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천국은 맞는데, 불신 지옥은 뭡니까?

쉽고 간결하게 뒷통수를 후려치는 강력한 선교 비판서

 

SF작가 테드 창의 중편 소설인 [지옥은 신의 부재]를 들어 봅시다. 거기에는 천국과 지옥이 분명히 존재하고, 심지어 종종 사람들의 눈에 띄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을 모두 믿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 세계의 지옥은 무한히 불에 지져지는 세계가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와 똑같습니다. 그럼 왜 지옥일까요? 어떤 형벌도 주어지지 않는데요? 답은 간단합니다. 지옥에는 딱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신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뿐입니다.

지옥과 지상을 구분하는 것은 어떤 '체제'의 차이가 아니라는 얘기죠. 중요한 것은 신의 유무 뿐입니다.

이 책을 소개하게 되어 기쁩니다! 쉽고 평이한 문체로 쓰여져 있으며, 간결하고 논리적이며,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좋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렵게 씌여지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평신도들도 두루두루 읽을 수 있다는 점은 매우 뛰어난 장점이지요.

<바울의 선교 vs 우리의 선교>는 20세기 이후의 선교 문화가 어떻게 왜곡되어 진행되었는지, 가장 위대한 선교자인 사도 바울의 사례를 들어 비판합니다. 너무 쉽게 요약이 잘 되어 있어서, 부족한 제가 이래저래 말을 하느니 차라리 본문을 수없이 발췌하는 게 더 낫겠습니다. 몇몇 부분만 퍼 보겠습니다.

특히 선교에 관심 있는 분들은 길다고 넘어가지 마시고 눈여겨 보십시오!

 

우리는 '가련한 이교도'라고 버릇처럼 부르는 이들에 대해 인종적, 종교적 자만심을 품은 채 대해 왔다. 우리의 부를 죽어 가는 불쌍한 인간에게 나눠줘야겠다는 동정심에 이끌리는 등 우월한 입장에서 그들에게 접근했다. (중략) 우리는 우리에게 복음이 위탁된 것이 우리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온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의 구원을 전하는 그분의 도구가 되기 위함임을 미처 배우지 못했다. (중략) 우리는 이제까지 주님의 성전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로 구성된 것처럼 생각했고, 이방인의 회심은 그 몸의 연장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왔다. 따라서 복음을 전파할 때도 마치 부자가 거지의 무릎에 동냥 한 푼을 던져 주는 식으로 해왔다. (중략)

우리는 이런 정신으로 그들에게 접근하고 도왔다. 우리는 실로 무언가 해주고 싶어서 안달을 냈다. 그리고 많은 것을 해냈다. (중략) 우리는 그들을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양떼처럼 돌봤다. 그들의 자금도 관리하고, 성직도 임명하고, 교회도 짓고, 교사도 공급했다. 그들에게 젖도 먹이고, 음식도 주고, 치료도 했다. 그들을 훈련하여 일부에게는 안수까지 주었다. 서로 동등함을 인정하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을 다 해준 셈이다. 그들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해주었으나, 그들과 함께한 것은 별로 없었다. 그들에게 자리를 허락하는 일만 빼고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해주었다. 그들을 '귀여운 자녀'로 대하기는 했으나 '형제'로 대우하지는 않았다.

p.223~224 (밑줄은 제가 쳤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어찌 했을까요.

첫 교회는 나름대로 자체의 필요를 채우는 데 적합한 사고방식과 그에 걸맞은 관습을 갖고 있었다. 맨 나중에 생긴 교회도 마찬가지로 자체의 필요를 채우는 데 적합한 사고방식과 그에 걸맞은 관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전자는 단지 첫 교회라고 해서 그 법과 관습을 후자에 강요할 권리가 없다. 한마디로, 통일성은 맨 처음 지체의 관습에 대한 외적인 순응이 아니라 그 몸에의 합류에서 찾아야 했다. 따라서 맨 처음 지체가 맨 나중 지체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는 것은, 맨 나중 지체가 앞선 지체로부터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것만큼 분열을 책동하는 행위다. (중략)

그(바울)는 유대 교회의 법과 관습을 네 지방에 이식하기를 거부했다. 중앙집권적 권위를 세워 온 교회가 지역적 사안을 처리할 때 그로부터 지침을 받도록 하는 체제를 거부했다. 또 모든 시대, 모든 장소, 모든 상황에 적용되어야 할, 선험적인 정통성 테스트를 제정하길 거부했다. 특정한 전례를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일도 거부했다.

p.206~207

왜일까요.

사실 외국의 완벽한 예배와 신학 체계를 모두 수입하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행위다. 우리는 공식 예배를 반복적으로 시행하는 것을 매우 강조한다. 또 우리의 기도서가 매년 순환적으로 믿음의 체계를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그 기도서를 수입해서 새로운 교회에 전수한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 완벽하다. 너무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초심자들은 아무것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중략)...결국 그들은 진리를 통달하겠다는 노력마저 그만두고 만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다수에게 가장 단순한 요소들을 가장 단순한 형식에 담아 가르치고, 더 많은 지식을 스스로 얻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고, 몇 가지 기본 진리에 대해 묵상하고 발견한 바를 서로에게 가르치도록 그들을 내버려두는 등 여러 방식으로 그들이 가장 중요한 것을 섭렵하게 해주었다.

(중략) 신조(信條)는 아주 간략하지만, 얼마든지 아주 길고 모호하게 만들 수도 있다. 사실 그리스도를 붙잡는 데 그리 많은 것을 알 필요는 없다. 사도 바울은 단순하고 간단하게 시작했다.

p.147~148

지금 우리의 교회와 얼마나 다른지 느껴지십니까? 저것이 선교계의 슈퍼스타이며 에이스이며 그 외적인 성과와 내적인 성장에서 모두 최고를 달린 사람, 사도 바울의 선교법입니다. 우리는 불신 지옥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데 어느새 신을 믿는다는 것과 계율을 지킨다는 것이 마치 하나처럼 겹쳐지고 있습니다. 계율은 인간답게 살면서 보다 경건한 모습으로 신을 맞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언제이고, 어디인가'에 따라 분명히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는 왜 다른 곳에 가서 우리의 방식을 마치 아버지가 가르치듯이 하는 걸까요? 다 같은 평등한 자식들이 아닙니까? 이 책의 저자이자 역시 위대한 선교자였던 롤런드 앨런이 '변해가는 기독교인들'에게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인용하면서 마치겠습니다. 이 글을 읽은 그리스도교 신자/선교자 모두에게, 그리고 종교의 종류와 유무를 떠나서, 모든 분들께 관용과 이해가 좀 더 가슴 속에 심어지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예배와 문화를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신의 유무 뿐입니다.

"나는 누구에게도 어떤 것을 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기에 '예' 혹은 '아니오'라는 응답을 받지 않는다. (중략)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는 '이것이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누군가 '그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든지 '시대가 변했다'고 대꾸한다면... 나로서는 '이것이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의 방식'이라고 반복할 수밖에 없고, 그가 이 문제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도록 내버려둘 도리밖에 없다."

p.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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