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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네스터를 죽이고 싶어한다
카르멘 포사다스 지음, 권도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네스터 체핀치라는 요리사가 있습니다. 그는 냉동고 안에 갇혀서 누군가가 구원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필사적으로 그는 자신을 죽일 동기가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냅니다. 과연 누가 네스터를 궁지에 몰아넣었을까요?
그리고 소설은 사건의 처음으로 돌아가 네스터 체핀치와 주위를 둘러싼 인물들에 대한 접근을 시작합니다. 네스터 주위의 인물들은 모두 그를 죽일만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전개합니다. 그들은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거의 핵심에는 네스터가 존재합니다. 그 연결고리를 깨달아 나가는 과정에서 주변인물들의 감정은 증폭되고, 살인의 가능성도 점점 커져 갑니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와서 결말을 향합니다.
읽으면서 특이했던 부분이, 비슷한 구조의 (추리)소설이라면 주인공인 네스터에게 일정부분 감정이입이 되어야 하는데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네스터 체핀치가 자기가 왜 죽어야되는지도 모르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면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들법한데, 별로 네스터에게는 좋건 나쁘건 일체감이 적습니다.성격이 모난 것도 아니고, 문제에 처한 것도 아닌 평범한 자영업자입니다. 연결고리라고 부를 수 있는 과거를 제외한다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따름입니다. 오히려 작가의 무게중심은 주변인물을 향해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네스터로 인해 과거에 사로잡힙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그들은 죄의식과 동시에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과거와 현재의 교차를 통해서 주변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두려움. 누구나 한번 쯤 느껴보았을법한 감정입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작가의 의도는 소설 내의 등장인물의 차원이 아니라, 어두운 과거와 이를 바라보는 동시대 남미인들의 모습으로 확장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작중에 등장하는 용의자들의 기억은 줏어들은 상식으로 비추어볼 때 남미의 어두운 과거와 맞닿아 있습니다. 멀리 이야기할 것 없이 친일이라던가 혹은 군부독재로 인한 수많은 과거를 떠올릴 수 있겠죠. 어두운 과거에 적극적으로 영합하였던, 혹은 어쩔 수 없이-상당히 싫어합니다만-발을 담궈야 했던, 아니면 지켜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던.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죄의식이 남을 수 밖에 없고, 집단적으로 그들은 과거를 의도적으로 차단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등장인물을 포함한 '모두'가 네스터를 죽이고 싶어합니다. 과거가 부끄럽기 때문에 또한, 과거가 알려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말이죠.
스페인식 추리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과거의 기억과 죄의식을 개인의 정확하지만 몽환적인 심리묘사를 통해서 탐구한다는 점에서는 스페인식 사회파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회의 모순을 고발한다는 점에서요. 다만 일본의 사회파는 르포르타주에 가까운 리얼리티를 중시한다면, 이 작품은 보르헤스 식의 접근을 한다는 것이 다른 것 같습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지향점은 비슷하다고 할까요?
저는 추리소설 독자이므로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는데,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처럼 이 소설은 추리소설의 구조를 차용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추리소설의 클리세를 적절하게 비틀고 활용하고 있습니다. 다른 분이 리뷰에서 쓰신 키워드를 떠올린다면, 그리고 작가의 의도를 조심해서 따라가다 보면, 범인을 어느정도 짐작가능하게 해줍니다. 범인이 누구냐, 어떻게 죽였느냐, 왜 죽였느냐라는 부분들만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냥 무난한 수준입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는 부분이나 그 뒤에 이어지는 에필로그는 예상가능한 접근이었지만, 책으로 접하게 되니 상당히 신선하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책을 읽으면서 중간중간에 좀 이상하다고 느낀 부분이 있었는데, 결말부분을 보고 나니 어느 정도 궁금증이 풀린 것도 있었습니다.
제 취향이 추리소설을 우선시하는데다가 보르헤스 풍이라 여겨지는 남미 특유의 분위기에 적응을 못해서 중간중간에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제 취향과는 무관하게 좋은 작품입니다. 특히 작가가 공을 들인 것이 분명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심리묘사는 상당히 흥미진진했구요. 그리고 일본 미스터리가 대세인 시장에 스페인 작가의 수준작을 지속적으로 소개하는 출판사의 노력에도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추신) 이 작품을 읽으면서 <역도산> 생각이 많이 나더군요. 몰입하다면서도 멀찌기 밀어내고, 집단의 의식과 개인의 무의식을 탐구한다는 점, 장르가 분명하면서도 장르의 쾌감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특히 결말에서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