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 말로는 '미국의 모든 현대 문학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책 한 권에서 비롯'되었다는데, 이 소설이 특별한 갈등 또는 문제의식으로 시작되지는 않는다. 명작에 대한 선입관이 으레 그렇듯 이 책이 남모르는 심장한 의미를 내장하고 있을 거라 지레 짐작하기 쉽다. 마크 트웨인의 의표를 찌르는 경고.'이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찾으려고 하는 자 추방할 것이다.' 이 소설의 만끽을 원한다면 지은이의 명령에 따라 경고 하고 있는 장군 G.G.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편이 좋다. 소설은 허클베리 핀의 자전적 여행기다. 작가의 심중에 꽉 쫘여진 틀거지로 전개되는 소설은 아니다. 여러 에피소드가 나열되지만, 모든 에피소드가 소설에 반드시 필요해 보이지는 않는다. 모험은 기실 인디애나 존스의 육박전만큼 늘상 흥미롭지는 않을 것이다. 따분할 때도 있다. 지리하면 지리한대로 헉 핀의 여정을 따라 한 숨 돌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간혹 만나는 긴장이 육박하는 상황이나 헉 핀의 재기를 즐기며 이이호호 웃고 싶을 땐 웃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 모험담은 모험을 가능케 하는 조건을 한번쯤 생각케 한다. 헉 핀은 왜 모험하는가. 나는 문득 이 질문과 만났다. 그리고 이 질문이 무용함을 이내 알았다. 모험하는 자는 질문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가슴은 막힘없는 낙관과 휴머니즘으로 질문 이전에 뻐근하다. 가령 나는 그들이 자유를 위해 모험한다고 대답할 수 있다. 그 자유는 덕목으로서의 자유인가. 아니다. 덕목 이전의 자유다. 자유는 충격과 동시에 억압으로 작용한다. 자유가 거대한 이념의 틀거지로 자리잡기 전 톰 소여와 헉핀은 운신하여 자리의 경직을 피한다. 헉 핀의 동행 도망친 흑인 노예 짐의 자유는 톰 소여에 의해 다음과 같이 발설된다. "짐을 가둘 권리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어서 빨리 가!ㅡ일 초라도 꾸물거리고 있어선 안 돼. 쇠사슬을 풀어 주란 말이야! 짐은 이제 노예가 아니야. 이 지상을 걸어다니는 어느 생물 못지 않게 자유의 몸이란 말이야!" 자못 비장해 보이나 이 진지한 언설은 전후상황에 의해 희화된다. 짐은 이미 그의 주인의 유언에 따라 자유의 몸이 되어 있었고, 톰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짐의 탈출을 위해 복잡다기한 모험거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짐의 탈출을 위한 무용한 수고가 사건을 우습게 만듦으로써 톰의 무거운 언술은 그 무게를 떼어버리고 일정의 부력을 얻는다. 마크 트웨인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 그는 자유를 말하기 위해 거창하고 사뭇 진지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또한 우화적 기법을 통해 작품의 이면과 논법을 따지게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두 가지 방도를 피하면서 '자유'에 관해, 말의 정확한 의미에서 자유롭게 이야기 하고 있다. 마크 트웨인의 자유는 자유로 말해질 수 없는 자유이며, 그의 휴머니즘은 휴머니즘으로 규정될 수 없는 휴머니즘이다. 어깨에 힘 줄 필요없다. 나는 소설을 읽으면 그만이며, 허클베리 핀을 느끼면 된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동기', '교훈', '플롯'을 '찾으려고 하는 자', '기소', '추방', '총살'되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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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대도 며칠 남지 않은 형편에 책을 몇권 구입했다. 책구매도 중독이지 싶다. 일정 기간 서점을 멀리하거나 이렇게 인터넷으로라도 구입하지 않으면 왠지 좀이 쑤시면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책이지 싶다. 이때의 책은 그 내용보다는 물신의 대상으로서의 책이니 이 버릇도 자랑은 아닐 것이다. 막연한 소유의 욕망이 물질의 구입으로 그 정신까지 사로잡을 수 있다는 최면을 내게 걸었던 것이다. 구입한 책들:(1) 고종석, <감염된 언어>, 개마고원 (2) 고종석, <언문세설>, 열림원 (3)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4) 보르헤스, <보르헤스의 불교강의>, 여시야문 (5) 김현, <책읽기의 괴로움/살아있는 시들>, 문학과 지성사 (6) 김현, <분석과 해석/보이는 심연과 안 보이는 역사 전망>, 문학과 지성사;읽었던 것들도 있고, 선물로 주어버려 새로 구입한 책도 있다. 다시 읽고 싶어서, 두고두고 보고 싶어서 산 책들이라 할 수 있겠는데, 책의 구입에 더 큰 동기를 마련해 주었던 소이는 책 몇권이 곧 절판될 것만 같은 위기감이었다. 내게 책은 어쩔 수 없이 무엇보다 페티시즘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오늘 배달된 책을 보고, 가슴 한 구석이 든든했고, 동시에 허무했다.

근자에 읽었던 책들:(1)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고려원;조르바는 나와 상극의 인간이다. 내가 그의 곁에 있었다면 미치도록 달달 볶아서 그를 안절부절 못하게 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가 나의 입을 틀어막든지. 둘 중 하나였겠지. 조르바의 자유는 이성의 영역을 벗어난 자유다. 그의 체험, 춤과 노래, 땀에서 오는 자유다. 그에게 이성의 자유는 만져볼 수 없는 자유이고, 따라서 배격할 만한 자유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통밥을 굴릴 것이므로 조르바에게 동화되지는 않았을테지만, 그가 곁에 있었다면 그를 그 몰래 퍽이나 좋아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책은 인물에 푹빠져 읽어내려가야 제대로 읽었다 말할만 하겠다. 그러니 그는 전형적인 마초가 아닌지, 그의 자유는 사회적 영역 안에서 자유라 불릴만 한 것인지 끊임없이 따졌던 나의 독서는 만끽의 독서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꼰대들의 필독서다. (2) 홍세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한겨레신문사;그의 대표작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읽은지 오래되어 그 내용이 기억나지 않음에도 내게 그리 좋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사회주의적 가치관이 책의 어느 부분에서 내게 거부감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책 또한 납득가지 않는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그의 개방성, 탈권위적인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개방적 태도와 상호존중은 이념의 갑각을 떠나 가장 먼저 요구되는 자세일 터이다. (3) 성석제, <쏘가리>, 가서원; 집근처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했는데, 알고보니 절판된 서적이어서 얼른 구입했다. 역시 나의 책구입의 우선원칙에 '절판'이 꽤 큰 역할을 한다. 예전에 읽었던 엽편들도 많았는데, 책으로 다시 읽으니 그 재미의 진가를 알겠다. 이 작가는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잘도 우려먹는다. 소설도 그렇고, 산문도 그렇다. 그런데 질리지 않게 이야기를 잘도 풀어낸다. 책 속 한 엽편에서 최고의 이야기꾼이 지녀야할 자질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도 그 재미를 잃지 않게끔 해야한다고 말해놓았다. 그 자신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이제는 사라진 신촌의 클래식 다방들에 관한 이야기, 강화도의 비빔국수에 관련된 추억들, 어렸을적 자신의 대부였던 나자로에 대한 기억이 읽는 나의 가슴을 덥힌다. 성석제는 전형적인 보수적 작가다. 그의 이야기는 대개 지나간 시간의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의 탈주는 자주 과거를 향한다. 그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과거를 행복하게 추억할 수 있는 데에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크게 관련있는 듯하다. 그는 요즘 <한겨레21>에 음식에 관한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그 칼럼이 이 보다 더 지루할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최근의 생활에 깨소금이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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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에서 이르길, 어떤 사람들은 행복이 닥쳐오면, 꿈꿔오던 완벽한 상황과 마주치면 그 상황에서 있는 힘을 다해 도망치려는 성향을 갖는다고 한다. 나의 유토피아는 먼 미래에 있거나 과거 어느 시절에 있어야지, 현재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나에겐 이 순간을 위한 준비가 필요했다, 이 완벽한 순간은 내가 완벽한 조건에 있을 때 닥쳐왔어야 했다 등등의 생각을 그들은 한다고 한다. 그들은 마음 속 깊이 행복하다는 느낌과 동시에 불안하다. 이 행복을 남김없이 누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 불안감은 지레 했던 걱정의 현실화를 조장한다. 행복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불행을 자초하는 격이다. 연애에 있어서도 그렇다. (그렇다. 위의 책은 연애와 관련된 책이다.) 자신이 꿈꿔오던 상대방과의 데이트가 의외로 실패하며 당사자에게 불안을 야기하여 다음 데이트를 기약없이 미루려는 경향은 위의 사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범위의 일이다. 그들은 현재가 빨리 과거가 되길 바란다. 정해진 몇가지의 축을 대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한다. 지나간 과거는 그를 침범하지 않는다. 그는 안전하다. 바둑알을 쥐고 있다. 한데 그렇다면 그는 행복한가. 과거의 어느 지점, 미래의 행복이 예측 불가능하다지만 가능하다 말하고만 싶은 기만의 욕망이 과연 그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볼 일이다. 조로의 욕망이여,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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쎈연필 2004-01-11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일기든 수기든 편지든 기록되어지는 것은 봐도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실례를 무릅쓰고 글을 남깁니다. 이 글 참 좋습니다. 공감갑니다. '어느 책'인지 알 수 있을까요? 입대하신다니 아쉽네요. 시간을 두고 님과 이야기 나누어볼 기회를 엿볼 생각이었거든요. 예전, 카운터 2의 주인공은 저였습니다. 제 서재에서 옮겨간 글이 있길래 그 경로를 통해 왔었습니다. 그땐 미안했드랬습니다만, 요즘은 페이퍼가 올려지는 즉시 공개되는 실정이라... 건강하시구요.
 

일기를 쓰자면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가장 편한 고백이어야 할 일기이기에 어깨에 실리는 과다한 힘이 부당해 보인다. 하지만 일기라는 글의 한 종류가 내면의 고백인 동시에 나 아닌 타인에게 비쳐질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을 바에야 그 힘은 거역할만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쓰여진 모든 글은 독자를 의식하고, 적어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중 일기는 적어도 겉으로는 그 폐쇄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열림과 닫힘의 팽팽한 긴장 위에 있다. 어쩌면 일기는 그 폐쇄성을 전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인의 일기를 읽는 독자는 그 일기가 글쓴이의 가장 진실한 내적 고백이라고 생각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일기라는 순수한 그릇은 그 안에 무엇을 담든지간에 한꺼풀의 기름을 덧칠해준다. 그러니까 내가 일기를 함부로 쓸 수 없는 이유에는 앉을 자리의 순백에 질려버린 탓도 있다.

그런데 사실 위와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순진하지만은 않다는 증거다. 아무 생각 없이 말 그대로 거침없이 일기를 쓸 수도 있을게다. 일기의 장르적 속성과 글쓴이와 독자의 심중까지 헤야려 본 까닭에는 실제로 내가 일기를 하나의 전략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이 없지 않아 작용하고 있다. 일종의 불가피한 반증인 셈이다. 어쩌면 이런 것. 채 씨는 어느날 기 시인의 산문을 보았다. 기 시인은 요절한 시인이므로, 사실 그에게 출간과 게재를 목적으로 산문을 쓴 경험은 없다. 하지만 그는 일찍 죽었고, 탁월한 시인이었기에 그의 생전 일기와 산문이 책으로 출간되기에 이른다. 산문집은 낙양의 지가를 올리면 팔린다. 그것은 단순한 대중적 판매고는 아니었으며, 감수성 예민한 문소, 문청들을 주 소비층으로 하고 있었다. 물론 채 씨도 그 산문집을 읽게 되었다(그의 감수성은 예민보다 신경쇠약에 가까웠다지만). 일기였음에도 망설임없는 깔끔한 문체, 섬세한 감수성을 그 산문과 일기들은 보여주었고 그를 감복케 하였다. 채 씨도 그런 일기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우선 그의 마음가짐은 타인의 일기를 훔쳐봄으로 가능해진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일기는 철저한 타인지향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 여기에 그의 성격적 결벽은 단박에 완벽한 문장과 감수성을 바랐던 것인데, 그에게 그런 준비가 돼있을리 없었다. 그는 절망했고, 일기는 항용 몇줄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가령 이렇다는 것이다.

요컨대, 일기의 장르적 순수함과 글쓴이의 타인지향적 글쓰기, 완벽함에 대한 결벽, 이 세 요소가 공존할 때 최악의 일기가 쓰여진다. 감정의 여과가 없고 내 글쓰기의 훈련상태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글이 가능할 때, 나는 최악은 벗어난 일기를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뭐가 두려워서 내 치부를 피하는 걸까. 애시당초 이런 고심참담을 늘어 놓을 필요는 없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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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읽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읽은지가 까마득해서 그 책과 이번 책이 어떤 차이점을 지니고 있는지 분별할 수는 없지만, 이번 책 속의 글 <똘레랑스에 대한 두 개의 사족>은 유익했다. <나는 빠리의...>에 담겨 있는 주된 내용이 저자의 말대로라면 바로 똘레랑스일텐데, 그 책의 내용이 잘 상기되지 않는 나로서는 <두 개의 사족>이라는 짧은 글이 그가 말했던 똘레랑스를 받아들이기에 자못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똘레랑스는 타인을 대상으로 하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하지 않는다, 극단적 이념에게 필요한 것은 똘레랑스가 아닌 앵똘레랑스다, 라는 그의 말이 바로 그 짦은 글의 내용이다. 똘레랑스. 거칠게 말하면 그것은 넉넉한 마음씨다. 자신의 의견과 다른 생각에 대한 관용을 똘레랑스라 칭할 수 있겠다. 쉬운 개념이지만 구체적 현상에 그 개념을 적용하자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닐게다. 똘레랑스란 개념자체가 두루뭉실한 점이 없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와 같은 극단의 사회에 그것은 반드시 필요한 무엇일게다.

영어공용화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다소 무리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한글이 아닌 다른 문자체계로 씌어진 글은 우리 문학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문학이 우리 문학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정에서 그런 주장을 하기 위해선 많은 논거가 필요할 듯하다. 물론 그 부탁은 무리한 것일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언어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하고, 똘레랑스를 소개한 치적이 그 단점을 충분히 감싸주고도 남기 때문에 그러하다. 책의 몇가지 단점에 대한 지적이 가능하다 해도 프랑스 문화를 구체적으로 살펴 볼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독서의 즐거움이 크다.

문화비평집. 이 책의 표지엔 그렇게 씌어있다. 난 어쩌면 지금까지 정치한 비평의 언어를 위해 애써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의 독후감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쓰고 싶은 언어는 비평의 언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러주었다. 어르고 눙치는 글. 너스레를 떠는 글. 그런 글들이 바로 내가 쓰고 싶은 글들이라고 문화비평집인 이 책이 말해주었다. 머리 속으로 꼼꼼히 따지는 글보다 활달한 언어의 글이 쓰고 싶다. 물론, 그렇다고 홍세화 류의 책을 더이상 읽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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