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시절에 열심히 비디오 게임 잡지를 탐독했었습니다. 그 중 모 잡지는 특유의 개그 센스로 유명했었는데요. 뛰어나지만 이상한 사람들이 모인 SEGA라는 회사에서 괴상한 게임기를 야심차게 내놓고 속절없이 휘청거렸을 때, 그 잡지에서 칼럼을 쓰던 양반은 이런 문구를 남겼습니다.

"선사여, 세가가 32X를 내놓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 "앞뜰의 잣나무다."

이것이 제가 생애 최초로 접한 화두였습니다. 다소 우습게도 그 이후로 간화선이란 무엇이고 불교란 무엇이냐를 찝적거리게 되었으니, 과연, 깨침에는 상하가 없고 유치함과 진지함의 차이도 없는 것인가 봅니다. 세상 만사가 허상의 집합체인가 하면 또 죄다 부처의 현현이라지요. 넌센스 같기도 하고 게임 같기도 한 이 문구들 속에 우주가 들어있다면, 그리하여

세계 최고의 프로페셔널들이 펼치는 우주 최고의 수수께끼 놀이

 선관책진(禪關策進) . 이라 합니다.

                                                           .

유명한 화두들을 한번 들어 보시지요. 선사께서는 마음 가벼운 자들은 화두를 들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라 하십니다만, 그 시도 쯤이야 괜찮을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잣나무 화두는 사실은 저 유명한 달마 대사에 관련한 것이지요.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 "앞뜰의 잣나무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없음(無) 화두는 아래와 같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 "없느니라(無)."

그러면 스님들은 이 화두를 가지고 깨칠 때까지 마음 속에서 놓지 않습니다. 먹을 때도 쌀 때도 놓지 않습니다. 평범한 인간의 집중력이란 한계가 있거니와, 이 책의 한 선사께서 말씀하시듯 온 힘을 다해 정진하면 오래지 않아 반드시 깨우칠 것이다라는 말도 기약이 없어 보이지요. 그런데 여기 나온 스님들은 점점 더 무거워지는 화두를 수십 수백 일, 길게는 수 년을 가슴에 얹고 갑니다.

선관책진. 수행자들이 깨우쳐 뚫고 나가야 할 관문들을 알려주는 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수행자들에게 팁을 선사해주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책은 팁을 바라는 것부터가 틀린 마음이라고 줄기차게 강조합니다. 심지어 유식하냐 무식하냐도 깨우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책 많이 읽어봐야 무엇 하려느냐? 염라대왕은 말이 많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까지 합니다. (하기는 맞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언어로 썰을 풀어봐야 이 세상의 파편밖에 주워담지 못한다고 서양 학자들이 아주 잘 밝혀 주었지요)

방법은 오로지 용맹정진이며, 결단코 단 하나의 샛길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단 하나의 질문만이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저 위의 선문답을 보고 여러분들이 하셨을 질문, 그게 깨달음의 열쇠입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사실상 이게 이 책의 전부입니다. 수십 명의 전설적인 선사들께서 똑같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처음 주욱 읽었을 때는 뭐 이리 똑같은 소리를 하나 싶다가, 하루에 한 편씩 읽자 하고 띄엄띄엄 읽어 보니 선뜩한 것이 무슨 회초리 맞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공부에는 '법'이 있습니다만, 깨달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하나의 길,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뿐입니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깨우치는 세계에 대해 더 말로 풀어낼 것은 없어 보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無자 수행에 있어 열 가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나열하며 마칠까 합니다.

 

생각으로 알아맞히려 하는 것 // 눈썹을 오르내리고 눈을 껌벅이는 곳에 지식과 견문을 들어앉히는 것 // 말길에서 알아맞추고자 하며, 그것으로 공부를 삼는 것 // 경전이나 어록에서 끌어다가 인증을 삼으며 알려고 하는 것 //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아맞추려는 것 // 모든 것을 다 날려 버리고 일없는 곳(멍하게 있음)에 들어 앉아있는 것 // 있는 것이나 없는 것으로 아는 것 // 참으로 없는 것으로 아는 것 // 도리가 그렇겠거니 하고 알음알이를 짓는 것 // 자기가 미혹했다고 하면서 깨치기를 그저 기다리는 것.

 

어째 이렇게 철두철미하고 타협이 없으며 올곧은 길을 권하는 계명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가히 지상 최고의 프로페셔널들이라 할 만 하며, 그 분들이 붙잡은 화두는 또한 우주 최고의 수수께끼라 하겠습니다. 리뷰를 남겨 주신 mb퇴진할때까지(좋고!) 님의 말씀마따나, 이만큼 삼매경을 통해 마음 시원하게 해 주는 책도 없지 않을까 합니다.

 

올 여름, 블록버스터 말고 소울버스터(soul-buster) 한 권 장만하시죠. 우주 최고의 문답이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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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방글 2008-06-12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책은 책이고, 돈은 돈이노라(...)

외국소설/예술MD 2008-06-16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사여,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물으니.
멍. 이라고 벗이 대답했습니다.

두발짐승 2008-06-19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불의 편집자' 정태룡 선생이 참 좋았다능-_-

외국소설/예술MD 2008-06-23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존함을 알고 계시다니..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