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듣는 벽>


리뷰어: 김용언 (미스테리아 편집장)



『엿듣는 벽』에서 ‘살인범이 누구인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극 초반에 죽은 여인 윌마가 자살인지 타살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친구 에이미가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의혹만 남긴 채 에이미조차 사라지고, 에이미의 행방에 대해 모호하게 발뺌하는 남편 루퍼트가 혹시 그녀를 살해한 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짙어간다……. 수수께끼가 꼬리를 물고 덤벼든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범인이 누구인가는 사실 그렇게 궁금하지 않다. 심지어 마지막의 반전조차도, 어떤 해명이 덧붙여지지 않은 채 그저 툭, 우리 발 앞에 내던져질 뿐이다. 별다른 이유 없이 죽은, 사실 그럴 필요 없었는데 날씨와 기분의 타이밍이 더럽게 맞지 않아 일이 그렇게 되고 만 어떤 운 나쁜 시체처럼. 


대신 독자를 사로잡는 것은 살아 있는 여자들이다. 정확하게는 그 여자들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더럽고 치사하며 어두운 생각들이 어떤 식으로 불쑥 비밀스럽게 출몰했다가 예쁜 외관 뒤로 얼른 숨어버리는지, 타인에게 그것을 내보이지 않기 위해 얼마나 조용하면서도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지에 관한 묘사야말로 『엿듣는 벽』의 백미다.


다섯 명의 여자들이 있다. 에이미는 얼마 전에 이혼한 친구 윌마를 위로하기 위한 멕시코 여행을 함께 왔다. 어쩌면 에이미의 남편 루퍼트와 모종의 관계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윌마가 추락사한다. 충격 받아 거의 실성하다시피 한 에이미를 데려가기 위해 루퍼트가 달려오지만, 집에 도착했을 땐 루퍼트 혼자뿐이다. 그리고 멕시코 호텔방 벽에 귀를 대고 에이미와 윌마 사이의 신경전을 엿듣는 종업원 콘수엘라가 있다. 루퍼트를 사모하는 사람 좋고 단순한 버턴 양, 시누이 에이미를 싫어하지만 남편 앞에서 차마 불만을 늘어놓지 못하는, 자신의 가정을 지키는 데에 혈안이 된 헐린이 있다. 


이 여자들 모두 자신이 원하는 상과 바깥에서 보는 상이 다르며 그 간극에 대해 불만을 느끼지만, 또한 그녀들의 사회적 위치와 계급, 바깥에서 기대되는 역할에 따라 불만을 표출하는 방식이 확연히 달라진다. 가장 제멋대로 사는 것처럼 보였던 여자는 불행한 결말을 맞고, 계급의 가장 아래쪽에 속해 있던 여자는 자신의 욕망을 겁 없이 휘두르다가 광기에 휩싸이고, 가장 소극적으로 살던 여자는 예기치 못한 순간 날카로운 발톱을 살짝 내보인다. 


물론 남자들도 중요하다. 여자들의 욕망과 분노를 불러일으키며, 그들의 가정이 불안한 토대 위에서 가까스로 안정을 유지하는 정도로 허약한 건축물이었음을 가장 뒤늦게 깨닫는 인물들. 자신들이 여자를 보호하고 아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여자들의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는, 그렇게 패배해야만 다시금 공인된 제도 안에 안주할 수 있는 인물들. 하지만 『엿듣는 벽』에선 어디까지나 여자들의 결투가 우선이다. 정숙하고 평온한 아내·부인·연인으로서의 역할만 요구받던 여자들의 마음속에 몰아닥치는 광기는 아주 조용하게, 천천히 드러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독자들이, 혹은 그녀들 자신마저도 이 변화를 눈치채기 힘들다. 그러나 일단 드러나는 순간, 그것은 ‘부엌 조리대 위의 식칼’ 같은 무시무시한 존재가 된다.


“식칼은 계획된 살인에 쓰이는 도구가 아니다. 긴급 상황에, 느닷없이 화가 나거나 두려울 때 무심코 집어 쓰기 마련이었다. 남자들은 빨리 공격이나 방어를 해야 한다면 습관적으로 주먹을 쓰기 마련이다. 여자들은 뭐든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거나 주변에 있는 것을 집는다. 식칼은 부엌 조리대 위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집기를 기다리면서.”


우아한 외면 아래 치사스럽고 더러운 내면을 숨기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기술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엿듣는 벽』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마거릿 밀러가 등장인물들을 대단히 냉담한 해부학자의 시선으로 내려다보되 혐오(는 필연적으로 우월 의식을 낳는다. 퍼트리셔 하이스미스의 몇몇 작품들을 떠올려본다면 분명하다)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마거릿 밀러는 다만, 벽에 가만히 귀를 대고 그녀 자신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벌거벗은 심리와 좌절된 욕망을 엿듣고 정확히 기술할 뿐이다. 그녀는 불안하고 불길한 여자들의 영혼 앞을 서성거리는 야경꾼이다.


“외관을 깨끗이 유지하기, 덤불 울타리 다듬기, 잔디밭 깎기. 그래서 이 집들이 삼중 담보에 걸려 있다는 사실과 어머니의 두통은 편두통이 아니라 마티니를 하도 마셔서 생긴 증상임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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