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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의 노인 사건집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63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 지음, 이정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5월
평점 :
오르치는 이 작품보다는 <빨강 별꽃> 시리즈로 더 유명한 작가입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구석의 노인' 이라는 고전기의 독특한 캐릭터를 창조한 것으로도 충분히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어느 곳이나 '대박'이 터지면 '대박'을 모방하려는 아류작들이 등장하기 마련이죠. 스트랜드 매거진에 연재되었던, 저의 첫사랑 셜록 홈즈의 대성공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사잡지에서 독특한 캐릭터가 있는 추리단편을 내놓기 시작했고. <구석의 노인>도 그렇게 등장한 캐릭터 중의 한 명이지만, 독자적으로 살아남은 축에 속합니다.
이 사건집을 읽으면서 가장 즐거웠던 것은 쉽게 '추리'의 미덕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각 단편은 '퍼즐맞추기'의 즐거움을 느끼기 좋게 되어있습니다. 이야기의 구조를 볼까요?
폴리 버튼이 나타납니다. 노인이 등장해서 기다렸다는 듯이 사건을 설명합니다. 그리고는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의 추리를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그리고는 경찰에 대해서 비꼬는 말투 한 마디를 던지고는 사라집니다. ^^
여기서 독자는 폴리 버튼과 같은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구석의 노인이 초반부에 제공하는 제한된 정보를 통해서만, 범인과 살인방법을 추측해 내어야 합니다. 오로지 추리를 통해서 모든 것을 파악해내어야 하는 즐거움은 쏠쏠합니다.(저는 도입 부분만 읽고, 범인과 방법을 충분히 생각해 본 뒤에 뒷부분을 읽었습니다.) 게다가 정보의 제공이라는 측면에서도, 구석의 노인은 FAIR합니다. 구석의 노인'만' 알고 있는 정보가 후반부에 등장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정당한 대결을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고전기의 작품인데다가 단편이기 때문에, 트릭들이 복잡하지도 않고, 적당한 수준에서 구현됩니다. 물론 고전기의 작품이기 때문에 지금의 경험많은 독자들이 읽기에는 어찌보면 단순하고 익숙한 트릭들이 나열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일부 트릭은 심하게 순진하더군요. 그 점에서 점수가 많이 깎이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한 전형성을 만드는데 기여한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는 있습니다. 천하의 셜록홈즈의 '모 아니면 도' 추리도 지금의 눈으로 보면, 상당히 허술하니까요. 너그럽게 읽는다면 좋은 트릭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작품을 가리켜 '안락의자형 탐정'의 전형이라는 평을 가끔 듣는데, 어느 정도는 동의합니다. 구석의 노인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은 분명히 안락의자형 탐정의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한 순수한 이성적 활동의 결과물이지요. 하지만, 안락의자형 탐정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다른 모습도 일부 보여집니다. 이 노인은 미스 마플처럼 이야기만 듣고 범인을 맞추지는 않습니다.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재판에 갈 정도로 비교적(?)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노인의 수사과정을 듣고 있으면, 불독같은 고참형사의 느낌도 날 때가 있습니다. 단지 사건의 발단부터 해결까지 노인의 입에서 나오다 보니, 안락의자형 탐정의 느낌이 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왓슨 역의 폴리 버튼이 극도로 수동적인 것도 한 몫하죠. 명색이 신문기자인데 사건에 대한 정보조차도 작품 속에서 언급하지도 못하죠. 숙제 않하고 수업듣는 학생처럼 사건의 도입부부터 해결까지 버튼씨가 하는 일이라고는 노인의 말씀듣기 뿐입니다. 특종감인데 받아적지도 않더군요. 신문기자라면, 노인에 대해서 개인적인 관심이라도 가질텐데 절대 관심조차 가지지 않습니다. 아마 노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것은 구석의 노인의 마지막 사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합니다. 생각해 보니, 이런 폴리 버튼의 직업정신의 결여로 인해 거꾸로 이 작품에서는 홈즈-왓슨 콤비나 울프-아치가 빚어내는 화학작용조차 맛볼 수 없기 때문에, 오로지 '문제해결'의 재미만 추구할 수 밖에 없는 역설을 만들어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왓슨의 허약함이 이 단편집의 가장 아쉬운 점입니다만, 그 약점으로 인해 구석의 노인 캐릭터가 더욱 효과적으로 구현되는 것을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상당히 캐릭터가 독특하죠. 신상명세가 없기 때문에 약간은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기기도 합니다. 게다가 마지막 단편때문에 아우라가 강해지는 것도 같구요. 끈매듭과 같은 자잘한 장치들도 이 탐정의 모호함에 양념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이 명작이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고전임에는 분명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고전의 가치는 빛이 바래질 수는 있어도 빛이 사라지지 않는데에 있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이 단편집은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구요. 처음 접하는 분들이 읽기도 쉽고, 적절한 트릭을 구사하는 초창기의 '수작' 단편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일독의 가치는 있습니다.
추신) 이 책 때문에 '구석의 노인' 시리즈가 정식으로 소개될 가능성은 더 낮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지도도 낮은 캐릭터인데다가, 그나마 소개된 것조차 단편'선'집으로 출간되었으니, 그리도 DMB의 성격상 일본의 전문가들이 뽑은 단편위주로 선택했을테니 더더욱이나 소개되지 않은 단편의 수준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