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아무 생각 없이 올해의 작품들을 고른 뒤에 그 목록을 보면서 든 생각입니다. 별다른 건더기는 없으니까 패스하셔도 무방합니다.

정리정돈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서인지 뭔가 결산하기도 늘 어렵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나오게 마련이고, 어떤 데이터라도 모종의 결론을 보여주긴 합니다. 리스트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취향이 편중돼 있습니다. 서점 MD라는 직책을 떠나서 그냥 한 명의 애호가 입장에서 뽑은 작품들이니까요. 그래서 발간/발매일보다는 제가 작품을 접한 시점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다만 재발간된 책의 경우에는 기준이 모호합니다. <의적 메메드>는 리스트에 있는데 어째서 그보다 더 좋아하는 <우주만화>는 해당되지 않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우주만화>를 비롯한 칼비노의 기 출간작들은 제 마음 속에서는 늘 가까이에 있었나 봅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추측일 뿐입니다만.

그런가하면 스티븐 킹의 <조이랜드>는 결코 그의 최고작은 아니지만, 읽으면서 나도 조이랜드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추가했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뭘 읽으면서 '오 그거 나도! 거기 나도!' 라고 생각하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까요. <조이랜드>는 소중한 기억을 안겨줬습니다. 음. 그리고 <이아생트>는 어떤 객관적인 추천 목록에도 오르기 어려운 소설이죠. 오직 뉘앙스만이 대기처럼 황무지를 감싼 채 꿈틀거릴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반바지 당나귀>를 <이아생트>와 함께 읽는다면, 서로 아무 관계도 없는 듯한 이 '연작' 사이의 깊은 골짜기를 거닐어보는 것만큼 어둡고 또 만족스러운 일도 드물지 않을까... 이런 식입니다. 이 리스트는 모범적인 추천 목록이 아니더군요. 그래서도 안되겠지만요.

음. 예년에 비하면 취향이 좀. 굳었습니다. 딱딱해졌어요.

음... 네.

제 경우, 시간이 갈수록 어떤 한 분야에 깊이 다가가기가 점점 더 어렵습니다. 조금씩 더 얼어가는 땅을 파는 기분입니다. 어느 시점이 지나면 삽날 따위는 땅에 박을 수조차 없게 되죠. 도구를 곡괭이로 바꿔야 할 때인데 이게 더 무겁습니다. 요령도 삽질과는 달라서 새로 익혀야 합니다. 그러나 땅을 파려면 그 수밖에는 없습니다. 독서와 지성에 대해서라면 이제 앞으로는 영영 더 추워질 날들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지성이 중지하는 시점을 죽음이라고 가정할 때, 이제 남은 날들은 일말의 예외 없이 그 겨울의 중심으로 걸어들어가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면 역시 쓸쓸합니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삽을 들고 있다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같은 양의 성취를 얻기 위해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더 무거운 도구와 더 많은 모닥불들을 더 추워진 세계 속에서 구하고 주워야 합니다. 그런 행동과 관찰이 지혜를 안겨 준다고들 말하는 모양이지만 사실은 미지수입니다. 정말 그렇게 되면 좋기는 하겠지만요. 그래서 저는 지혜가 일종의 소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혼의 모닥불이랄까. 늘 필요한 것이지만 땅을 대신 파 주지는 않습니다...


모두 복된 겨울 맞으시기를 바랍니다. 




목록은 모두 무순입니다. 현재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작품들은 링크를 붙여 놨습니다.

아마 분명히 빠뜨린 게 있겠지요. 기억이 안 나는 건 그 작품이 인상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던 시절도 있습니다만, 언젠가부터는 다 제 탓입니다. 매우 치소서.





-올해의 음반들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 1권 & 2권 / 페터 힐(피아노) / 국내 미발매(Delphin)

말러 교향곡 2번 / 제임스 레바인 지휘 / 빈 필하모닉 / Orfeo

찰스 로젠 콜롬비아 & 에픽 박스 세트 / 찰스 로젠 / SONY

리히테르의 슈베르트 실황 세트 / 스비야토슬라프 리히테르 / Melodiya

바흐 푸가의 기법 / 블라디미르 펠츠만 / Nimbus

아이브스, 조지 크럼 가곡집 / 잰 디규타니(메조소프라노), 길버트 칼리쉬 (피아노) / Bridge

스카를라티 주제에 의한 변주곡 프로그램 / 마탄 포랏 선곡 및 연주(피아노) / MIRARE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 / 아니 피셔 / Hungaroton

스크랴빈 피아노 소나타 2, 3, 5, 9번 / 아나톨 우고르스키 / 국내 미발매(DG-Japan)

슈만 다비드 동맹 무곡 외 / 아나톨 우고르스키 / 국내 미발매(DG)

베토벤 '자작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소나타 '월광' '템페스트' / 아나톨리 베데르니코프 / Denon(국내 미발매??)

바흐 파르티타 및 영국 모음곡 전곡 / 아나톨리 베데르니코프 / 국내 미발매(Venezia)

루이지 노노 '힘과 빛의 물결처럼' 외 / 헤르베르트 케겔 지휘 / 아마 국내 미발매(King Records 또는 베를린 클래식스)

스크랴빈 피아노 소나타 1집 / 베른트 글렘저 / NAXOS



              


             







-올해의 영화들


그리즐리 맨 /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

솔라리스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올해의 책들


어린이 문학의 역사 / 세스 레러 지음, 강경이 옮김 / 이론과실천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프루스트와 기호들 / 질 들뢰즈 지음, 서동욱-이충민 옮김 / 민음사

숨겨진 풍경 / 후쿠오카 켄세이 지음, 김경인 옮김 / 달팽이

반바지 당나귀 / 앙리 보스코 지음, 정영란 옮김 / 민음사

이아생트 / 앙리 보스코 지음, 최애리 옮김 / 워크룸프레스 **<반바지 당나귀>와 함께 읽으면 효력이 배가됨

제르미날 /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옛 거장들 /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김연순-박희성 옮김 / 필로소픽

의적 메메드 / 야샤르 케말 지음, 오은경 옮김 / 열린책들

음악의 기쁨 (전 4권 중 아직 3권까지만 나옴) / 롤랑 마뉘엘 & 나디아 타그린 지음, 이세진 옮김 / 북노마드

리슨 투 디스 / 알렉스 로스 지음, 장호연 옮김 / 뮤진트리

레트로 마니아 / 사이먼 레이놀즈 지음, 최성민 옮김 / 작업실유령

미시시피 미시시피 / 톰 프랭클린 지음, 한정아 옮김 / RHK

소로의 자연사 에세이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김원중 옮김 / 아카넷

꿈 /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배수아 옮김 / 워크룸프레스

킹 /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 전집) /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전국노래자랑 / 변순철 사진집 / 지콜론북

드러누운 밤 / 훌리오 꼬르따사르 지음, 박병규 옮김 / 창작과비평사

성소녀 / 쿠라하시 유미꼬 지음, 서은혜 옮김 / 창작과비평사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중단편집) / H. P. 러브크래프트 지음, 김지현 옮김 /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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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4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26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4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6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기새 2015-04-07 15:36   좋아요 0 | URL
으음..ㅠㅠ 남자분의 입장에서 보면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합니다. 컨디션이 좋을 때 다시 도전해봐야겠어요 홍홍..

2015-04-14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14 1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