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는 詩
사진집은 왜 잘 팔리지 않을까. 직접 읽어보면 알게 된다. 브레송의 인물 사진집 <내면의 침묵>을 간단히 훑는 데는 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글이 거의 없으니, 한 페이지에 한 컷 들어간 사진만 보는 데는 몇 초면 충분하다. 그런데 가격은 3만 원이 넘는다. 3만 원이면 왠만한 책은 뭐든간에 살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십수 분이면 읽을 수 있는 책에 그 돈을 쓸까.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옛 거장들>에 나오는 주인공은 늘 미술관의 특정 그림 앞에 앉아 있다. 그는 그 그림과 자신이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때 그림은 '멋진 물감칠' 이상의 내면적인 힘을, 하나의 음악을 드러낸다. 그 음악은 누구에게나 들리지는 않아서, 특정한 감상자와 특정한 그림 사이에만 있다. 그렇다면 특정한 그림과 수많은 감상자 사이에는 수많은 음악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나의 그림은 작품의 종결이 아니라 2라운드의 서곡일 뿐인 것은 아닐까. 칸딘스키의 그림은 누군가에게는 바흐, 다른 누군가에게는 베베른, 베르크, 모짜르트, 아니면 르네상스 이전의 찬송가가 될 것이다. 물론 트로트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림의 노래를 들어본 적 있는 감상자는 이후로 순례자가 된다. 세상의 수많은 그림들 중 하나는 어쩌면 그/그녀에게 생의 비밀을 귀띔해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의 그림 앞에 오래 머물러야 한다는 이야기는 바로 그 때문이다. 뭔가 느낌이 오는 그림 앞에서, 순례자는 노래를 기다려야 한다. 겉핥기 식의 전시회 감상이 부질없는 이유다. 그리고 또한 사진집을 십 분 안에 훌렁훌렁 읽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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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음악이라면 사진은 산문시다. 사진의 이야기는 소리나지 않고 서술된다(혹은 중얼거림이다). 사진은 묘사하는 대신에 '현실을 옮겨박았'기 때문이다. 사진 속의 일들은 (심지어 그게 연출일지라도) 모두 실제로 있었던 것들이어서, 감상자는 자신도 모르게 사진의 이미지 속으로 뛰어들어 피사체의 정체와 사진 속 사건의 앞뒤를 상상한다. 이때 감상자의 빛바랜 기억과 몇 개의 추억들이 사진의 이미지에 겹치면서, 사진의 이야기는 곧 감상자의 과거에 덧대어진다. 이 과정은 사적이고 내밀한 작업이다. 음악 혹은 공연이 아니라 기록이며 시 쓰기이다. 사진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는 침묵 속에서 생겨나고 계속된다.
때문에 사진은 그림에 비해 책이라는 형식에 더 어울린다. 아니, 책이야말로 그 내밀함과 조용함을 통해 진정한 사진 전시회가 된다. 사진의 순례자는 그리하여 '이상하게 비싼 책'을 산다. 사진집들 사이를 순례한다. 순례자들은 매 페이지의 사진 하나하나가 어떤 시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본전이 아까울 리 없다. 순례는 본전 뽑자는 투자가 아니라 '마땅한 것'이다. 순례는 명상이며, 불교 말씀처럼 '모든 이미지를 거울삼아 나와 만나는 것'이다. 좋은 사진집은 도저히 빨리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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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트 피아프, p.129
에디트 피아프. 작은 몸집에서 나오는 낭랑한 목소리 때문에 참새라고도 불리웠던 여자. 위대한 샹송 가수. 그녀는 카메라를 쳐다보지 않고 있다. 좁은 어깨는 마치 들려진 것 같다. 두 개의 그림자, 좌우에 드리워진 나무의 그림자가 그녀를 안에 가두고 있다. 체크무늬가 강박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또한 옳겠다. 마지막으로, 맨살을 드러낸 벽이 온 배경을 채운 채 구도상의 탈출로를 다 막아놓았다. 강박에 대해 말해야 할 때다. 그러나 에디트 피아프가 강박증에 빠진 사람이었는가? 아니다. 피아프는 평생을 걸고 사랑을 원했을 뿐이다. 그녀의 삶을 실패라고 말해야 한다면, 그녀가 사랑을 원했기 때문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강박일까? 사랑이?
강박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운명이 가지고 있었다. 사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결과 뿐이다. 왜 운명이 강박적으로 그녀의 삶을 훼방놓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찾을 수 없는 압박이 사진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그녀는 무표정하다. 그녀는 행복은커녕 불행에조차 관심이 없다. 운명을 이겨내느냐 하는 고민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쳐다볼 때가 아니면 사람들과 눈 마주치기조차 어려워하던 작은 새에게, 그런 거대한 고민은 허풍이거나 사치에 불과했을 것이다. 에디트 피아프는 사랑을 구했고 구하지 못했다. 그것으로 그녀의 삶은 완결되었다. 계속되는 불행은 그저 끝없이 스쳐가는 바람일 뿐이었다. 사진속의 그녀는 빛이 불어오는 방향을 따라 살짝 시선을 돌렸다. 카메라 렌즈와 채 눈맞추지 못한 그 시선은, 옆에서 불어오는 빛-바람을 흘려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사진 아래에다 연필로 '그녀는 카메라 오른쪽을 바라본다.' 라고 썼다. 내가 기꺼이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이었다.
이 사진집의 제목은 <내면의 침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