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입니다. 숫자보다는 꼭 한글로 '오월'이라고 쓰고 싶은 이 즈음에는, 봄의 절정이라기보다는 어째서인지 뜨겁고 묵직한 느낌이 들지요. 망월동 묘지에 처음 갔던 때, 친구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몰래 훔쳤던 기억이 납니다.

평화롭지 못한 요즈음이 오히려 깨어나는 사람들을 위한 축복이라고 위로라도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넋놓고 있으면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라곤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그 일장'춘'몽을 깨우는 것이라면야... 그렇게 보면 봄의 절정이 맞기는 맞나봅니다.

마침 책도 절판이요, 사람도 이제 조금씩 잊혀져 가시는 백기완 선생님의 시집을 폅니다. 오죽 투박한 게 아니어서 세련된 시를 읽는 맛이야 거의 없지요. 구수하기는 하거니와, 밀가루를 섞어 뻑뻑한 막걸리를 사발째 들이키는 기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세상 힘겨이 살던 사람들이 마시던 것임에야...

한 페이지 펼쳐 봅니다. 제목은 [이 강산 낙화유수] 라고 합니다.

1952년 겨울 동숭동 미군 부대가 들어선

서울 대학 자리엔 왠일로

날마다 철조망을 울부짖는 어린 여학생의 찢긴 자락은 너무나 처절했다

은인들에게 정조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냐고

때려도 또 와 울부짖고

미쳤다고 푸닥거릴 해도 또 와

그렇게도 구슬피 몸부림치던 어느 날

그의 검은 머리까지 빡빡 깎이자

동숭동 일대는 숨을 쉬기가 다 스산했건만

눈이 허옇게 내리는 창경궁 빈 터에선

천상 그 주먹이 폭격기 같은 미군 병사와

여드름도 없이 핼쑥한 한국 소년과 격투가 벌어졌다

조국도 얼씬 못하는 그 여학생의 앙갚음을 한다고

그 소년이 먼저 청한 격투였으나

그것은 천상 폭격기와 초가집의 싸움이라고나 할까

보나마나 죽음으로 끝이 나는가 싶을 무렵

비실비실 일어나더니만

왔다, 날으는 범처럼 우직끈 받고 앙짱 받으니

폭격기인들 소용있으랴

역시 썩은 주먹이란 헷것임을 증명했을 때 미군들이 박치기는 반칙이라고

야구 방망이를 치켜드는 순간, 한국 사람 구경꾼들이 그제서야 벌떼처럼 빈 깡통을 던지는 아우성에 미군들은 그 쓰러진 폭격기를 떠메고 가고

 

사람들은 묻는 것이었다 여보게 자네가 도대체 누군가? 나요?

나즉이 말하는 것이었다, 이 강산 낙화유수요

그럼 자네가 갸의 오빠란 말인가

아니오 이 강산 낙화유수라니깐요 그러면서

어두워가는 눈발 속을 사라지는

그 핼쑥한 소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자위는

따끈한 동태국이라도 한 그릇 먹이고 싶은

그런 겨울이었다

 

저 이야기가 실화이고, 저 소년은 누군가 하니, 소년 백기완이었더라는 얘기(자랑? ㅎㅎ)입니다. 이제 시대는 가고 세월이 흘렀습니다만... 글쎄요. 아직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아 보입니다. 요즘 소식을 접하기 힘든 백 선생님의 건강과 더불어, 요즘 각처에서 펄펄 흩날리는 이 강산 낙화유수들에게 작은 지지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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