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 방황]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흠, 정유정인데…어, 정유정인데?

정유정소설가가 히말라야에 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책이 나오기 훨씬 전이었다.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정유정소설가처럼 찐득찐득한 원액 같은 글을 쓰는 소설가에게는 활활 타오르듯 정력적이고 뜨거운 지역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으니까. 스페인이나 남미나 아프리카 같은. 히말라야라는 단어와 함께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설산이었기 때문이다. 김연수소설가님의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속의 인정 없이 차갑고 뾰족한 눈 덮인 산. 눈바람을 맞으며 그 산을 넘는 이가 내성적인 목소리로 토해놓는 무거운 이야기…같은.


안그래도 꽉 쥔 주먹 같은 소설을 쓰는 정유정소설가의 히말라야 여행기라니, 심지어 2주간의 트래킹 얘기라니! 또 얼마나 진하고 치밀할까 싶었다. '환상방황'이라는 책 제목과 글 앞에 실려 있는 안나푸르나 라운딩 코스 지도를 보니 긴장이 더 높아졌다. 거봐 여행이 아니라 방황이야. 게다가 이 긴 길에서 방황했다는 거야…분명 엄청 진지할거야…페이지를 넘기는 손끝에 힘이 빡 들어갔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프롤로그 중반 쯤부터였다. 문장과 문장을 지나가다가 입술 사이로 웃음이 픽 새어나오는 걸 깨닫고 당황했다. 100쪽짜리 고산병 자료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셨다는 소설가님의 남편분에 대한 에피소드, 브래지어의 A컵 라벨을 잘라내고는 후배 지영씨에게 한 소리 들었다는 에피소드, 네팔에 도착한 후 마살라 때문에 고군분투한 에피소드들이 이어지면서 점점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정유정소설가 글이라며? 내가 아는 그 정유정소설가 아냐? 왜이렇게 웃기지? 이런 게 아닐 줄 알았는데? 왜이래?



내가 알고 있는 정유정을 당신도 알게 된다면…

이제까지 내가 알던 정유정은 매우 집요하고 치밀한 소설가였다. 정유정소설가가 출연한 여러 팟캐스트를 들으면서도 그 느낌은 변하지 않았다. 화통하고 대담하고 심지가 굳고 진중하고 모임에서는 리더 역할을 할 것 같고 밑으로 줄줄 딸린 동생들을 딱부러지게 잘 챙겨서 이끌고 갈 것 같은, '엄마 같은 누나'의 이미지. 물론 환상방황 속에서 정유정소설가의 저런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한방에 히말라야 종주를 결정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든지, 히말라야에 가기로 결정한 후 지리산을 타고넘으며 훈련을 한다든지, 쏘롱라패스 정상에 도착한 후 50분만에 뛰어내려온다든지(유 알 어 파이터!!ㅋㅋㅋㅋㅋㅋ)…


그러나 이 책 속에서 더 부각됐던 건 유머러스하고 털털하며 귀여우신데다가 실수도 많고 허당(이라고 써도 되려나)인 데도 적지 않은 정유정소설가의 모습이었다. 정유정소설가의 글이 이렇게 '웃길' 줄이야. 그녀 소설의 치밀함과 집요함을 떠올리고 '혹시 이 유쾌함도 의도된 건 아닐까?'라는 의심을 3초쯤 하기도 했지만 설마…그건 아니겠지;; 여행기 내내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자신의 허당스러움을 늘어놓는 데서 그치지 않고(어떤 부분에선 '나 이런 사람인지 몰랐지? 원래는 이렇다고 낄낄낄!!!'이라 떠벌리는 느낌까지 들 정도ㅋㅋ)히말라야에서 경험한 각종 육체적 고통들을 그야말로 손에 잡힐 듯 나열한다. 이렇게 솔직해도 되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남의 괴로움을 읽으면서 이렇게 웃어도 되나? 싶어 나중엔 좀 미안해지기도 했다. 뭐 이런 문장들 말이다.


만년설에 뒤덮인 봉우리 너머에선 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촌뜨기 언니. 우리 트위스트 한 판 출까." (26쪽)


몸에 달려 있지 않다면 가슴도 놓고 다닐 거라는 게, 나에 대한 남편의 평가였다. (57쪽)


평화가 오신다. 걸으면서 입속말로 외워보았다. 옴마니밧메훔. 옴마니밧메, 옴 마니, 옴, 옴, 옴……잠이 오셨다. (100쪽)


땅거미가 내리는 목초지 비탈에 시커먼 소 다섯 마리가 어슬렁대고 있었다. (중략) 긴 잔등에는 매끈하고도 짧은 털이, 옆구리 아래로 길고 풍성한 털이 늘어져 있었다. 마치 고대의 매머드들이 검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강강수월래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153쪽)


안나푸르나에서 내 책이 다 좋다는 독자를 만나다니. 천하의 스티븐 킹도 이런 일은 경험해보지 못했으리라. 몇 시간 전까지 '코리안 보이'였던 한 청년이 특별한 존재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브래드 피트처럼 잘생기고, 주드 로처럼 섹시한 데다, 스티브 잡스처럼 스마트해 보였다. (161쪽)


물론 누군가는 내가 보고 킬킬거렸던 문장에서 불만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히말라야까지 올라가서 왜 화장실 얘기나 하고 있어? 몸 말고 정신 얘기 없어? 여행에서 얻은 평화나 삶의 행복이나 사랑이나 자신과의 화해 같은 거 좋잖아? 하고 툴툴거리는 사람도 있었을지 모른다. 독자들은 다양하고, 사람들마다의 유머 코드 역시 다양하니까. 


하지만 나는 좋은 곳에 가서 좋은 것 먹고 좋은 옷 입고 좋은 것 보고 좋은 숙소 침대에서 잠들더라도 내 몸이 아프고 지치고 힘들면 헛일 아닌가, 대신 특별하게 좋은 어딘가엘 가지 않더라도 내 몸 편하고 내 몸 즐거우면 내 맘도 편해지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정도밖에 못 되는 사람인지라, 이런 식의 여행담이 꽤 마음에 들었다. 여행이란 것은, 그리고 삶이란 것 역시도 정신의 문제이기 이전에 육체의 문제라고 생각하는지라. 히말라야에서 느낀 '환상적인 정신적 충일함' 대신 몸 안팎을 침범해 온 손님들과의 예상치도 않았고 반갑지는 더더욱 않은 조우를 실감나게 그리는 부분들이 인상적이었다. 먹을 것 이야기, 화장실 이야기, 김혜나소설가님의 '요가 배틀' 이야기, 불면증, 두통, 심장의 두근거림, 고산병, 죽음의 고비 등등.


이렇게 몸이 먼저 히말라야에 빡세게(!!) 부딪고 나야 정신에도 확실히 부딪쳐 오는 게 있는 법 아닌가. 몸이 설렁설렁 대충 할 때는 정신도 설렁설렁 늘어지듯이. 아 물론 푸르뎅뎅한 입술과 퉁퉁 부은 눈두덩과 벌건 얼굴로도 신비로운 미소로 "아임 파인. 원더풀 라스트 나이트 앤 뷰티풀 모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폴란드 언니의 정신력도 대단하지만 ;ㅂ;



함께 걷는 길, '나'와 검부와 혜나와 버럼과 :)

이 여행기의 또다른 특징이라면 현재의 정유정과 히말라야 사이사이에 불쑥 과거의 정유정이 끼어든다는 것이다. 지금의 정유정이 시간과 시간 사이를 지나갈 때 히말라야가 정유정의 몸에 직접 와부딪치고, 그 부딪침이 어떤 감각을 만들어내고, 그 감각이 과거의 경험을 불러내고, 그러면서 과거의 정유정과 현재의 정유정이 교차되고, 아까의 정유정이 지금의 정유정과 다른 인물이 되는 과정이 참 좋았다. 물론 정유정 본인은 히말라야를 오르기 전의 자신과 오른 후의 자신이 다르지 않다고 말하지만, '나의 진짜 본질이 내가 아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는 나'와 '나의 진짜 본질이 내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는 나'는 전혀 다른 나 아닐까. '떠나온 나와 돌아갈 나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에서 '떠나온 나와 돌아갈 나가 다르지 않다고 확신하는 나'로 바뀐 것이니까. 힘이 없는 상태와 힘이 남아도는 상태 역시 분명히 다르고.



물론 현재의 정유정이 과거의 정유정'하고만' 이 길고긴 길을 걸어갈 수는 없었을 테다. 무뚝뚝한 듯 하지만 엄청나게 세심하고 든든한 검부, 어학에 재능이 있는 듯한(까꽁!) 귀여운 버럼, 이 책과 짝이 될 것 같은 여행기를 쓰고 있는 중이라는 김혜나소설가가 함께 이 길을 걸었기에 정유정 역시 환상종주를 성공할 수 있었겠지. 몇년 후 그녀가 또다시 히말라야를 찾아서 또다시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할 때 분명 검부와 함께 할 것 같다는 예상이 책을 덮자마자 드는 건 그만큼 그녀와 동행했던 이들의 존재감이 크기 때문이다. 짐을 들어주고 사과를 챙겨주고 손을 주물러주고 약을 나눠먹고 화장실을 같이 쓰는 이들이 없었다면 이 책은 훨씬 재미 없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잉여 대신 목표를 찾는 그녀, 응원합니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요즘 챙겨듣는 팟캐스트 '낭만책방'에서 정유정소설가가 출연한 방송을 먼저 들었었다. 그냥 방송만 들었을 때도 재미있었는데, 책을 읽고 다시 한번 팟캐스트를 들으니 더 재미있었다. 아 이게 이 얘기였구나! 하고 무릎을 탁탁 치기도 했고, 어머니 얘기는 왠지 더 찡했다.



두 번째 들을 때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정유정소설가의 이 말씀. (낭만서점 웹사이트에도 정리되어 있다 : 여기)


삶을 좀 여유롭게, 관조하듯이, 우아하게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근데 그게 (저랑) 기본적으로 전혀 안 맞는 거죠. 목표가 없으면 무기력해지고. 처음에 떠날 땐, 제가 좀 돌아오면, 떠날 때와 좀 달라져서, 뭔가 차원이 높은 인간이 되어가지고 돌아올 줄 알았어요…결국 끝에 가서 발견한 건,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똑같다. 그냥 똑같은 저를 발견하고 돌아왔어요. 그래, 뭐, 싸움닭이야, 뭐 어쩔 거야? 하고 돌아온…그전에는 그런 별명들이 좋기도 할 수 있겠지만 좀 억세지 않고 고상하게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기 갔다와서 깨달은 게, 그건 나한테 욕심이었구나. 나는 원래 그렇게 생긴 사람이었구나…


목표 없는 삶을 힘겨워하지 않고 잉여 상태를 즐기는(사실은 엄청 좋아하는!!!)데다가 오르막길을 좋아하지 않아 등산도 싫어하는 나에게 히말라야는 '완전 딴 세상'이다. 아마 죽어도 환상종주를 하지 못할 것이고, 죽어도 히말라야에 가지 못할 것이다. 고로 정유정은 나와 영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남의 이야기같지 않은 건, 그녀가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이 나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으로 돌아가 다시 내 인생을 상대할 수 있을까.

어떤 목소리가 답해왔다.

죽는 날까지. (186쪽)


그래서 나는 그녀의 여행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녀의 경험을 질투하고, 그녀가 얻은 깨달음을 시기하는 대신, 저 대답을 마음에 담는다. 나에게 대답을 준 정유정소설가와 그녀를 무사히 돌려보내준 히말라야, 그녀가 여행기를 쓸 수 있게 해 준 '잉여 시간'에 감사를 표하면서 이 세상에서 내 인생을 상대하는 게 힘겨워질 때마다 스스로에게 저 대답을 해 줄 것이다. 죽는 날까지라고.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4-06-24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5 16:5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잘 읽었습니다! 인사 없이 조용히 갔었는데ㅎ 반갑습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