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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얼굴 - 어느 늙은 비평가의 문학 이야기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지음, 김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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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얼굴의 첫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는 특정한 작가를 소개해주면서 그의 초상화를 곁들여 보여주는 책인줄 알았다. 서문을 읽으면서부터 그 쉬운 예상은 깨졌다. '그냥 유명한 그림'이 아니라 글쓴이가 직접 수집한 초상화라니. 게다가 글쓴이는 평론가고 초상화의 대상들은 모두 작가들. 심지어 글쓴이인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자신이 모은 작가의 초상화를 집에 걸어 놓았고, 그걸 본 그의 지인들이 초상화를 선물하기까지 했다니. 우왕.


집에 초상화를 걸어 놓는다면 그건 당연히 집안 식구 중 한 명의 것이겠거니 생각해온 내게 작가의 초상화를 집에 걸어놓는 평론가란 그 존재 자체가 이색적인 것이었다. 평론가와 작가의 사이는 결코 '서로에게 우호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기에 더더욱 놀라웠고. 한국 작가들이나 뮤지션들의 인터뷰를 보면 꽤 많은 이들이 평론가들의 호평 또는 악평에 대한 질문에 '평론가들의 말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평론가들의 말은 잘 이해가 안 간다', '평론가들의 말보다는 작품을 읽고 써 주시는 일반 독자/리스너들의 리뷰를 더 즐겁게 읽는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내가 평론가라면, 벽에 걸린 초상화 속 작가의 신간을 읽고 '아 이건 좀 아니지 않나-_-'하며 지적하는 글을 쓰고 싶다가도 자꾸 벽 속 얼굴이 신경쓰여 짜증날 것 같은데. 내가 작가라면, 나의 글을 읽고 늘 좋다고 하는 것도 아닌 평론가가 집 벽에 내 초상화를 걸어놓고 있다는 사실에 괜히 신경질이 날 것 같은데. 우왕우왕.


책을 읽으면서 더더욱 신기하다 싶었던 건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유머러스하면서도 굉장히 솔직한 서술 때문이었다. 라이히라니츠키의 작가들에 대한 평은 결코 객관적이지 않았는데도 조심스럽다기보다는 단호하고 거침없었다. 때로는 '와, 이런 말을 평론가가 대놓고 할 수 있단 말야?'라는 느낌까지 들 정도로 신랄하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 하인리히 만에 대한 글에서 내가 하인리히 만을 많이 읽긴 했지만, 그의 책을 좋아한 적은 없다고 선언하듯이 말한 문장. 데오도어 폰타네의 좋은 이미지를 쭉 언급한 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이미지를 우리 모두에게 주입한 장본인이 바로 폰타네 자신이었다'며 대중들이 기억하는 폰타네의 모습은 그가 원했던 모습, 즉, 부드럽게 순화되고, 은근히 미화된, 아무튼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친 모습이라고 적어내려간 글을 읽을 때는 라이히나리츠키의 대담함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우와,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나? 작가들이나 독자들이 항의하진 않나? 그런 거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걸까? 아니면 독일의 문학계 분위기가 '이 정도쯤이야'인 걸까? 한국에서 평론가란 이름을 단 누군가가 '이건 요러하고 조러하고 고러하고…해서 이러이러하게 비판받을 소지가 있고…'라는 글을 길게 쭉 늘어놓는 대신 '어쨌든 난 이거 안 좋다'고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올 것 같은데. 우왕우왕우왕.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왜 이 평론가가 집 벽에 작가의 초상화를 걸어놓을 수 있는지, 알 것 같다는 기분이 슬슬 들었다. 글 하나하나에 신기하게도 애정이 어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이 작가가 이러저러한 부분에서 칭찬받을 수 없다는 건 알아, 그리고 이러저러한 부분은 별로라는 것도 잘 알아! 그래도 분명 이 작가에겐 사랑스럽고 귀엽고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 있어!!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달까.


그는 믿을 수 없게 걸출하고,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한 인물(호프만)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렇고 그런 '대중작가'로 치부되는 것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고, 프리드리히 폰 실러가 특별히 준수한 용모를 지닌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의 초상화를 그린 루도비케 시마노비츠는 대중을 실망시키고싶지 않은 마음에 미화된 초상화를 그릴 수 밖에 없었음을 언급하면서도 하지만 그래도 실러의 실제 생김새를 어렴풋하게나마 추측하게 해준다고 따뜻하게 덧붙여 주었다. 하웁트만에 대해 쓴 글에서는 대중의 호응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자기주장을 곧 자기연출로 이어가게 마련이라며 작가치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 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작가라는 존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고백했다. 이런 라이히라니츠키는 아마도 작가와 작가의 작품을 평가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작가의 인간미와 작품 속에 나타나는 인간의 인간다운 모습을 찾으려 한 평론가가 아니었을까.


덕분에 책을 읽으며,  이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작가들과 그의 작품들이 궁금해졌다. 사반세기에 걸쳐 한 남자만을 사랑했던 리카르다 후흐의 소설에는 그녀의 삶이 반영되어 있을까. 애국자였으나 조국이 없었고, 민중의 지도자였으나 따르는 민중이 없었고, 작가였으나 작품이 없었다는 루트비히 뵈르네의 위트 넘치는 글은 어떤 세계를 나에게 보여 줄 수 있을까. 천재적인 작가였지만 종종 날림으로 대충대충 작품을 써내기도 했다는 베르펠의 역작과 평작과 졸작은 얼마나 다른 느낌일까 등등. 어릴 적 한두번 읽고 나선 한동안 잊고 있었던 토마스 만이나 괴테의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글이나 라이히라니츠키가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가 아닐까 짐작할 수 있었)던 작가에 대한 글은 특별히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체호프에 대한 글에서 그의 작품에 나오는 대사들의 핵심은 대개 화자들이 말로 옮기지 않는 표현들 사이의 정지 장면에서 들을 수 있다. 바로 이 침묵이야말로 이 작품들의 근간을 이룬다. 왜냐하면 체호프는 속삭임의 절규, 고요의 통곡을 창시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참혹한 고통으로 말을 잃은 인간을 보여주었다고 쓴 부분은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하이네에 대한 글에서 하이네만큼 나와 가까웠던 작가, 내 삶의 가장 힘든 시기에 나를 지탱해주고, 변화시켜주었다고 할 만한 작가가 또 누가 있을까라고 고백하던 문장은 뭉클하기까지 했다. 그의 말마따나, 작품의 예술적 수준을 따지기에 앞서…각별히 소중한 작가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독자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 중 하나일 테니.


우리 나라에도 어떤 평론가가 작가의 초상화나 사진을 수십 년동안 수십 작품 모아왔다면, 그래서 그 작가들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고백하는 내용의 글을 책으로 엮어 낸다면 멋있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이상과 김유정, 박태원과 이광수, 박목월과 조지훈과 정지용에서부터 신경숙과 김영하, 조경란과 박민규, 천명관과 이기호, 편혜영과 김연수와 김중혁과 김애란에 이르기까지. 작가에 대한 애정 고백을 금기시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한국에서는 아직 먼 얘기일까. 언젠가 그런 고백으로 가득 찬 책을 설레는 마음으로 읽고 싶다는 소망을, 수줍게 가져 본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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