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미스터리 걸작선 1
정태원 옮김 / 태동출판사 / 1999년 7월
평점 :
절판


원래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있어야 했으나...역시 슬럼프인지 두툼한 책을 보기만 해도, 거부감이 일어나서 쉬어가는 마음으로 읽었다. 이 책이 만들어진 계기는 특이한데, 일본 추리 작가 협회 창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의 문화적 자양분이 크게 미국과 일본이라고 본다면, 우리나라에서 기념하는 것도 그닥 나쁘지는 않다고 볼 수도 있지만, 뜬금없어 보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당시에 한국추리문학의 발전을 위해 고군분투하시던 정태원 선생님의 모습이 느껴저서 숙연해지기도 하고. 물론 저작권 등의 이유로 추리 작가 협회 수상작이나 해당 작가의 대표작이 아니라 그들의 새로운 단편을 수록하다 보니 냉정하게 보자면 작품의 수준이 뛰어나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게다가, 출간된지 몇 년이 지난 지금에 읽어보니 다른 곳에서 먼저 읽은 작품들도 있고...

하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좋았다. 우선,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삐걱거림이 마음에 들었다. 현대의 미스터리를 엄청 읽은 것도 아니지만,  요즘 들어 고전 미스터리에 호감이 가기 시작하는데, 그 시절의 묵은 맛이 있기 때문이다. 50여년이 지난 지금의 독자인 내가 보기에는 구닥다리로 보이지만,  당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새로운 시도였을 것이다. <벽>같은 작품은 만약 지금 발표했다면, 범작을 넘어 태작 수준이지만, 시대 때문에 용서가 되는 작품이다. (만약 계간 미스테리에 실렸다면 욕을 바가지로 했을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구미의 흐름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던 초창기 작가들의 모습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의 지론은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지만, 포니가 있어야 소나타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산다슬에서 나오는 한국미스테리에 질려버린 나로써는 이 정도만 되도 충분히 감탄스럽다. 2권을 읽으면, 선배들을 넘어서려고 노력하는 점이 눈에 들어오고, 이런 노력들이 누적되서 지금의 일본 미스터리의 황금기가 있는게 아닌가 싶고...

다음으로 좋았던 것은 이 단편집의 넓은 폭이다. 어떤 독자들에게는 1권의 가장 큰 단점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데, 1/3정도는 추리단편이라고 보기 힘든 작품들이다. SF, 성장소설이나 세태소설 같은 느낌을 주는 단편들도 있다. 엄격한 독자들에게는 추리단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추리소설을 몇 권 썼다거나 유관 단체에서 상을 받았다는 이유로 선정된 단편들이 불만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당시는 초반부였기 때문에 지금처럼 장르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발아기였고, 일본 작가들의 잡식성을 생각한다면 이해가 가는 면도 있다. 사촌 이상이 되면 우리도 낯설어 하듯이, 지금의 두터운 장벽이 있는 듯한 장르들도 초기에는 꽤 가까웠음을, 그리고 지금보다는 당시의 작가들은 장벽을 넘나드는데 주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책의 기획과정을 보자면, 해당 작가들의 '추리'단편을 실어야 하는게 아닌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비평가가 아닌 이상 '추리소설'과 '추리적 요소를 갖춘 소설' 을 구분할 정도로 엄격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척박한 우리나라의 풍토에서 이러한 논의들이 대단히 필요한 것은 인정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김상훈씨가 쓰는 표현대로 '경계소설'도 많지 않은가. 다아시경 시리즈는 과연 SF소설이기만 한가? <죄와 벌>은 사회파 도서추리의 걸작이라고 부르면 안되는걸까? 반대로 필립 말로 시리즈는 그냥 추리소설인가? 전후의 미국의 생활상을 반영하는 멋진 세태소설이기도 하지 않은가? 더 나아가서 스릴러, 서스펜스, 스파이물은 추리소설이라고 부르면 안되는걸까?

이야기가 엉뚱하게 길어졌는데, '추리'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추리소설애호가이니, 추리소설이 가지는 특성이 많은 책들을 선호하지만, 넓은 의미의 '추리적 요소를 갖춘 소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면 만족할 수 있다.

원래는 단편의 줄거리도 소개하려고 했는데, 초창기 단편들이라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수록작들이 전반적으로 짧아서 생략. 좋았던 단편은 다시 읽고 다시 보게 된 다카끼 아끼미스의 <살의>와 말로만 들었던 아토다 다카시의 <나폴레옹 광>-후반부의 서늘함은 <의혹>과 맞먹는다고 본다.-,단편 에서는 그래도 선방하시는 니시무라 교타로의 <3억엔의 악몽>-교타로 선생은 단편에서 모범생같은 느낌이다. 상투적으로 시작해서 상투적으로 끝난다. 하지만 그 상투성이 마음에 든다.-과 <눈먼 까마귀>의 저자인 츠츠이 다카오의 <정사의 배경> 등이 좋았다. <나체의 방>의 호시 싱이치의 블랙 유머도 좋았다.  

나열하다 보니 솔직히 마음에 안 들었던 단편은 하나였다. 서두를 여는 아카카와 지로의 <아파트의 귀부인>. 고양이 홈즈와 세 자매 탐정단에 당해서 그런지 솔직히 개발새발 쓴다는 느낌 밖에 없다.  

추신) 소노 다나오의 <복안>은 한국공포영화 XXX와 시놉이 똑같아서 깜짝 놀랐다. 물론 후반부의 전개는 다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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