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되면 피곤하다. 게으른 하루가 가고 있다. 이래선 안 될 것 같다. 하룻동안 내가 했던 말과 행동들을 곱씹어 보고, 또 누군가가 떠오르면 그이와 나의 관계를 곰곰이 따져보기도 한다. 그러자면 머리가 지끈해지고 아랫배가 살살 아프다. 자야겠다. 잠도 안온다. 밤낮이 바뀐 일상도 인이 박였는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책상 서랍을 이리저리 뒤져본다. 접힌 갱지 네 장이 나왔다. 고등학생일 때, 시험 전날이나 익혔던 한문 유인물 몇 장. 베개 위에 가슴을 이고 한자한자 써보았다. 시간만 나면 하던 교과서 공백에 하던 낙서가 한문 갈기는 거였는데, 그렇게 갈겨 댔는데, 재주가 어지간히도 없는지, 서체가 아직 똑같은 꼬락서니다. 절망, 절망. 서예를 잘 하려거든 무릇 힘이 있어야 한다, 우선 손목 힘을 기르는 게야, 하고 선생님께서 이르셨거늘. 그렇다면 여태껏 셀 수 없는 종이를 더럽혔던 본인은 어떻게 된건가. 이 비재를 숨기기 위해서인지, 남 앞에선 꼭 흘겨 쓰게 된다. 역시 한 방면의 실력자를 가늠하려거든, 그의 기본을 따져야 한다. 어설픈 것들이 분식으로 제실력을 감추려 들기 일쑤다. 그래도 흘겨쓰는 버릇이 내게 꼭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이, <생활한문>시간에 선생은, 나의 판서를 보고 한마디 해주었다. '수병 학생은 서예를 했나보군요.' 물론 그렇지 않았으므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는데, 조금이라도 기미를 보이면 본색이 탄로 날 것 같아 뻣뻣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다들 아무 말이 없었다.

사자성어 익히는 일이 즐겁다. 교훈이나 처세를 함유하지 않더라도, 성어는 소루한 일상을 낯설게 한다. 문득 풍경같다. 성어는 그 풍경 속을 잠시 주유하게 해준다. 사불성의: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김수영은 사불성의하면 여편네를 팬다고 그의 산문집에 쓰여있다. 적수공권: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 우리말에 '맨주먹 붉은 피'라는 관용어가 우스개로 쓰인 일이 있는데, 성어와 뜻이 유사해 이 성어는 쉽게 외게 된다. 작취미약:어젯밤 술이 깨질 않았다. 여광여취:미친 듯, 술취한 듯 즐겁다. 망양지탄:양 찾을랬더니, 길이 너무 여러가지다, 현재 나의 상황이 그러하다. 후생가외:젊은이의 가능성을 가늠키 어려우니 가히 두려워해라, 후배님들 책을 덜해야겠다. 불원천리, 진문기담, 관인대도 등등등. 가장 좋았던 성어는 수불석권이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위편삼절, 독서백편의자현, 한우충동, 현두자고, 형설지공 등등의 말이 있다지만, '수불석권', 괜히 좋다. 어쨌든 사자성어 공부는 정신의 안정을 도모하며, 소화불량해소에도 도움이 된다. 잠도 잘 온다. 덕분에 잘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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쎈연필 2004-01-15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편네란 것은 사불여의하면 치고 차고 할 수 있는데, 처체라는 것은 도무지 그렇게 할 수 없는 종족이라고... 김수영이 썼던 거보고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 솔직한 사람이었죠. 덕분에 이따가는 김수영 산문집 좀 들추어야겠습니다 ^^