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정치적인 것이 가장 '폼'난다, 혹은 

문화 게릴라용 유격 전략전술 강해, <뱅크시, 월 앤 피스>

 

책의 원제 <Wall and Piece>는 금방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War and Peace>를 연상시킵니다. '벽'을 이용하는 아티스트의 작품집이기 때문에 재미난 말장난으로 볼 수 있겠죠. 그러나 이 제목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뱅크시의 양 측면을 모두 드러내는 중층적인 제목입니다. 그는 '벽과 조각들'을 이용해 '전쟁과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이는 곧 일탈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와 신자유/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문화 게릴라 뱅크시라는 두 가지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의 진짜 정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았죠. 경찰들의 눈을 피해 그래피티 작업을 하고 박물관의 그림들 사이에 자기 그림을 슬며시 걸어 놓는 문화 게릴라이며, "모든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의 꿈"인 팔레스타인 봉쇄 장벽(얼마나 거대한 '스케치북'인가!)에 찾아가 벽이 무너지고 하늘이 열리는 그림들을 그려 놓습니다. 공공연히 자본주의와 관료-권력을 조롱하는 뱅크시의 반권력 미술(모두가 참가할 수 있고, 세상 모든 곳이 그림을 그릴 터다)은 지금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미술과 즐거움의 관계, 미술과 정치-권력의 관계, 그리고 미술과 사람들의 소통에 관해서요.  



 
                                 <런던에서의 작업>                                                     <팔레스타인에서의 작업> 


이미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래피티 아티스트지만, 책의 서문 말마따나 뱅크시의 여정은 이제 시작인지 모릅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가 벽에 그려놓은 그림들에는 보호막이 둘러쳐지기 시작했고, 그의 작품들은 비싼 값에 거래되기 시작했으니까요.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한 '좌파 밴드' RATM의 언행 불일치(까지는 아니지만)를 생각해 보면 뱅크시가 지금껏 해 온 말들이 그의 커져가는 자본주의적 위상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지가 궁금해집니다. 어쩌면 68혁명 이후로 쭉 이어진 얼터너티브 문화의 주류 편입기에 한 사례가 더해지는 선에서 그칠 수도 있겠죠. '우리에게 사랑과 상상의 자유를 달라'는 신좌파의 구호는 늘 자본의 예쁜 포장능력에 무릎을 꿇어 왔으니까요.

체 게바라의 상품화에 반대하며 그의 초상화가 줄줄 흘러내리는 그래피티를 선보였던 뱅크시가 그저 비상한 재간둥이일지, 아니면 혁명 전야까지 영원히 어둠 속에서 그림을 그릴 게릴라일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죠. 그러나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작품만으로도 중요한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즐겁고 또한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즐겁기 때문에 정치적인 것이라는 교훈이죠. 대중들의 '즐거움'이라는 중요한 고지를 선점한 자본주의 시장의 맞선 게릴라식 역습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지, 저는 그저 기대에 차서 지켜볼 뿐입니다. (밴드도 아니니까 RATM처럼 해체는 안하겠죠...-_-;) 

참전 지원자들은 구입 및 소지, 배포를 권합니다. -예술MD 금주의 선택 

  

 

디자인, 인류와 지구를 지켜라!

                  



1. 디자인, 한국을 구출하라 : 평론가 최범의 두 번째 평론집 <한국 디자인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독재형 관치와 신자유주의를 부드럽게(!) 오가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에 종속된 한국 디자인의 진행 방향을 살펴보고 '껀수별로' 조목조목 비판합니다. 좀 어이없는 기획이었던 디자인 올림픽이나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피어나는 각종 비엔날레의 향연도 살펴보고, 국가와 디자인이 서로를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를 살핀 뒤 '이용이 아니라 공존'을 위해 시스템 자체에 수정/보완이 필요하다는(더 많은 관심이 아니라!)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당연한 결론이 아니냐구요? 그러나 이 책은 구체적인 사실 적시와 함께, 이런 책에서는 보기 드문 '행정적 대안 제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기 드문 '단행본 시론'이라 하겠습니다. 

2. 디자인, 자본주의를 돌파하라 : 평론가 서동진의 디자인 비평집 <디자인 멜랑콜리아>. 현재를 장악한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과 '신경제'간의 암묵적인 협약을 돌파하기 위한 고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대안 디자인'정도가 아닙니다. 불온서적이예요. 디자인이야말로 어떤 사회의 '드러난 겉모양'이며, 또한 (시민과 사회간의 상호 에너지 교환 장치로써의) 정치가 그 겉모습을 드러낸 부분이라는 그의 지론은 단순한 진보적 디자인 담론을 뛰어넘어 '그 다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회의 시스템과 연결된 디자인이라는 열쇠를 통해 '바깥에서 안으로' 시스템을 추적해 들어가자는 (일종의 문화적 해킹?) 얘기인데요, 현 체제 하에서는 디자인의 긍정적 발전의 한계가 너무 명백하니, "한 번, 산 자여 따르지 않겠는가"라는... 이 책의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다소 현학적인 글쓰기와는 달리 그 바닥에 흐르는 뜨거운 감성인지도 모르겠네요. 결국 현재 세계라는 매트릭스에 포섭된 수많은 디자인 운동들의 사례를 열거하며 그가 꿈꾸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사실 좀 동조하고 싶습니다. 근데 네오는 어딨나요. 

3. 디자인, 매트릭스를 돌파하라 : <인터페이스 연대기>는 한국 사람이 쓴 디자인 문화 비평서라기에는 좀 아스트랄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인간이 도구와 소통하는 방법(인터페이스)에 대해 사회문화적 접근을 시도하는 재미있는 책이예요. 핵전쟁 시나리오와 베트남전과 대도시 개발시스템의 관계 (<분산의 다이어그램:신경망 도시, 구치 땅굴, 세미라티스>), 포촘킨 파사드와 포스트모더니즘 광고/건축미학의 집합 등 재밌는 주제들이 등장합니다. 인터페이스는 항구적으로 보다 나은 것을 찾아가는 이상적인 여정이 아니라, 한 사회가 집약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를 표현하는 수단일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을 이 책은 드러내 보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역사의 인터페이스를 살펴본다는 것은 어떤 사회의 욕망 또는 히스테리의 징후를 훑어내는 작업으로도 유효한 셈이죠. 이 징후 읽기에 대해 어느정도 '징후'만 안겨주며 종횡무진하던 책은 마지막 장(<우리, 파시스트 - 테크놀러지의 강철폭풍>)에 다다라 대중친화적 인터페이스-매체의 파시즘적 공격력을 고발하는 것으로 마칩니다. 서민, 대중, 다중... 초식동물의 특성에 가까운 이 '집단'은 언제나 귀를 쫑긋 세우고 징후를 알아채지 못하면 늘 댓가를 치러야만 알게 되지요. <인터페이스 연대기>는 기민함을 좀 더 제공해 드릴겁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즈의 잦은 에러가 사실 인류를 구하기 위한 계획이란 걸 아시나요? OS의 발전속도를 일부러 늦추어 인공지능 컴퓨터의 개발 가능성을 저지 혹은 지연하려는, '다른 지구에서 온 동지들'의 놀라운 활약이 펼쳐지고 있는 요즘입니다. 인터페이스야말로 매트릭스의 표면이고 우리의 생활 구역이므로, 정신 바짝 차리시고, 데자뷰 현상이 일어나면 주위의 가장 가까운 전화기를 시야에 확보해 두시기 바랍니다. 부디 건승하시길. (앞선 윈도우즈 관련 언급은 그리폰북스의 <21세기 SF 도서관>에서 가져온 설정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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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페 일기>는... '이봐 위에. 싸우지들 말라고. 해피 홈이 최고야' 라고 속삭이는 듯합니다. 그런데 책을 보고 있으면 '그렇군 역시 해피 홈이 최고일지도 몰라', 라고 어느새 동조하게 된달까요.; 저는 아마추어 블로거의 '책'에는 점수다운 점수를 줘 본 적이 없지만, 이 책은 의외로 매력적입니다. 아마 첫경험인거 같아요 저도. 2006년 일본 블로거 대상을 탔다는데 그럴만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이들의 엽기발랄한 모습도 인상적이고, 종종 출현하는 '보는 사람에게 햇살이 쏟아지는 느낌의' 사진들도 감탄스럽습니다. 사실 그거야말로 중산층의 자기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데올로기적인 사진임은 분명하지만, 뭐 어떻단 말입니까. 그걸 알고 오히려 그걸 위해서 이 책을 집어든 거잖아요. 게다가 퀄리티도 좋고, 조금은 마력적이기까지 한걸요. 일상에 지친 분들께는 최소한 진통 효과만큼은 뚜렷할거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어쨌거나, 무지 부러운 가족입니다.; 초판 한정 제공되는 엽서는 사무실이나 집에서 행복을 부르는 부적 정도로 사용해도 왠지 작동할거 같다는 확신이 듭니다.

<콘란과 베일리의 디자인 & 디자인>은 크고 비싸고 멋져요. 전반부는 디자인계의 두 대가가 만나 각종 주제에 대해 토론을 펼친 뒤 그 결론을 책으로 옮겨 담았고, 후반부는 거의 디자인 백과사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명/지명/상품 등을 배열해 놨습니다. 때로 냉소적인 비판이 드러날 때가 더 재미있는데요. 제가 디자인 전공자가 아니다보니 디자인 백과사전식의 배열보다는 개인적으로는 문화-디자인 담론을 다루는 앞부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객관적인 가치(?)라면 역시 후반부, 국내에서는 아마 최초라고 할 수 있는 '디자인에 관한 베스트들을 모아놓은 소사전' 정도가 되겠지요. 사실, 그냥 소장용으로 꽂아놔도 폼이 막 나는 '커피테이블 북' 이기도 합니다... 아 오해마세요. 담겨있는 콘텐츠는 상당히 흥미롭고, 담겨있는 사진들도 시원하고 멋집니다. 모더니즘 미학의 극치를 포드 공장 내부에서 발견하다니!

<한국 도시디자인 탐사>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증거하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로 '도시'를 꼽았습니다. 한국의 광역시들 구석구석을 살펴보며 근/현대사와 도시 내 디자인 요소가 어떤 관계를 주고받았는지 (아쉽게도 불륜적인, 즉 부적합한 관계가 훨씬 많은 편입니다) 알 수 있습니다. 탐사라고 해도 맞는 것이, 실제 역사 사료들을 충실히 가져와 옮겨 놓았고, 사진 자료도 풍부하게 싣고 있거든요. 그래서 단순한 '썰로 푸는 연구'가 아니라 발로 뛰며 직접 보고 비교하는 현장학습형 디자인-도시론이 되겠습니다. 이 무슨 도시의 명소도 아니고 온갖 자질구레한 곳들을 다 돌아다니는 희안한 답사기기도 하지만.. 글쎄요.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관심 있는 분들은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책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저도 부산 출신이라 부산 얘기 재밌게 봤어요. 아참, 위에서 소개드린 지구 구출용 디자인 책 세 권과 묶어 보셔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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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방글 2009-02-02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뱅크시, 월 앤 피스는 멋지구만

외국소설/예술MD 2009-02-02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뱅크시 모르는 분들에게는 서슴없이 추천 가능한 책입니다. 반달리즘에 대한 애증이 뒤섞인 <디자인 멜랑콜리아>와 함께 추천해 드리지요. ^^

라온 2009-02-05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멜랑콜리아 여기에도 있었네염. 적어뒀었는데.

외국소설/예술MD 2009-02-09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준수한 시론이라고 생각됩니다. 분명히 드러나는 성향은 플러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