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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설계도
이인화 지음 / 해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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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상; 깊은 밤 잠 못 이루고 컴퓨터 앞에서 게임에 빠져 있다가 그다음날 아침이면 어쩔 수 없이 현실로 돌아와 하루 종일 책상 위에 얼굴을 붙인 채 죽은 것처럼 지내는, 그러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다음다음날 아침이 될 때까지 게임에 빠져 있기…를 반복하는 어린 영혼들을 자주 접하곤 한다. 그런 영혼들 중에서는 현실에서 티없이 맑고 밝고 명랑한 영혼들도 있지만, 지독한 무기력에 빠져 무표정한 얼굴로 하루를 지내는 영혼들도 적지 않다. 현실에서의 그 무엇도 후자에게 자극이 되지 못한다. 그저 컴퓨터 전원을 켜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가상의 현실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


이인화의 <지옥설계도>를 덮으며, 그 영혼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책상 위에 축 늘어져 있다가 어깨를 두드리며 '어제도 게임 했어?'라고 물어보면 부끄러운 듯 고개만 설레설레 젓던 영혼들. 하지만 아이들은 그가 어젯밤에도 새벽 몇 시까지 게임을 하고 있었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뭔지도 잘 모르는 게임 이름들을 들어가며 몇 렙이나 업했다고 떠들어댔다. 그의 어머니는 집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잠도 잘 자지 않고 심지어 밥도 잘 먹지 않는 아들내미가 컴퓨터 앞에 앉아 소리내어 웃는 모습을 보고 내가 아는 그 애가 맞나 생각했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마음이 아파왔다.


이 소설 속의 준경도, 유진도, 한때 분명 그런 영혼 중 한 명이었을 거다. 게임 속에서 가상의 동지를 만나 가상의 적들과 가상의 전투를 치를 때면 가상의 내가 현실의 나보다 훨씬 강력해지고 위대해지고 훌륭해진 느낌에 가슴이 뿌듯했을. 그러다가 컴퓨터를 끄고 현실로 돌아오면 강력하지도 위대하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스스로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기가 죽었을.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유진은 게임 폐인 생활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준경에게 "너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라고 말했던 거겠지...



이 책, <지옥설계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이유진이라는 인물의 살인 사건을 '기관원'인 김호가 추적해 나가는 추리 소설 형식의 이야기다. 두 번째는 이유진이 만든 최면의 세계로, 인페르노 나인이라는 이름이 붙은 가상의 현실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갑오징어 먹물 리조토'라는 제목이 붙은 두 번째 세계의 설계도이다. 이 '갑오징어 먹물 리조토'는 이유진이 만든 이야기로, 3차대전 이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경희라는 여자와 수연이라는 남자의 사랑 이야기가 표면에 등장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들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이 존재하는 세계의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경희와 수연이 사는 세계는 3차 대전 이후의 세계이다. 경희는 지금의 인간과 같은 '단백질 생체 인간'이지만 수연은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 아니라 DNA 정보와 나노세포가 결합된 '초신경 생체 인간'이다. 3차 대전 후 생명계가 오염되고 아사와 병사가 창궐하자 인간들은 거대한 컴퓨터 서버 장치를 설치해 220억명을 수용할 수 있는 디지털 가상 세계-정신계를 만들고 자기 두뇌의 가장 세세한 부분까지 디지털화해 완벽하게 복사함으로써 불사의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아날로그에 대한 회귀 본능이 어느 정도까지 남아 있게 마련인지라, 초신경 생체 인간들 중에서는 자신이 생명계에서 존재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을 생명계와의 접촉으로써 달래려 하는 사람도 생겨나는데, 그 중 한 명이 바로 수연이다.


수연은 경희라는 단백질 생체 인간을 사랑하지만 정신계에서만 가능한 전자극 유희-영화와 뮤지컬과 게임이 혼합되어 있는 형태의 예술-의 배우가 되고 싶어하고, 결국 경희와 헤어진다. 전자극 유희 분야에서 명인으로 이름을 떨치던 어느 날, 알렉스 리드코프라는 신진 기예와의 대결에서 패하고 슬럼프에 빠진다. 이를 극복하고 기사회생하기 위한 자극을 찾다가 오랜만에 생명계를 방문하고, 익숙한 맛의 갑오징어 먹물 리조토를 먹게 되고, 그것을 만든 여인이 경희가 단성생식을 통해 얻은 여인-딸-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경희가 오랫동안 자신을 믿고 기다려왔음을, 경희의 사랑이야말로 그 후의 생애에서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을 고귀한 것이었음을(P.377)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수연이 인생을 건 공연을 할 수 있게 하는 동기가 되고, 이 공연을 끝낸 후 수연은 자살한다. 


-는 것이 '갑오징어 먹물 리조토'의 줄거리다.



사실 '갑오징어 먹물 리조토'는 소설 전체에서 가장 작은 비중을 차지한다.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첫 번째 이야기이고, 그 다음은 두 번째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갑오징어 먹물 리조토'를 주목했던 건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든 생각이 결국 '갑오징어 먹물 리조토'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해 인간의 존재까지 모두 다 변해버리는 세상이 와도, 그 세상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인간으로서, 인간과 함께 존재하지 못한다면 결코 '발전'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 이것이 내가 느낀, 너무나 당연한 명제였다.


소설 속 공생당의 메시지처럼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의 게르니카, 수많은 게르니카를 살아간다. 전쟁을 일상화한 나머지 자기 삶의 비참함을 인식하지도 못하는 우리에게, 현실은 지옥과 다름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지옥같은 삶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가상의 세계로 도망치고 싶어한다. 설계도를 얻지 못하면 빠져나올 수 없는 세계로. 세상을 위해 나를 소모하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잊을 수 있고, 내가 정복하고 사랑하고 가꾸면 되는 세계로. 그 꼴꼴난 현실 세계보다 훨씬 행복하고 보람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는 세계로.


하지만 결국 그 세계는 이유진이 만들어낸 최면의 세계일 뿐이다. 환상이란 말이다. 내가 거기서 수많은 시간 동안 수많은 성을 만들고 수많은 영토를 정복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고 할지라도, 이 세계가 지옥이라면 그 세계 역시 지옥이다. 겉은 아름답고 풍요로워 보일지언정, 전쟁이 지배하고 있어서 인간이 무의미한 고통을 겪고 무의미하게 죽어나가는 유배지인 것이다. 최면의 세계 역시, 현실 세계를 본따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므로, 이유진이 만든 것은 결국 지옥일 뿐이다.


물론 수연의 말처럼, 우리는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지옥에서 스스로 신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놓인 곳이 지옥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국 인간이 해야 하는 일은,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아닐까. 안준경이 김호에게 '이 땅의 가장 약하고, 어리석고, 못 가진 사람들 속에서 나타난 저희들은 반란에 나설 것이고 그것은 혁명이 될 겁니다.'라며 자신들을 도와 달라고 제안하는 장면으로 소설이 끝나는 것도 현실을 바꾸지 않는다면 가상 현실로 도피해 봤자 아무 것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약함과 어리석음과 못 가짐을 깨닫고, 약하고 어리석고 못 가진 또다른 이들과 연대하여 우리의 세상을 선택해야 한다는, 그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바로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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