 팜파탈들이 그러하듯 뭔가 다른 목적을 위해 남자들을 유혹하고 파멸하기 위함이 아니다. 로라는 겉보기엔 완벽에 가까운 여자였지만, 언제나 자신이 불완전하다고 느끼면서 “덩치만 큰 어린애 아니면 나이 든 할망구” 같은 남자들에게 결정적인 순간 약해지며 기꺼이 모성애를 베풀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요즘 여자들’처럼 말이다.


자신이 “여자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산뜻한 가면으로 포장된” 잘생긴 ‘신사’ 셸비를 결혼상대로 선택했던 이유에 대해 “수익률 좋은 새로운 품종을 탄생시키기 위해 선택된” 채소 같은 것이 아니었나 의심한다. 결국 로라는 남몰래 한탄했다. “우리가 얼마나 너그럽고 세련되고 우스꽝스럽고 한심했던가!” 그리하여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당신을 흠모해. 당신은 내 작품 속의 여주인공이 될 거야. 내가 만든 가장 위대한 작품이 될 거야”라고 유혹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그녀는 용감하게 거절했다. 다시 말해 (남자의) 주인공이 되는 걸 포기했다. 대신 “한심하고 쓰잘머리 없는 일상을 유지하고, 습관을 내 스스로 조절”하는 쪽을 선택했다.


여성 작가가 하드보일드 누아르를 쓰면 이만큼 달라질 수 있는 걸까? 로라는 수많은 하드보일드 남성 작가들이 그려낸, 남성 탐정의 냉정한 눈에 비친 아름답지만 공허하고 사악한 여자가 아니다. 비라 캐스퍼리는 선언한다. 그런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 이미지는 그 남자의 문제이며, 그중 아무도 여자 캐릭터의 내면을 들여다볼 용기가 없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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