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선생 지식경영법 - 전방위적 지식인 정약용의 치학治學 전략
정민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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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돌아가는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다르게, 요즘의 역사저술을 보는 것은 점점 즐거워진다. 역사학에 관심있는 일반인들을 위한 저작들의 양과 질이 향상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1920~30년대의 모던 뽀이와 걸의 시대건, 영정조의 문예부흥 시기건 가리지 않고 좋은 저작들이 나온다는 점에서 좋다.

위의 예시에서 엿보이듯이 내가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시기는 세 시기이다. 첫째는 흔히 구한말이라 불리는, 우리나라의 가장 큰 이데올로기인 사회진화론이 수입된 시기의 엘리트들의 움직임.-아마도 박노자 교수와 허동현 선생의 영향이 크다.-그리고 모던 뽀이와 걸이 나았던, 그러나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았던 1920~30년대-내가 좋아하는 하드보일드/필름 느와르의 시기-, 마지막으로는 영정조의 문예부흥 시기이다. 영정조는 아무래도 '실학(자)'라는 형태가 모호한 학문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를 배우면서-전공자는 아니다.-늘 느꼈던 의문은 의외로 '왜'에 대한 서술이 적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다산 선생의 경우에 위대한 분이라고 하니 그런가보다는 했지만, 사실 왜 위대한지는 잘 몰랐다. 사실 고등학교 때 배운 지식에 대해서 '왜'라고 고민한 지식이 얼마나 있겠느냐만. 주로 언급되는 것이 <목민심서>를 위시한 <여유당전서>인데, <여유당전서>의 방대함 때문에 다산이 훌륭하다면  지금 가장 위대한 만화가는 다산과 같은 방식으로 '남들이 한 권을 낼 때 한 질을 내는' 김성모 화백이어야 할 것이고,  가장 위대한 소설가는 쉼없이 두 개 이상의 신문에서 '남성 소설'을 개척하는 이원호여야 할 것이다.(참고로 이원호 선생의 팬이다.) 말도 안되는 비유지만, 하곻 싶은 이야기는 호기심을 설명해줄 만한 서적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원전을 읽을 실력도 없었고 호기심은 호기심으로 남았다.(완역본도 90년대 중반에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지금까지의 역사학계에서 연구를 등한시했을 리는 없지만, 적어도 그 결과를 대중과 공유하려는 노력은 부족하지 않았나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을 쓰신 정민 교수나 안대회 교수의 시도는 시도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의구심이 상당부분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다산이라는 거인의 입체적인 모습을 알 수는 없었지만, '치학'이라는 주제만으로도 충분히 거인이라는 것을 느낀다.  이 책을 읽으면 다산'만'의 독창적인 치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방법도 있고, 어떤 책-그것이 인간관계론이던, 자기계발론이던, 무엇이던 간에-에서 본 내용을 다산의 말투로 옮긴 듯한 평이한 부분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평이함' 때문에 다산이 진정 위대한 분이었다고 느낀다.

내가 느끼는 '평이함'의 근원은 다산이 언급한 부분들을 다른 누군가, 정확히 말해 서양의 누군가가 이야기한 것들을 18~9세기의 다산도 언급했기 때문이다. 모든 좋은 것 멋진 것이 반드시 서양사회의 전유물은 아니지 않는가? 사회진화론의 피해자이면서도 사회진화론의 모범생인 우리나라의 현실을 비추어볼 때 민족적 자존심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도 이런 통찰력을 지닌 분들이 계셨다는 것이 흥미롭고 계속 연구되어야 할 주제라고 본다.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근대화 혹은 문영화가 절대 명제가 되어버린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의 제1목표는 외국학문의 수입과 전달이었으며, 내부에 대한 성찰은 압도적인 서구문명의 위력에 눌려 늘 뒷전이었다.(국문학 강의에도 영어를 쓸 것을 권유하는 나라가 우리나라 말고 또 있을까?) 평균적으로 학문의 발달정도가 우리보다 뛰어난 것도 인정할 수 있고, 내 자신이 민족주의자도 아니고 민족주의에 대해서 그다지 호감이 가는 것은 아니지만,  '신토불이'의 폐혜를 걱정하기에는 우리 것에 대한 고찰이 지나치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러한 책들이 계속해서 등장한다면 나의 이런 우려는 기우에 불과할 것이다고 본다. 앞으로도 이런 작품이 계속해서 나와서 대중과 소통하고, 대중의 치학에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치학과는 별개로 다산 선생의 작업스타일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책대로라면, 다산은 한 개인이자, 동시에 다산학파의 총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밑에서 자발적으로 생활의 고달픔을 감내하면서 스승의 작업을 도운 제자들은 어떻게 봐야할까? 어떻게 생각하면 쪽번역과 제본소 만화의 행위도 이러한 도제행위에 들어갈 것이다.(물론 현대의 도제행위는 자발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다산의 경우도 자발적일 것이라는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은 없다.) 이것을 어떻게 봐야할까? 설사 다산이 총감독이라고 해서 모든 명예를 다산이 가져가야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치학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자발적인 봉사를 이끌어 낸 것인지, (이런 표현은 정말 죄송하지만) 자발적인 존경심을 미끼로 노동착취를 한건지 알쏭달쏭했다. 윤리적인 문제인데, 판단하기가 참 난감했다. MS가 윈도우를 만들었다고 해서 참여한 모든 개발자의 이름을 표기하지는 않지만, 콘텐츠의 경우에는 최소한 '표기'는 해주지 않는가.  이런 난점과 더불어 전수자들의 모습도 보고 싶다. 스승에게 치학을 배운 제자들의 발전된 모습을 언젠가 정민교수가 연구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청출어람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분야에만 천작해서, 스승을 일부 뛰어넘는 제자가 있었을 것도 같은데 나같은 일반인이야 상상에만 그칠 뿐, 그 몫은 죄송하게도 학자의 몫이다. 

책에 대해서 덧붙이자면, 이 책은 다른 정민 선생의 책에 비해 읽기가 쉽다. 정민 선생은 논문스타일의 글쓰기가 기본바탕이다보니, 대중서가 아닌 논문집의 형태로 출간되는 느낌이다. 주제의 참신함과 깊이에도 불구하고 중복서술과 일관성에서 많은 부분 접근에 어려움이 있는데, 이 책은 그런 단점들이 사라진,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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