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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ㅣ 열림원 이삭줍기 2
뱅자맹 콩스탕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고전이 아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인데, 첫째는 슬프게도 현재 우리에게 고전은 '축약된 내용과 작품해설은 알고 있되, 읽어본 적은 없고, 읽어볼 생각도 없는 예전에 출간된 유명한 책'이라고 봐야할 텐데, 이 책은 내용을 아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유식한 표현으로 '인구에 회자'된 적이 없는 책이다. 이런 정의에 따르면 이 책은 고전이 아니다. 덕분에 나는 무척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어렸을 때 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이 책 저 책 읽은 덕분에 줄거리만 대충 알고 읽어보려다가 책의 두께에 지레 겁먹고 안본 책들이 많다. 그런 책들이 진정한 고전이지...)
그리고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이 책에서 예견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에 감탄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단순한 연애이야기라고 보기는 아쉽다. 이 책이 혁명 이후의 혼란상을 은유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주인공 아돌프가 엘레노르를 만나게 된 D시는 '완벽한' 언론의 자유가 존재하지만, 사교계의 의중에 여론이 지배되는 곳이다. 마치 현대의 여론 형성과정을-매스미디어와 엘리트의 결합-보는 것 같지 않은가? 주인공 자신의 자유를 극도로 추구하면서도, 그와 상충하는 사회적인 시선들을 거부하지 못하는 모순된 모습을 느낀다. 자신의 정체성을 내부에서 찾지 못하고,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가름하려 하다. 이 비극적인 연애의 시작도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서 시작한 것이니 말 다했지. 아돌프는 이 분열된 마음 속에서 끈임없이 방황한다. 이 작품은 보통의 연애담과 달리 파탄에 이르는 과정을 상세하게,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묘사와 더불어 보여준다. 이는 이 작품이 말하고 싶은 것이 어떤 것인지 짐작하게 한다. 자유를 추구하지만 막상 자유가 주어지면 누릴 수 없는 현대인의 불행한 자화상 말이다. 도시를 떠나고 싶다고 여행을 떠나면서도, 여행지의 가장 좋은 시설을 묵어야 편안함을 느끼는 상황이랄까? 이 작품이 쓰여졌을 때보다 외적인 자유도 신장되었고, 사회제도도 보다 정교해졌지만, 근원적으로 충돌을 일으킬 수 밖에 없는 문제고,현대인의 마음 속에도 주인공 아돌프와 유사한 찢겨진 마음이 존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역사적인 배경으로 유추해보면,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계몽주의, 특히 몽테스키외나 로크 등의 사상과 흡사하다. 즉 완벽한 자유는 삼권 분립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민주주의 체제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완전한 체제 내에서의 완벽한 자유보다는 완벽한 체제 내에서의 불완전한 자유가 더 낫다는 의견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환경보다는 성격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걸 자기함리화라고 해야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이 작품의 주된 모습 중에 하나는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이다.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서투르고, 본심과는 다른 말을 내뱉으며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한 존재로 매개인이나 매개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 흥미롭다. 사회적인 시선과 주인공 아돌프의 무기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랑합니다.' 혹은 '헤어지죠'라고 하면 될 것을 돌리고 돌리다가 결국 파탄에 이르게 된다. 이것 역시 요즘 현대인의 중요한 특성 중에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타협주의자가 가지는 필연적인 한계도 암시한다. 중도, 혹은 제 3의 길이 가지는 문제는, 필연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으로 기울어질수 밖에 없고 더 나아가서 친X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김문수, 이재오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NL에 비해 타협적었던 PD들이 열우당도 아닌 한나라당에서 국가주의자로 변신하는 모습은 새는 역시 좌우의 날개로 날 수 밖에 없다는 리영희 선생의 명언을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 아돌프는 아버지의 사상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뒤로 갈수록 아버지로 대표되는 체제의 힘을 거부하지 못하고 점점 포섭되어 간다. 다만 무기력과 특유의 고집 때문에 사회에서 고립되는 길을 택했을 뿐이다. 확신범이었고 행동력이 있었던, 일제치하의 이광수 등의 점진적 개혁론자들의 변화된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솔직히 나도 요즘 이런 사상적인 방황을 하는 터라 예사롭지 않았다. -_-;
나는 연애는 밝은 모드라 이들의 연애는 연애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연애-소유의 욕망-에 대한 고찰도 음미해볼만 하다. 내용이 두서가 없는데 혁명 전후에 쓰여진 책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현대적인 인물상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팜플렛 수준이라 별 부담없이 읽었는데, 읽고 나서는 계속 곱씹게 되는 묘한 책이다. 내용도 알려지지 않고, 신뢰감을 주는 김석희 선생의 번역과 후기는 이 작품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추신) 이 책을 읽는 데 가장 큰 난점은, 주인공의 이름이 아닐까. 아돌프 하면 떠오르는 그분 때문에. 하긴 이 책도 엘레노르에 대한 '나의 투쟁'이라고 생각하면 비슷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