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마일은 너무 멀다 동서 미스터리 북스 96
해리 케멜먼 지음, 이정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매끈한 책들만 읽다가 고전의 맛을 느끼고 싶어서 읽은 작품. 워낙 유명한 작품에 작가인지라 리뷰를 쓰는게, 넘치는 잔에 물 붓기가 아닌가 싶긴 하지만, 어찌되었건...

추리소설의 영원한 논쟁거리 중의 하나인 사건을 '머리'로 해결할 것이나. '몸'으로 해결할 것이냐 중에 극단적으로 전자의 입장을 추구하는 안락의자형 탐정 영문과 교수 닉 웰트가 등장하는 단편집이다. 이시드로 파로디의 선배 격 정도 되는 셈일까? 개인적으로 하드 보일드를 선호하긴 하지만, 이 단편집은 참으로 깔끔하고 재미있게 읽었다. 동서의 모든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번역의 문제에도 말이다.

표제작인 <9마일은 너무 멀다>를 읽으면, 피카소의 일화가 떠오른다. 그림을 그리고는 이 그림을 그리기 까지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응수하는 피카소. 서문에 쓰여있는 케멜먼의 이야기에서, 회색 세포를 무려 14년 동안이나 단련시킨 노대가의 모습이 떠오른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비록 짧고 어찌보면 논박당하기 쉬운 구조이지만, '9마일이나 되는 길을 걷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빗속이라면 더욱 힘들다'라는 문장에서 살인사건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작가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고심한 세월의 무게를 짐작케 한다. 나도 명성만 듣고 이 책을 읽을 때까지 도대체 어떻게 이끌어냈을까라는 호기심이 늘 있었는데, 정말 명성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추리독자라면 누구나 맛보고 싶은 쾌감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비단 이 단편 뿐만이 아니다. 이 단편집은 단편들의 수준이 고른 편이다. 다른 단편들 역시 짧지만, 응축된 대가의 힘을 맛볼 수 있다. 그리고 앞 뒤에 수미쌍관 처럼 포진되어 있는 작가 나름의 블랙 유머와 인생의 진리는 디져트처럼 입맛을 다시게 해준다.

그리고 이 단편집이 더 특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단편집이 홈즈의 향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홈즈처럼 직접 사건현장을 관찰하지는 않지만, 주인공을 적당히 바보로 만들면서, 예외적인 요소를 거의 배제하고 진실을 향해 몰아붙이듯이 논증해 나가는 과정은 홈즈의 그것과 비슷하다. 홈즈의 팬인 나로써는 어설픈 패스티시 물보다 좋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다만 닉 웰트는 홈즈처럼 의뢰인이 없다 보니, 사건에 대한 이성적 호기심에 몰두한 나머지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쉽기는 했다. 지적 유희에 몰두하다보니 어떤 단편에서는 신적인 모습을 모이기도 하고, 전편에 걸쳐서 냉소와 차가움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이랄까...

작품 전체적인 이야기는 이쯤 하고, 단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9마일은 너무 멀다>는 추론과정 자체는 감히 최고라고 말하고 싶었만, 내가 고전기 작품을 읽을 때 중요시하는 Fair함에서 아쉬웠다. 어쩔 수 없지만, 등장인물들만이 알고 있는 정보를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 점이 조금 아쉽긴 했다. 그래서 내가 꼽는 이 작품의 숨겨진 걸작은 <말 많은 주전자>이다. 하숙집 안에서 주전자 하나로 모든 것을 풀어버리는 Fair한 게임에 감탄, 또 감탄. 동기나 방법. 공정함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가 없는 단편이다. 그리고 <지푸라기 사나이>도 못지 않은 좋은 단편인 것 같고. 다만 내가 가장 싫어하는 태도를 보인 <10시의 학자>는 결말때문에 불만스러웠다. 이건 특정한 태도에 대한 거부반응 정도로 보면 될 것 같고...

이 단편집을 읽고, <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 가지 사건>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 작품이 주는 임펙트는 강렬했다. 역시 고전은 세월이 지나도 좋다. 분량이 짧은 단편들이기 때문에, 새끈한 현대추리소설에 지치신 분들께 감히 일독을 권한다,

추신) 이 단편집의 후속편에 수록된 두 개의 단편도 괜찮다. 웨스트레이크의 단편은 약간 무거운 분위기고, 휴 펜티코스트는 블랙코메디 같은 느낌을 준다. 예전 동아에서 나온 4권의 단편집의 경찰 이야기에서 읽은 책들인데 다시 읽어도 재미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