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코너로 독자 여러분의 투고작을 받고 있습니다.

참고로 여기 공개된 작품은 저작권과는 관계 없으나 추후 다른 공모전 등에 개정 응모 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응모전마다 기존 발표작에 대한 개념이 달라서 명확하게는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 ^^;) 

clancy님의 투고입니다. 즐겁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아이들의 장난 

살랑살랑 봄바람에 총각 가슴도 처녀만큼이나 설렌다. 하물며 눈앞에 연분홍 플래어스커트와 착 달라붙어 몸매가 드러나는 티셔츠 차림의 아가씨가 하늘하늘 걸어간다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바람을 타고 온 향기가 코를 간질인다. 골목을 나오는 찰나 내 앞을 스쳐간 짧은 사이 시야에 박힌 그녀의 프로필이 아른거린다. 뽀얀 피부, 볼록한 이마, 오뚝한 코, 소녀시대 윤아를 연상시키는 청순하면서도 장난기 어린 이중적 매력.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 뒤를 쫓으며 원래 가려던 길과는 반대로 가고 있었다. 딱 내 이상형의 외모, 차림으로 보아선 대학생이나 되었을까. 불알 달고 태어나 이런 인연을 그냥 흘려보낼 순 없었다. 어떻게든 말이라도 걸어 볼 생각으로 다가가는 순간 그녀가 멈춰 섰다. 혹여 내가 쫓아오는 걸 눈치 챈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움찔했지만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기 위한 것임을 곧 눈치 챘다.  

어떻게 말을 거나 머릿속으로 궁리하는데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바로 옆에 쬐깐한 사내애 셋이 우르르 몰려 선 게 보인다. 어림잡아 3,4학년이나 되었을까. 녀석들은 그녀 뒤에 몰려서선 뭐라고 쑥덕거리더니 낄낄 거렸다. 바로 옆이다 보니 녀석들 이야기가 어쩔 수 없이 귀에 들려온다.  

“뚤래! 난 5천원.” 

“씨발, 그럼 엄창 걸고 만원!” 

하, 쥐방울만 한 녀석들이 말본새 하고는 절로 혀를 차게 된다. 슬쩍 보니 멀쩡하게 생긴 것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메이커, 명품들로 치장한 도련님들이다. 개중 하나가 흘끔 그녀를 곁눈질 하며 음흉하게 웃고 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쨌든 놈들도 남자였고 그녀는 팔랑거리는 스커트 차림이다. 저 나이또래 녀석들이 어떤 놀이를 즐기는지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으니, 아니다 난 저 정도로 되바라지진 않았지.  

순간 그녀와 가까운 쪽 녀석이 살금살금 그녀 옆으로 다가선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다. 나의 우려가 맞아 떨어진 건가. 순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저 놈들이 예의 ‘아이스께끼’를 할 때까지 기다리는 거다. 그리곤 도망치려는 녀석을 잡아 혼내준다. 그러면 나에 대한 그녀의 호감도가 상승할 것이다. 자연스레 대화로 이어지고 번호도 딸 수 있을지 모른다. 이건 하늘이 내린 기회란 생각마저 들었다. 순간 가운데 녀석이 옆의 녀석 옆구리를 툭 치는 게 보였다. 일단 현행범으로 잡을 수 있게 기다리자, 그녀의 치마 속 구경은 덤으로 생각하고. 

신호를 받은 녀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의 기대와는 달리 녀석은 무심한 듯 앞으로 한걸음을 내딛었다. 역시 익숙한 장난이었다. 신호를 기다리며 신호등만 줄곧 바라보는 사람들은 의외로 적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딴 짓을 하기 마련이다. 지금의 그녀처럼. 그때 누군가 앞으로 나서면 무의식중에 신호가 바뀐 줄 알고 따라 나서게 되는 거다. 그리고 잘만하면 옆의 사람이 신호가 바뀌지 않았는데도 착각해서 횡단보도를 건너게끔 할 수 있다. 물론 무심코 앞으로 나섰던 사람은 바보가 된 느낌을 받으며 금방 뒤로 물러서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녀는 스마트폰 화면에 정신이 팔려 주위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끼이익!’ 

타이어가 아스팔트와 마찰하며 일으키는 소음이 귀청을 흔들었다.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그녀가 공중에 떠올랐다. 가냘픈 몸은 순식간에 10여 미터를 튕겨 나가 반대편 차선에 신호 대기 중인 은색 소나타 후드 위로 떨어진다.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이 하늘을 보고 있다. 하지만 후드 반대쪽에 걸린 다리는 지면을 향하고 있다. 충격으로 허리가 완전히 돌아간 모양이다.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녀를 친 택시 운전사가 문을 열고 나왔고 은색 소나타 운전자도 벌벌 떨며 밖으로 나오다 그만 주저앉는다. 소란 속에서도 그녀는 미동조차 않는다. 나는 그제야 망할 놈의 초딩들을 찾기 시작했다. 횡단보도 앞에선 이미 녀석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길 건너 코너를 돌아가는 녀석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어가던 놈들 중 하나가 옆의 녀석을 툭 친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척 했던 놈이다. 못된 장난질의 주동자. 멍청한 내가 순간이나마 응원을 보낸 녀석. 순간 시야에 들어온 광경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옆의 아이가 놈에게 만 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고 있었다.

 

 
 



오해의 변 

"그래, 끝내. 이 미친 새끼야!“ 

토요일 아침 전화벨소리에 비몽사몽 기다시피 잠자리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여보세요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녀의 분노어린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리고 내가 어, 저, 뭐 따위를 늘어놓는 사이 그녀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린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회사 일이 바빠 몇 차례 약속을 어긴 것으로 심하게 다투긴 했지만 거기에 대한 화해의 제스처를 바로 어젯밤 전달했었다. 간밤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그녀의 이런 반응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12월, 이제 두 주 후면 크리스마스였고 뒤이어 송년이네 신년이네 이벤트가 이어질 텐데 그 전에 우리 사이 꼬인 감정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해서 어젯밤 그녀가 좋아하는 군고구마를 사들고 찾아갔던 것이다. 늦게까지 야근을 하느라 그녀가 자취하는 원룸 건물이 보이는 골목 어귀에 도착했을 때엔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12월 서울의 밤공기는 기록적 추위를 보이고 있었다. 영하의 기온에 얼어붙은 얼굴은 칼바람을 정면으로 맞을 때마다 칼로 에이는 것 같았다. 게다가 달랑 하나뿐이던 가로등도 맛이 가버려 골목은 칠흑처럼 컴컴했다. 덕분에 튀어나온 블록에 발이 걸려 제대로 자빠지기까지 했었다. 그 바람에 가슴에 품고 있던 종이봉투에서 군고구마들이 튀어나와 골목길 위를 굴렀다. 핸드폰 액정 불빛에 의지해 얼른 주워 담긴 했는데 혹시 흙이라도 묻었던 것일까? 하지만 겨우 그런 정도로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낼 여자는 아니다. 감기 기운이라도 있는지 머리가 욱신거렸다. 쪼그리고 앉아 다리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뭐가 문제인지 떠올려 본다. 전달 방법이 문제였을까. 토라진 그녀가 제대로 상대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문 앞에 봉투와 편지를 놓아두고선 건물을 빠져나와 문자를 보냈었다. 

‘문 밖에 선물 놔두고 가. 잘자용.’ 

발신함에 저장된 문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흔히 하는 농담처럼 이모티콘이 없어서 그런 건가. 아니다, 그것도 이 정도 화를 불러일으킬 이유는 아니다. 그럼 편지가 문제인가? 편지의 내용은 나의 잘못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들까지 조목조목 열거하며 무조건 잘못했다며 용서를 비는 것이었다. 근무 시간 틈틈이 쓰긴 했지만 몇 번이고 내용을 확인했고 심지어 팬시점에서 산 낯 뜨거울 정도로 아기자기한 편지지에 손 글씨로 직접 정성들여 쓴 것이었다. 좋아했다면 모를까 화낼 이유는 없는 형식과 내용이다. 아님 고구마인가, 아니다 가늘고 길어 볼품은 없지만 맛만큼은 끝내주는 고구마는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품종이다. 그럼 대체 뭐야? 문제는 다른 데 있나. 내가 또 뭔가 그녀 성질을 건드릴 만 한 짓을 했었나? 갑갑한 마음에 마른세수를 한다.  

‘뭐지?’  

뭔가 구린 냄새가 나서 보니 오른손 끝에 희미하게 갈색 얼룩이 묻어있는게 보인다. 코를 가져다 대 보니 제대로 똥냄새가 올라온다. 어째서? 순간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진다. 길고 가느다란 고구마, 영하로 떨어진 기온, 어두운 골목길, 자빠지며 쏟아진 고구마를 주워 담던 일. 그녀가 사는 동네엔 유달리 유기견이 많다. 그 골목길을 오가며 몇 번인가 개똥을 밟을 뻔 했던 경험도 있었다. 

설마! 

아마도 그녀는 간밤에 바로 고구마를 먹진 않았을 것이다. 요즘 다이어트 중이니까. 편지만 읽어보고 아침이나 되어서 봉투를 열어봤겠지. 모든 게 아귀가 들어맞는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내 이야길 믿어줄까, 내 사과를 받아줄까. 이번엔 좀 더 제대로 된 선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향수가 좋을 것 같다.

 


 


형의 이별 공식

효정이가 사라졌다. 3일 전부터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 혼자 사는 자취방엔 몸싸움의 흔적이 있었다. 옆집에서도 실종 전날 밤 남자와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오랫동안 준비한 프랑스 유학을 4주 앞두고 벌어진 일이라 경찰에서도 단순가출은 아닌 것으로 보고 있었다. 자연히 의심의 눈길은 남자문제로 향했고 경찰이 나를 찾아왔다.  

“민형도씨 혹시 형님은 어디 계신지 알아요.” 

실종일 알리바이와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난 때 등을 물어보던 떠꺼머리 형사의 마지막 질문이었다. 형에 대해 물어본다는 건 효정과 형의 관계도 알고 있다는 얘기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쾌한 불안이 뱃속에서 꿈틀거렸다.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리며 형사를 돌려보내고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두서없는 상념의 단편이 얼음 결정마냥 가지를 뻗어나간다. 효정과 형은 같은 과 선후배 사이였다. 서로 술자리에서 몇 번인가 마주치던 둘은 어느 새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형의 이름은 형진, 둘이 같은 알파벳 이니셜이라며 재수생이던 나에게 헤죽거리던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내성적이고 수줍은 형에게 효정이는 곧 질리고 말았다. 싸움이 잦아졌고 언성이 높아질 때도 늘었다. 두 번째 수능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던 어느 겨울밤 효정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과 심하게 다투었다며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했다. 그녀의 불만을 받아주며 밤새 술을 마셨고 다음날 아침 눈을 뜬 건 허름한 모텔방 침대에서였다. 죄책감과 불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재수생이란 신분에 억눌렀던 욕구는 지난 1년간 분출할 구석만 찾고 있었으니까.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쨌든 형과는 한 지붕 아래 살고 있었으니까. 사정 이야기를 들은 형은 힘없이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그럼 안 되잖아.” 

그 모습은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우리 형제가 애지중지하던 햄스터가 죽었을 때였다. 내다버리라는 어머니의 말에 곧잘 수긍했던 나와 달리 형은 울먹이며 그럼 안 된다고 웅얼거렸다. 형은 미물에게 쏟던 애정을 쉽게 거두지 못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형은 똑같았다. 

한동안 형이 효정이에게 계속 매달린다는 사실을 그녀의 입을 통해 들어야 했다. 심지어 나에게 형을 설득해보라는 말까지 했다. 드디어 대학에 합격해 신입생 기분을 낼 시기였기에 나는 효정이도 형도 귀찮게만 느껴졌다. 효정의 연락을 씹어버리기 시작했고 형과의 사이도 어색해졌다. 결국 형은 자원입대했고 얼마 못가 나와 효정이의 관계도 끝이 나버렸다.  

어느 새 밤이 되었다. 집엔 나 혼자였다. 부모님은 나흘 전부터 강원도에 가있었다. 형이 탈영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신병의 탈영, 그리고 헤어진 여자친구의 실종. 다들 빤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둘이 다시 만나고 있다는 건 모를 것이다. 언젠가 전화로 형이 말해줬다. 효정이 면회를 왔다고, 외출 끊고 부대 앞에서 만났다고. 아직 미필이라도 그게 무슨 소리인지 정도는 알고 있다. 마침 핸드폰 벨이 울렸다. 효정이 번호다. 순간 미친년소리가 절로 나왔다. 어쩌면 우리 형제 사이에서 핑퐁질 하는 걸 즐기고 있는 지도 모르지. 

“여보세요” 

아무런 답이 없다. 다시 여보세요 묻고 귀를 기울이자 작은 숨소리가 들린다. 

“뭐야, 효정이 너 혹시 우리 형이랑 같이 있어?” 

순간 ‘가가가각’ 무언가 긁어대는 듯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른 장작 갈라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긋난 태엽소리 같기도 한 기분 나쁜 소리에 난 몸이 굳어버렸다.  

죽은 햄스터는 락앤락에 담겨 한동안 냉동실에 보관됐다. 마냥 썩게 방치할 수도 없고 형의 반대에 버리지도 못했으니까. 그러던 어느 밤엔가 나는 보았다. 아무도 없는 주방, 냉장고 불빛 속에서 락앤락 통을 든 형이 무언가 먹고 있었다. 가가각, 가가각. 작은 뼈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귀에 날아와 박혔다. 그것은 사랑을 쏟던 존재를 차마 보내지 못한 형이 선택한 방법이었다.
가가각, 가가가각. 전화기에서 그날 밤 들었던 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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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 2011-12-06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의 장난'은 잘 읽긴 했는데 마지막이 이해가 되지 않네요;
'오해의 변'은 웃음이 나오게 하는 작품이네요. *을 집어들고 있는 여자를 상상하면서 재밌게 읽었습니다.
'형의 이별공식'은 마지막이 오싹~하네요. 역시 재밌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