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서점에서 예약판매라는 개념이 언제 시작됐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베스트셀러 후보였을 것이다. 어떤 내용의 컨텐츠인지 확인할 수 없더라도 그 작가에 대한 신뢰만으로도 기꺼이 구입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약판매가 태어났다. 일종의 팬덤 행위다. 컨텐츠에 대한 확인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약판매는 재화를 지불하고 컨텐츠를 구입한다는 일반적인 문화 상품 거래의 상식을 벗어나 있다. 그때 컨텐츠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 재화와 교환되는 것은 바로 구매자 자신의 애정과 기대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책을 기다리며 자신이 이미 그 책의 소유권을 갖고 있음을 떠올리는 기쁨과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책과 만나고 그 소감을 피력할 수 있는 선제적인 위치에 대한 기대. 그리고 그 모든 시나리오들을 포함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재확인하는 즐거움. 그것은 소비를 통한 (자기) 생의 찬미다. 기다릴 때부터 시작된 기쁨이란 구매자가 자신을 위해 쓰는 희망의 발문인 셈이다. 따라서 예약 구매자는 합당한 소비를 한 것이다. 그는 오직 자신만을 위한 존재하지 않는 발문을 갖고 있다. 단지 가치 교환이라는 측면에서 상식적이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상식은 사랑 안에서는 쓸모가 없다.


성공적인 예약판매가 몇 차례 이어지면서 예약판매를 희망하는 도서도 늘어났다. 베스트셀러가 될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가능성이 있는 책들이 뛰어들었다. 그런 책들은 순전한 애정을 피력할 수 있는 독자층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이벤트를 시도했다. 예약 구매할 때만 적립금을 더 준다거나 특별한 선물을 준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그 작가는 괜찮은 사람이지만 일단 새 책의 평가를 기다려볼까 하고 망설이던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었다. 어차피 살 생각 갖고 있지 않으셨나요, 지금이 찬스인데 혹시 다시 생각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예약판매에는 선물이 추가되었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애정은 선물을 통해 벌충되었고 그 책들의 예약 구매는 가까스로 합당한 소비의 반열에 올라섰다. 또는 그렇다고 받아들여졌다.


뒤이어 마지막으로 잘 팔리지 않을 확률이 높은 책들이 예약판매를 시도했다. 선물을 준다고 해도 기본적인 애정을 구할 수 없는 책들이므로 예약판매는 실질적으로 판매 발생 효과가 없다. 서점도 알고 있고 출판사도 알고 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실제로 책이 발매되기 전에 서점에 노출시켜 좀더 오래 보이고 싶다는 소박한 열망이다. 출판사 미팅 때 그런 작은 열망들을 들으면 나는 곧바로 조삼모사의 가능성을 이야기해 준다. 미리 등록되면 정작 책이 실제로 나왔을 때에는 신간 목록의 아래쪽으로 내려가 버릴 거라고, 그건 확실한 리스크라고 말한다.


주문하고 받아볼 때까지 2주 가까이 걸리는 상태로 처음 등장하는 게 옳은 전략일까. 독자가 정말로 이 책을 그렇게 기다리고 있을까. 존재하지 않는 컨텐츠 대신 어떤 장점이 독자들로 하여금 돈을 내도록 만들 수 있을까.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정말로 그걸 몰랐던 마케터는 앉은 자리에서 고심에 빠지기도 한다. 물론 이미 알고 있는 마케터들이 더 많다. 그러나 예외는 거의 없다. 예약판매는 진행되고 그 책들은 거의 잘 팔리지 않는다. 분야별 새 책을 열람할 때마다 새로이 실패한 예약판매 도서들이 목록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


안다. 할 수 있는 게 예약판매뿐이기 때문이다. 새 책이 나왔으니 뭐라도 해야 했고, 여러 사정을 감안한 뒤에 '그래도' 예약판매라도 하기로 결정했음을 나도 알고 있다. 마케터와 내가 미팅을 할 때에도, 그 전에 메일을 주고받을 때에도 우리는 실패를 예감하고 있다. 혹시라도 터질까 로또를 긁는 심정과는 다르다. 실패가 뻔한 이벤트를 기획하는 마음은 이미 합당하지 않다. 그곳은 최소한의 합리성도 없는 부조리의 영역이다. 마케터와 나는, 또는 나는 그저 애도하는 것이다. 받아들여지지 못할 운명을 안고 갓 태어난 책과 그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서로를.


대학 다니던 시절, 어느 날 후배 한 명이 자취방에 찾아왔다. 후배는 술을 약간 마시고 왔다고, 이런 얘기를 맨정신으로 하기가 어려웠다고 말문을 열었다. 나는 커피를 타주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후배는 그때부터 울었다. 자기는 사진을 잘 찍고 싶은데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숫기가 없어 교수들을 찾아가지도 못하고 기껏 동아리 학습부장을 찾아오는 정도의 친구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작업을 계속 하려면 천재적이거나 자신을 의심하지 않거나 연줄을 잘 타는 능력 중에 두 가지 이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옆에 앉아서 가만 듣고만 있었다. 안되는데 하고 싶어 하는 바보 같은 마음, 완전히 부족한 재능을 가진 자신에 대한 회의가 흘러내렸다. 태어나서 잘 하고 싶은 게 이거 딱 하나인데 이거 그냥 잘 할 수 없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후배는 얼마 전에 완성했다는 포트폴리오를 보여주었다. 조악한 문장과 진부한 사진으로 가득한 의미 없는 작업이었다. 후배 자신도 알고 있었다. 쓰잘데기 없는 의지의 결과물. 아무데도 소용되지 못하고 그저 살아있고 하고 싶다는 의지로만 남아있는 앙상한 출력물들은 그해 내가 본 가장 감동적인 작업이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얼마 전부터 어떤 책의 예약 판매 요청도 재검토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 하자. 어쨌든 태어나버렸으니까, 태어나버렸고 시작'되어' 버렸으니까 우선 할 수 있는 단 하나를 일단 하자. 우리 자신을 위해 하자. 우리는 그저 열심히 하고 마음에 새긴 뒤에 떠나보낼 수 있을 뿐이다. 탁 털고 잊어버리느니 안타까워하면서 떠나보내는 것이다. 직업과 업보의 업이 괜히 같은 한자일까. 책 파는 업장을 짊어진 사람에게 새 책은 다 아이이고 별인 걸. 그러니 태어난 것들에게는 예의를 갖추어 헤어질 수 있게끔 하자.


오늘 결국 예전에 잃어버린 최승자의 첫 시집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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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l 2014-06-23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슬퍼.... 씨.. 슬퍼.... 슬프고말았다..

외국소설/예술MD 2014-06-26 15:43   좋아요 0 | URL
감사..죄송..합니다.;;

♥조현준&조하은♥ 2014-07-10 0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일즈시리즈도 박스세트가 나왔네요.저번 PKD 사태의 재판이군요. 이번에도 MD님께서 나서주세요.한국에서 SF팬은 힘드네요. 늦게사자하면 절판걱정, 그래서 나오는 족족사면 땡처리 반값할인에 이벤트 불이익까지....

외국소설/예술MD 2014-07-11 11:22   좋아요 0 | URL
지난번 박스 증정 이벤트가 배송 관련 등 이런저런 문제가 많아서 이번에는 좀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게 되면 공지하겠습니다.

달문 2014-12-01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약판매라는 말이 이렇게 슬픈 거였나요.. `태어난 것들에게는 예의를 갖추어 헤어질 수 있게끔 하자`.. 태어나자마자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요즘이라 더 와닿네요ㅠ.ㅠ

외국소설/예술MD 2014-12-17 17:17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책을 만드는 건 때에 따라서는 뭔가.. 네. 이미 마음이 쓸쓸해진 채로 시작해야 하는 책들도 있죠. 책 만들고 계시는군요. 아마 그럴 거라고 짐작은 했습니다만. ㅎㅎ 잘 지내시기 바래요. 좋은 겨울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