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은 좀 이상합니다. 계속 안 써집니다. 이유도 고민해 보고 몇 차례 다시 써 보기도 했습니다만 잘 안 됩니다. 어쩌면 아직까지도 마음 속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작품을 마음 속에 두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작품은 바로 주톈원의 <황인수기>입니다. 채 터지지 못하고 어딘가를 맴돌고만 있던 20세기말의 대만/홍콩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 소설을 말하다 보면 저는 자꾸 그 시절의 제 자신을 끄집어내게 됩니다. 엠디 추천 소설 코너는 에세이가 아니기 때문에, 저는 그 기억을 떼어놓고 썼습니다. 그런데 자꾸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건 별 문제는 없는 '오피셜한' 내용으로 완성시킬 수는 있었겠지만 그런 '책 소개'는 아무래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고민도 해 보고 세 번쯤 다시 써 보고 고쳐도 봤지만 역시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는 이 코너에 너무 애착을 가진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래는 그냥 아까운 책을 보여주기만 하려는 코너였고... 책 소개는 매번 조금씩 길어졌지요.


이 코너에 점점 더 얽혀들고 있습니다. 힘들기도 하고, 가끔은 행복할 때도 있습니다.


이달의 선정작은 단 하나, 주톈원의 소설 <황인수기>입니다. 회복할 수 없음을 전제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편력입니다. 이 편력에는 동성애를 둘러싼 역사적 반응의 변화를 관찰하는 지적 여정도 포함됩니다. 역사에 대한 지적 편력을 자랑하는 작품이라면 저는 늘 우엘벡의 <소립자>를 먼저 떠올립니다. 담대하면서도 냉소적이고, 그 냉소가 동시대인과 자기자신을 꿰뚫고 지나간다는 측면에서는 슬픈 소설입니다. <황인수기>도 슬픕니다. 다만 그 슬픔은 냉소가 아니라 암중모색에서 옵니다. 절망은 시작부터 거기에 있었으나, 또한 편력의 여정 역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어질 것입니다.


앞서 저는 이 작품에 대해 '회복할 수 없음을 전제로 펼쳐'진다고 말했습니다. 비참한 종말은 시작부터 예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끝장났다고 말하지 않을까요. 죽음을 눈앞에 두고 비로소 퍼뜩 깨닫는 <이방인>의 주인공처럼 뭔가 실존주의적인, 개체초월적인 깨달음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면 어떤 연대의 가능성에 주안점을 둔 걸까요? 이역시 부정적입니다(이 부정 과정이 퍽 아름답습니다만). 대충 이렇게 소거법으로 정리해 보면 남는 건 통제 불가능한 사랑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저는 <소립자>도 사랑 이야기여서 좋아합니다. <소립자>는 68혁명세대의 시대상황을 날카롭게 파악하고 그것을 에피소드의 모습으로 재현한 솜씨도 대단히 멋지지만, 그보다도 그 멋진 솜씨로 주조해낸 총열의 가늠쇠에 조준된 사랑이 너무나 멀리에 있는 것처럼(쏘아도 맞추지 못할 것입니다) 느껴지는 게 좋습니다. 이토록 우아하고 정밀한 강선을 가진 총으로도 맞추지 못할, 아름답고도 불가능한 표적을 망연히 바라볼 때의 심정 말입니다.


<황인수기>가 사회와 역사를 관찰하는 이유도 역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을 어떻게 관용할 것인가. 20세기말의 아시아에서 타인(동성애자)의 사랑은 제도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인가? 받아들여지는 방법은 동성애자를 '정상 사회'로 편입시키는 방법인가, 아니면 아예 정상-비정상의 개념을 중화시켜버릴 수도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되면 행복해질까? 역사-사회로부터 시작해서 그 사회 안의 개인들로 사고의 범위를 좁히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분석은 불가능해집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특정 분석 방식은 특정 규모의 집단에게만 효력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그 집단 규모가 '너와 나'에 이르면 아무것도 통용되지 않습니다. <황인수기>의 주인공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 더 알아가며, 미래조차 사랑의 실패로 점철될 것이라는 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패는 예견되어 있고 결코 회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연애하는 자의 인권, 연애할 권리'는 결국 그 누군가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영화, 사상, 소설, 역사 등 자신이 꺼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엮어 사랑이라는 개념을 포획할 그물을 만듭니다. 다양한 소재로 만들어진 무지개색의 그물이지요. 물론 그는 자신이 원하는 새를 잡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동성애자들을 위해서 사회적 합의에 맞서 투쟁한 것일까요? <황인수기>는 정상-연애라는 개념을 둘러싼 사변소설일까요? 물론 어느정도는 그렇습니다. <황인수기>는 정상연애에 대한 성실한 성찰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보다도, 그러니까 그물보다도 자꾸 그물을 짜는 남자를 쳐다보게 됩니다. 사랑에 오염된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오직 그물짜기 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 만들어내는 그 무엇도 '소용'을 따지지는 않지요. 줄 사람을 떠올리지 않는 목도리짜기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망설임이, 망설이다 못해 손에 주워든 그물 조각들과 그물을 짜는 몸이 그려내는 풍경은 정말로 세기말의 허우 샤오시엔 영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허우 샤오시엔이 감독한 대부분의 영화 시나리오를 이 소설의 작가가 썼기 때문이겠죠. 바로 여기가 제가 자꾸 멈추어야 했던 부분입니다. 앞서 <소립자>를 총에 비유했는데, 그 총이 그토록 강건하고 정밀해 보이지 않았다면 그걸로 무엇을 노리건 간에 저는 별 인상을 받지 못했을 겁니다. <황인수기>도 아름답기 때문에 작동합니다. 자연광이 힘겹게 밀고 들어오는 어두운 도시, 공격적인 대사들조차 휩쓸어버리는 정적, 그 정적을 중력처럼 내뿜는 여백, 그리고 그 중력계 인근을 맴돌며 때로 그곳의 인간들보다 존재감을 과시하는 무의미한 사물들. 주톈원이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 시나리오를 썼다는 사실을 몰랐어도 제가 그 장면들을 그릴 수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말로 <비정성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달의 선정도서에는 적립금이 붙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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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르 2013-06-19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보겠습니다

외국소설/예술MD 2013-06-25 22: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마음에 드시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